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 - 2. 각질 (角質) | na kim | 2017-07-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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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2. * 본 문 : 에베소서 4장 31-32절 말씀 * 제 목 : 우리 교회 - 2. 각질(角質) 얼마 전에 제가 만났던 한 형제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두 살 차이...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나이고, 실제로 서로를 꽤 아끼고 사랑하는 형제입니다. 어릴 적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부모의 폭력과 이혼을 경험했고,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자라면서 다시 폭력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15년 전, 20세가 된 형은 도망을 치듯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이를 악물고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혔습니다. 여전히 어렵게 살고 있는 동생 생각이 났습니다. 미국으로 초청했습니다. 공항에서 만난 형제는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형은 동생을 미국으로 오게 해서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동생을 데리고 그동안 자신도 해보지 못했던 여행을 떠났습니다. 넓고 안정된 미국이라는 세상을 보여주고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보자고 권하고 싶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형의 사업과 관련한 지역들을 포함해서 3주 정도 여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이 주먹다짐까지 하면서 크게 싸웠습니다. 평소에 저와 안면이 있었던 형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왜....?” 저와 형제가 함께 던졌던 질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형제입니다. 지난 15년 간 서로를 그리워하며 걱정했던 형제였습니다.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고 또 울었던 형제입니다. 그들은 왜 주먹다짐까지 하면서 싸워야 했을까요? 형과 동생은 서로 너무 달라져 있었습니다. 아직은 세상을 모를 나이 20세, 이를 악물고 살아남겠노라고 미국을 선택했던 형... 정말 그동안 안 해 본 일 없이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좌우를 돌아볼 수 없었고, 자신을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이겨먹기 위해서 더 단단해지고 더 날카로워져야 했습니다. 이제 좀 숨을 쉴 만 하고, 주변을 챙길 만 할 때... 형은 비로소 동생을 떠올렸습니다. 동생 또한 유일하게 의지하던 형이 미국으로 떠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오고 가면서 상처만 켜켜이 쌓였습니다. 서른을 넘긴 나이인데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이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눈빛이나 표정에서 삶에 지치고 자신에게 실망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의욕 대신 분노만 남았고, 미래에 때한 소망 없이 과거에 대한 원망만 남았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 반갑게 서로 만났지만.... 곧 서로의 삶 속에 너무 오랫동안 쌓이고 굳어진 상처와 분노를 함께 만났습니다. 형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꼭 빼닮은, 방향 없이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는 동생을 꾸짖었고, 동생은 자신을 이해해주기보다 세상이 했던 방식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형에게 분노했습니다. 쌓이고 묵었던 딱딱하고 거친 인격들이 맞붙었습니다. 돌아서서 후회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1. 두 얼굴의 에베소 교회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는 에베소 교회는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 교회로부터 온 소식을 듣습니다. 먼저 교회를 칭찬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엡 1:15-16/For this reason, ever since I heard about your faith in the Lord Jesus and your love for all the saints, I have not stopped giving thanks for you, remembering you in my prayers.)라고 칭찬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에 본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지난 주에 나누었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복음으로 다가온 예수를 믿지만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 못합니다. 새롭게 받아들인 신앙에 과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의 말씀을 봅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아직 벗어나지 못한, 벗어버리지 못한 옛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고 주장하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현상을 설명하기를 2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는 행위’(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엡 4:27)라고 했습니다. 누가 말입니까? 예수 믿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말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와 교회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말입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의 두 얼굴이요, 우리들의 부끄러운 두 얼굴입니다.
