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 1. 예수님의 마음으로 | na kim | 2017-06-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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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25. * 본 문 : 베드로전서 3장 8-9절 말씀 * 제 목 : 우리 교회 - 1. 예수님의 마음으로 최근에 제가 너무 슬프고 웃기면서 재미있는 영상을 봤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그 감동을 나누고 싶어서 퍼왔습니다. 한 4분 정도 되는 영상인데, 여러분도 저와 같은 마음인지 함께 영상을 잠시 보실까요?(영상 1)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눈물이 조금 났습니까? 아니면.... 저 녀석 왜 저래... 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저 날, 토크쇼의 전체 주제가 ‘동행’이었고, 그 의미에 대해서 관객들이 이야기하는 시간에 한 어머니가 손을 든 것이었습니다. 경북의 작은 도시에 살면서 서울에, 그것도 방송에 나온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아들이 도와줘서 방청을 하게 되고,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는 사실에 울컥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잠시나마 기쁘게 해드렸다는 사실과 그 정도 여유도 없이 사는 부모님의 삶에 대하여 통곡하는 아들... 이 가족의 사연이 너무 보기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같이 눈물 흘리고 또 같이 웃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연이 방송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뉴스에서는 이런 보도가 나왔습니다. 46세의 가장인 김모씨가 줄에 매달려서 아파트 외벽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사진1), 그 아파트에 살고 있던 또 다른 40대 서모씨가 그 줄을 잘라버렸다는 것입니다. 김모씨는 고등학교 2학년에서 27개월 자녀까지 다섯 자녀의 아버지이고, 노모를 모신 아들이고, 좋은 남편이었는데, 너무 어처구니없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일곱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서 일당이 높은 일을 찾다보니 아파트 외벽 청소 일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범인인 서씨에게 왜 그런 잔인한 일을 했냐고 물었습니다. 시끄러워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아파트 외벽 일을 하는 김씨는 높은 곳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을 했는데, 취직도 안되고 집에서 놀면서 기분이 안좋았던 서씨는 그날따라 음악이 너무 시끄럽게 들리더라는 겁니다. 옥상으로 올라가서 자기 집 앞 벽에서 작업을 하던 김씨가 매달려 있던 줄을 잘라버렸습니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이 울부짖는 모습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끔찍한 사건이 몇 개 더 있었습니다. 제게 가장 충격이 되었던 사건은 1소위 ‘동춘동 초등학생 유괴 살인 사건’입니다. 범인은 만 16세와 만 18세의 소녀들입니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2달 전에 만났습니다. 어린 아이를 유괴하고 살인하자는 의논을 합니다. 만 16세의 김모양이 같은 동네의 만 8세의 여자 아이를 유괴해서 죽이고 시신의 일부를 만 18세의 박모양에게 전달했습니다. 살인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짜증’이었습니다. 이전에도 김모양은 칼로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 있었는데... 왜 그러냐는 질문에 “짜증이나는데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으니까 자신을 해친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기 보다 약하고 어린 8세된 소녀를 해쳤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 40대 남성이 자신의 집에 인터넷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그것을 고치로 온 수리 기사를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수리 기사는 통신 회사를 다니다가 명예퇴직을 한 다음, 노모를 모시고 살기 위해서 통신 기사로 일하던 성실한 가장이었습니다. 한 대학원생은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지도교수의 방에 사제 폭발물을 만들어서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교수는 크게 부상을 당했습니다.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류대학을 다닌 청년의 삶이 한 순간 무너졌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분노 조절 실패’입니다. 스트레스가 너무 많은 겁니다. 너무 화가 나서 지금 내가 하는 행동, 말,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겁니다. 그 결과는 파괴적이고 무섭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시대, 초대교회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1. 분노 중독 - 초대교회의 고민 한 개인이 그 능력이나 선택으로 극복할 수 없는 억압과 폭력을 경험할 때 무력감에 빠지게 되고 분노가 자기 안에 쌓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 민족의 일제시대와 6.25 전쟁이 그랬습니다. 그 시대에 태어나고 자랐던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살아가던 1970년대를 전후로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가정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가장들은 늘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오고 자고 있는 가족들을 깨워서 폭력을 행사하고... 그 시대에는 가장의 가족들에 대한 폭력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폭력 속에서 성장한 개인들이 가장이 되고 사장이 되고 한 조직을 이끌어가게 되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던 폭력의 흔적들이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폭력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이미 수백 년 동안 식민지 백성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땅에 앗수르가, 바벨론이, 페르시아가, 로마가 들어와서 말발굽 자국을 그들의 자존심에 남기고, 칼과 창자국을 그들의 양심에 남겼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바리새인의 이름으로, 제사장의 이름으로, 혹은 세리 등의 중간 관료가 되어 이스라엘 민중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분노가 많고 스트레스가 많고 그리고 좌절이 일상화되고 있었습니다. 쉽게 감정이 0에서 10으로 끓어오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던 때를 보십시오. 군중들은 ‘호산나! 왕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며 예수님을 반겼습니다. 그러나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고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들은 죄인이라고 판단하면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사실은 그 죄가 무슨 죄인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죄를 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돌로 쳐서 죽이고 싶은 그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선동하기만 하면... 스데반도 죽일 수 있었고, 바울도 죽일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초대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있는데 사람들이 변하지를 않습니다. 그들 내면에 있는 상처와 고통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자주 다툽니다. 극단적으로 대립합니다. 서로 쉽게, 작은 이유로 비난하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교회가 되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정죄하고 판단하고 분노하고 좌절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늘 시끄러웠습니다. 2. 죄 없는 자가 돌을 들라! 초대교회를 영적으로 지도하던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왜 복음을 받아들였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고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다투고 대립할까? 