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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과 은혜(8)-말씀 하소서! na kim 2017-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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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5. 21.

 

* 본 문 : 미가서 66-8절 말씀 (Micah 6:6-8)

* 제 목 : 우상과 은혜 - 8. 말씀하소서! (Speak to me!)

 

어제 한 젊은 전도사님이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분입니다. 참외를 한 박스 가지고 오셨습니다. 얼마 전에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저희 교회가 만든 설교 CD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담장 너머, 교회’(Beyond the border, the church)라는 제목이었고, 예수님께서 목자의 우리에 속하지 않은 양떼들, 즉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을 위한 구원의 계획을 선언하신(10:16) 말씀을 따라서 오늘날 우리 교회도 담장을 넘어서는 사역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 전도사님에게는 남다르게 들렸습니다. 자신이 아직 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자기 한계의 장벽을 넘고 도전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었나 봅니다. 그 장벽을 넘어서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자신이 지금 도전하기를 포기하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 정해놓은 한계 밖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삶에 헌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한인 교회에서의 사역을 사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꿈꿔왔고, 미국에 공부하러 온 이유가 되었던 다민족 사역에 발을 들여놓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신학교 가까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섬기는 한 흑인 목회자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그의 목회를 배우겠다고 결심했고, 그 사역에 함께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달부터 그 흑이 목사님을 도와서 다민족을 섬기는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노라고, 고민하고 있던 자신에게 길을 안내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참외를 한 박스 들고 온 것입니다.

 

그 전도사님이 가시고, 저는 한 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 저렇게 해야 하는데...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I have to live like that 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적으로 저렇게 패기있고 용감하게 살아야 할텐데, 어느새 목회에 안주하고 나의 울타리 안에서 적당한 불만과 적당한 도전 의식과 적당한 자기 만족을 비벼서 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었던 말씀, 하나님께서 제게 먼저 은혜로 주셨던 그 말씀은 저보다 그 전도사님에게 훨씬 더 진한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어두웠던 엘리의 입을 통해서 오히려 엘리 자신은 깨닫지도 못했던 복음을 사무엘과 한나에게 전하게 하십니다. 복음은 삶으로 순종할 준비된 사람들, 복음과 함께 자신의 장벽을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됩니다. The Gospel becomes a power for the people who are ready to obey, are willing to overcome the barrier with it.

 

1. What is your Monster?

 

그리고 보니 한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늘 고민이 많고 심각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한번은 저와 묵상했던 말씀을 나누던 중에 다윗과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 골리앗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반대로 당시의 왕이었던 사울에게 골리앗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다윗은 모든 사람들이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기고 있던 골리앗에게 도전합니다. 상식이나 용기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이리 따위를 쫓던 경험으로 골리앗을 상대하겠다는 것은 지나치다 못해 어리석은 판단일 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거룩한 분노를 품고 골리앗을 향해 질주했고 승리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다윗을 닮기보다 사울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매우 안정지향적인 성품인데다가 한 번도 무엇인가 대단한 장벽을 극복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표현대로라면 자신이 만난 장벽은 바로 'Monster'(괴물)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한 번도 자신의 삶 앞에 버티고 서 있는 Monster를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도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원래 자신의 비전은 선교에 있는데 한번 잠시 선교에 도전했다가 너무 힘들어서 돌아오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왜 이렇게 나약한지 모르겠다고, 세상은 왜 자신 앞에 늘 Monster 처럼 맹렬한지 모르겠다고 한탄했었습니다. 마치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해버린 사울처럼, 자신은 믿음이 있지만 그 믿음을 무기로 사용해 본 적이 없고, 장벽을 넘어서기보다 그 안에 안주한다고 했습니다.

 

2. 우상, 내게 명령하는 것(The Idol, who controls me)

 

요즘 가끔 그 목사님 생각을 합니다. 여전하십니다. 다만 제가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늘 말씀하시던 Monster는 실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세상이 너무 힘들다고, 항상 자신에게는 잔혹하고 맹렬하다고 불평했지만... 실은 그 Monster는 세상 이전에 그 목사님 안에 있는 그 무엇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상은, 내 안에서 한계를 설정하고 “No! You can't do it"이라며 명령하는 그 무엇일 수 있습니다. Idol is what sets the limit in my heart, and says "No! You can't do it".

 

생각해봅시다. 목동이었던 다윗이 이길 수 있었던 골리앗이라면 장군이었던 사울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기지 못했던 골리앗, 그가 싸움조차 하지 못하고 패배해버렸던 골리앗은 두려움과 염려, 혹은 나태함과 게으름의 얼굴로 사울의 마음 속에 자라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가 넘지 못하는 장벽,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말씀이 능력이 되지 않는 원인 - 저기 벌판에 큰 칼을 휘두르고 있는 골리앗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내 안에 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로 숨어 있는, 나의 삶의 한계를 결정하고 내 행동을 통제하며....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아닌, 내가 받은 말씀이 아닌, 내가 옳다고 믿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심지어 목회자이지만 내가 받은 사명으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늘 과거의 상처와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가며,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아닌 염려와 두려움으로 살아가게 하는 그 무엇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상이란,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며 우리의 기도와 소원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입니다. 하지만 우상의 또 다른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제한하는 그 무엇입니다. 내 마음과 삶에 숨어 있는 권력입니다.