2. ‘각질’(角質) 어릴 적 아버지의 발을 보고 만진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시절에 구두가 좋지 못해서였겠지요. 발뒤꿈치에 하얗게 각질있었습니다. 여기저기 갈라져서 피가 나기도 했습니다. 참 아파보였고, 안좋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 발에도 각질이 생깁니다. 발을 많이 노출시키는 여름에는 좀 덜하고 발이 숨을 못쉬는 겨울에는 좀 심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각질을 제거하는 기계를 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발에 각질이 생기는 것은... 뭐 어떻습니까? 잘 닦고 제거하고 관리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그 각질이 마음에 생긴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마음이 딱딱해진다면, 마음에 각이 지고, 날카로워지고, 때로는 마음이 갈라져서 피가 나기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이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13장3-9절의 마음밭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몇 개의 마음의 밭을 예로 들고 있을까요? 네 개입니다. 가시밭과 돌밭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옥토도 있습니다. 그리고 길가 밭이 있습니다. 길가 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듣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새들이 와서 천국 말씀의 씨를 먹어버립니다.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왜 천국 말씀의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할까요? 유대인들은 예수님 시대에 직파농법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부가 바구니에 씨를 담아서 밭에 직접 뿌린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길 가’란 길의 가장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밭에서 농부가 다니는 좁은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밭을 걷고 또 걸으면서 농부는 씨를 뿌리고 밭을 관리합니다. 그 길은 잘 준비된 옥토일까요? 아주 딱딱하고 굳은 땅일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길에 씨를 뿌리지는 않습니다. 씨를 뿌리려면 밭을 갈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은 땅에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와 사랑이 넘친다고 해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말씀이 겉돕니다. 새들이 와서.... 세상 사람들의 논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먹혀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 ‘마음의 각질’과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길 가 밭’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딱딱하게 굳어서 복음을 받지 못하는 것이고,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고, 밟히고 또 밟혀서 수많은 상처와 고통이 겹겹이 쌓였다는 것이고, 그래서 원망과 분노의 각질이 굳었다는 것이고, 때로 갈라져서 피가 나고 스스로에게 고통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마음에도 각질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봅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 4:31/Get rid of all bitterness, rage and anger, brawling and slander, along with every form of malice)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에베소 교회, 목숨을 걸고 복음을 받았던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었던 마음의 각질.... 예수 믿는 성도와 교회인 우리들에게는 없습니까? 딱딱하게 상처와 원망으로, 분노와 절망으로 굳어진 마음.... 없습니까? 아...이럴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 전부가 각질로 뒤덮여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속습니다. 자신의 부드러운 마음만 매만집니다. 각질을 인지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니까... 변화되지 않습니다. 고민하셔야 합니다. 내 마음에 각질로 굳은 작은 spot들이 흩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때로 은혜가 아닌 분노로, 사랑이 아닌 원망으로, 복음이 아닌 세상으로 불쑥불쑥...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고통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하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와 성도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 길은 에베소 교회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32절을 봅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Be kind and compassionate to one another, forgiving each other, just as in Christ God forgave you.) 성도와 교회가 세상이 준 상처와 분노와 적대로 서로를 대하지 말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성도와 교회의 관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이어서 5장 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Be imitators of God, therefore, as dearly loved children and live a life of love, just as Christ loved us and gave himself up for us as a fragrant offering and sacrifice to God.) 요약하면... 하나님을 본받아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까지 사랑할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스스로 제물이 되셨던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이 우리가 서로에 대해 해야 할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제물로 만드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의 거룩과 성장과 평안을 위해 제물이 되는... 희생을 하는.... 헌신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일에 삼위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4장 30절에서 우리가 각진 마음으로 만나면 성령이 근심하신다고 했습니다. 32절에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5장 1절에서는 다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5장 2절에서는 성자 예수님의 사랑이 표현됩니다. 우리를... 바로 나를.... 세상의 사람, 각지고 날카로운 사람,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섬기고 헌신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4.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성도 제가 설교의 서두에 소개했던 형제에게 참 다행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형님도 동생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삶의 상황 속에서도 예배하고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고 돌아설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도 있습니다. 믿음이 있고, 복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과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기가 찾아왔을 때, 감정의 격동이 찾아왔을 때... 중요하고 어려운 결정을 할 때 자기 안에 있는 믿음과 복음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15년 만에 눈물로 만나서 주먹으로 사랑을 확인한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 아닐까요? 혹시 여러분 중에서 “그 형제들이 잘못된 믿음, 거짓복음을 가진 것 아닌가요?”라고 질문하실 분이 있습니까? 저는 그 분들에게 있는 믿음과 복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복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입니다. 그 믿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As a prisoner for the Lord, then, I urge you to live a life worthy of the calling you have received. Be completely humble and gentle; be patient, bearing with one another in love. Make every effort to keep the unity of the Spirit through the bond of peace.)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믿음과 복음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옛사람의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드러운 마음과 따뜻한 사랑으로 서로 만나지 못하고, 각진 마음으로 서로를 거칠게 대하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으로 사랑하면서 서로를 용납하고 평안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비로소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가 교회에 충만하게 됩니다. 2000년 전 에베소 교회의 모습과 제가 만난 형제들의 모습 속에서 오히려 저는 거울과 같이 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마음의 모든 각질이 벗겨지고 사랑과 은혜로 잘 준비된 모습으로 여러분을 만나고 허락하신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또한 복음에 합당한 교회와 성도가 되어서 세상이 아닌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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