고민하던 그들은 공통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사실 자신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심지어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데도 싸웠습니다. 서로 비난하고 미워하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으로 다독거리십니다. 낮은 마음으로 서로를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한 여인을 붙잡아 왔습니다.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돌로 치려고 합니다. 사실 돌을 들고 있는 그들은 이 여인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어떻게 잡혔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들이 돌을 드니까.... 내가 돌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If any one of you is without sin, let him be the first to throw a stone at her.") 예수님은 그들의 불타오르는 분노에 물을 부으셨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고, 둘째는 너희도 다른 상황에서 저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를 정죄하면 아이를 품으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과 거지를 정죄하면 그들을 품으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정죄하면 그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며 그를 품으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 수많은 군중들이 갈 곳 없이 방황할 때,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먹이셨습니다. 3. 같은 마음, 같은 눈물 그래서 사도들은 목회를 하면서 문제를 만날 때, 교회가 서로를 정죄하며 원망하며 다툴 때 그들은 같은 기억을 떠올립니다. 사도 베드로가,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의 곳곳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먼저 오늘 본문을 보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Finally, all of you, live in harmony with one another; be sympathetic, love as brothers, be compassionate and humble. Do not repay evil with evil or insult with insult, but with blessing, because to this you were called so that you may inherit a blessing.) 베드로 사도는 그들이 회복해야 할 한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만날 때, 그 문제가 나의 감정과 행동을 지배한다고 느낄 때.... 한 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낮은 마음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며 복을 비는 마음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4-16/Bless those who persecute you; bless and do not curse. 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mourn with those who mourn.Live in harmony with one another. Do not be proud, but be willing to associate with people of low position. Do not be conceited.) 여러분, 그런데 바울이 지금 권면하고 있는 이 마음, 이 눈물은 누구의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4/Do everything without complaining or arguing,)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무엇일까요? 2장 5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Let this mind be in you,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눈물, 예수님의 선택...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든 문제가 갈등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교회에 있는 다툼의 이유를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약 4:1/What causes fights and quarrels among you?)라고 질문하고 답을 하기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 4:8-9/Come near to God and he will come near to you. Wash your hands, you sinners, and purify your hearts, you double-minded. Grieve, mourn and wail. Change your laughter to mourning and your joy to gloom.)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성결한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이웃의 연약함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교회의 다툼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1 3:15-16/Anyone who hates his brother is a murderer, and you know that no murderer has eternal life in him. This is how we know what love is: Jesus Christ laid down his life for us. And we ought to lay down our lives for our brothers.)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 사도들을 통해서 주시는 공통의 권면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낮은 곳에서 섬기고 헌신해야 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눈물을 흘려야...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교회입니다.
4. 교회 - 한 마음으로 울고 웃다. 제가 미국에 와서 이민교회를 섬긴 지가 이제 20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교회를 섬기던 것과 비교하면... 딱히 대단히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스트레스 레벨이 좀 높습니다. 실은 이것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민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이민자로 사는 삶이 쉽지 않은 이유일 겁니다. 기본적인 스트레스를 깔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쉽게 깨집니다. 형제들인데 다시는 안볼 것처럼 다투기도 하고, 목숨 걸고 사랑했던 부부가 갈라서기도 하고, 이번 주까지 은혜와 사랑이 넘쳤던 교회가 다음 주에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하기도 합니다. 좀 더 많이 정죄하고 판단하고 갈라서고 나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분노하는 대상에 잘못이 없다거나 분노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에 분명 잘못이 있을 수 있고, 나의 분노는 일정부분 정당하고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분노가 나를 지배할 때입니다. 그 분노가 나의 판단과 선택을 결정할 때입니다. 분노가 말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때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할 때 보여드린 영상을 기억하십니까? 부모를 사랑하는 한 청소년의 따뜻한 마음에 모든 청중들이 함께 웃었고, 그리고 눈가가 촉촉해졌고, 마음까지 촉촉해지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서로 전달되고 본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내 눈가에 눈물 또한 그렇습니다. 반대로 날카롭게 날선 내 마음도 그러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손가락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울어도 함께 눈물 흘리지 않는 세대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함께 울고 웃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눈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세상의 마음으로 만나서 예수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공동체입니다. 그 마음으로 서로를 만나고 섬기고 헌신하는 공동체입니다. 좋은 교회, 좋은 성도가 되고 싶으십니까? 내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과 가까이 하면 됩니다. 그 마음으로 내가 먼저 섬기고 헌신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함께 예배하고 섬기는 초대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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