Idol is, of course, something that takes the place of God's name and is the object of our prayers and wishes. But there is another role of idol. It is something that limits our thoughts and actions. It is the power hidden in my mind and life. 드러나기는 내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용사입니다. 칼과 창을 들고 있습니다. 적군 앞에, 골리앗 앞에 군대를 거느리고 대적하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내면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숨어 있는 그 무엇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울은 그것을 우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사울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울로 하여금 싸우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어린 목동 다윗이 싸우겠다는데... 좀 말려보다가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을 입혀줍니다. 이것 입고 나가서... 조금이라도 천천히 죽으라는 것 아닙니까? 그 정도가 사울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는 그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3. 자신에게 말하다. Self-Talking

 

혹시 여러분은 하루에 혼잣말을 얼마나 하십니까? 어떤 때 주로 혼잣말을 하게 됩니까? 그런데 실은 소위 혼잣말, self-talk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이구요, 늘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대부분의 결심과 결정들은 길거나 짧거나 간에 모두 self-talking의 결과입니다. 상황에 대한 반응을 결정할 때도 나의 자아는 짧은 순간 self-talking을 합니다. 성경에도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시편의 시인이 자신을 향해 말을 하지 않습니까? 대표적인 표현이 시편 42편에 있습니다. 시인은 스스로 묻고 대답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5)

Why are you downcast, O my soul?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my God

 

미가서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선지자는 스스로 묻고 대답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6-8)

 

With what shall I come before the LORD and bow down before the exalted God? Shall I come before him with burnt offerings, with calves a year old? Will the LORD be pleased with thousands of rams, with ten thousand rivers of oil? Shall I offer my firstborn for my transgression, the fruit of my body for the sin of my soul? He has showed you,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es the LORD require of you? To act justly and to love mercy and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여러분이 보시기에 그들은 선하고 좋은 대화를 했을까요? , 그렇습니다. 시인과 선지자는 좋은 Self Talking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자기 대화가 다 좋은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언약 공동체가 형성될 때 대표적으로 공동체를 깨뜨리는 범죄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간아나니아와 삽비라’(Achan, Ananias and Sapphira,) 입니다. 아간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던 불법적인 노획물을 자신을 위해서 숨긴 죄를 저질렀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정말 아무런 갈등도 생각도 없이 그 일을 했을까요? 아마도 몇 번을 주저하고 고민하다가 에잇... 설마 모르시겠지...라고 결론짓고 그 일을 했을 겁니다. 여러분도 그러지 않으시나요? 우리는 아무리 어리석은 결정일지라도 고민과 갈등 없이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헌금을 하면... 교회에서 직분과 존경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재산을 팔고 그것을 나누어서 마치 전부를 헌금한 것처럼 사도들과 교회를 속이는 과정이 있습니다. 아무런 고민과 갈등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그리고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 이제 한번 대답해 봅시다. 시편 42편의 시인도, 미가 선지자도, 아간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모두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모든 결정은 아름다운 것일까요? 우리들의 모든 결정은 선할까요? 왜 시편 42편의 시인과 미가의 결정은 하나님께서 지지하시고, 아간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결정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일까요?

 

4. 말씀하옵소서!(speak to me!)

성경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런데 성경이 또 하나님을 설명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또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 존재가 신비이기 때문에 사람의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의 모든 기도는 응답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라고 내가 자신에게 물을 때... 우리의 내면의 자아는 다시 한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내면에 말씀하십니다. “왜 낙심하느냐? 왜 낙망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느냐?“ 이 말씀을 들은 우리의 자아는 나 자신에게 다시 말합니다. 시편 42:5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5)

Why are you downcast, O my soul?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my God

 

어떻게 시인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과 교통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신에게 물었을 때 그의 내면에서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또한 그랬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사탄에게 내줍니다. 다른 음성을 듣습니다. 다른 뜻을 받습니다. 다른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의 지난 한 달을 두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자기 대화의 끝에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 승리하셨습니까? 반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까? 믿음이 이겼습니까? 여러분의 분노와 기질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겼습니까? 여러분의 염려와 걱정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여러분의 삶에 이루어졌습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욕심이 이루어졌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서 여러분을 control하고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세상입니까?(What does control you in your heart? the Word of God, the words of thw world?)

저는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이 제게 보내신 그 전도사님과 참외 한 박스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렸던 서원을 기억하며 스스로 만든 담장을 무너뜨리는 한 청년을 기억합니다. 쉽고 안전한 길에서 벗어나 험하고 힘든 길을 선택한 한 그의 굳은 마음을 생각합니다. 그가 들었던 복음과 제가 전했던 복음은 같습니다.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 산과 강은 먼저 내 안에 있고, 그리고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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