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 - 3. 이런 사람! | na kim | 2017-07-09 | |||
|
|||||
2017. 7. 9. * 본 문 : 베드로후서 3장 11-18절 말씀 * 제 목 : 우리 교회 - 3. 이런 사람! 한국에서 전도사로 사역할 때 아끼고 사랑했던 한 청년이 있습니다. ‘상조’라는, 제가 처음 만날 때 고3이었고, 이후에 가까이에 있는 대학에 들어간 청년이었습니다. 심성이 착하고 정직했고, 신앙도 좋았고, 찬양도 잘했습니다. 리더쉽도 있어서 고등부와 대학부에서는 회장을 했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한국 교회를 휩쓸었던 바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시한부 종말론이었습니다. ‘다미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서 활동했고, 1998년 10월 28일 오전 10시에 주님의 재림을 예언하고 늘 모여서 기도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허무맹랑한 논리여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상조 또한 그 선교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상조를 만났습니다. 쉽게 데리고 나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상조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미 선교회의 논리가 허술하다는 것을 잘 알겠다는 겁니다. 자신도 혹시 1992년 10월 28일에 주님이 재림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들 속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상조는 함께 기도 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자신이 생각할 때 성경적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을 기다리면서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직장과 학교와 집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다시 모여서 전도하고.... 모두가 겸손하고 착하고 섬기고 헌신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있다고 하면서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는 많은 기독교인들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나아보인다고 했습니다. 종말론자들이 주장하던 때가 지나고 난 다음 다시 상조를 만났습니다. 이제 돌아오겠냐고 했습니다. 상조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습니다. 여전히 같은 사람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언젠가는 오실 것이고, 준비하면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꼭 그런 방식으로 할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했더니... 자신은 그게 좋다고 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상조가 기억났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초대교회 성도들과 교회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믿음은 있었지만 지식은 부족했고, 소원은 있었지만 삶의 변화가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 역사의 종말을 기대했지만 그들 자신이 어떻게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직 구원의 때만 기다렸습니다. 혹시 구원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현실을 외면한데 대한 불안함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은 부족했고, 계속되는 핍박과 고난이 있었고, 성도들은 두려움과 불안함에 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종말을 기다리는 바른 신앙적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에 대한 기장 기본적인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그 어떠한 종말에 대한 논의도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첫째 주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다는 것(행 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Acts 1:11 "Men of Galilee," they said, "why do you stand here looking into the sky? This same Jesus, who has been taken from you into heaven, will come back in the same way you have seen him go into heaven.")과 둘째, 종말의 시기를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Matt 25:13 "Therefore keep watch, because you do not know the day or the hour.)과 셋째, 종말이 언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매 순간 주의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막 13:35~37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Mark 13:35-37 "Therefore keep watch because you do not know when the owner of the house will come back--whether in the evening, or at midnight, or when the rooster crows, or at dawn. If he comes suddenly, do not let him find you sleeping. What I say to you, I say to everyone: 'Watch!' )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에 다른 이야기를 섞는다든지... 예를 들어 이미 예수님은 우리 곁에 재림주로 오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알 수 없지만 시기는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든지,,, 그래서 성경에 나온 숫자들을 정리하고 자신이 받은 계시를 더해서 주님 재림의 날을 계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날마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것만 한다든지.... 받은 달란트를 묻어두고 그저 두려움과 불안으로 모든 일을 포기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잘못된 종말론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마지막 날에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2. 평강의 사람(12-14절) 왜곡된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진 영적인 정서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반복해서 말씀드린 ‘두려움과 불안함’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삶이 평탄하고 고난과 박해가 없을 때 우리는 쉽게 불안해집니다. 혹은 두렵습니다. 불안함이란 스스로가 잘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 오는 것이고, 두려움이란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느낄 때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혹시 종말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에서 자유로우신지요? 종교학자들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없고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적 환경 속에 살아가는 미국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면서 집단 혹은 은둔 생활을 하는 단체가 최소한 1200개는 넘는다고 말합니다. 때로 이런 단체들이 집단 자살이나 타살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내면에 있는 신앙이 밖으로 드러나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동력은 그들 안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반면 사회적인 박탈감과 핍박에 의해 분노와 증오를 동력으로 하는 성도와 교회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극단적 시온주의자들이 그랬고, 일제시대 한국 교회의 일부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음 달에 단기 선교로 섬기기를 원하는 많은 인디언 교회도 그렇습니다. 인디언 원주민 교회들은 그 교회가 속한 교단이 어디건 대부분 신학적 세대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세대주의란 인류의 시간을 일곱 세대로 나누고 각 세대에 하나님의 뜻과 교회의 사명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입니다. 세대주의가 종말론을 만나면 ‘천년왕국’(The Millennium Kingdom)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신 것 같이(창 2:2), 노동과 수고의 6천년이 지난 뒤, 안식의 1천년이 온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이 임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극단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나면서 종교개혁 세력에 의해 오히려 핍박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신앙이 있다면 다시 세례를 받고 새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핍박을 피해서 미국 펜실바니아로 건너옵니다. 아미쉬 마을을 건설했습니다. 자신들의 신학적인 입장과 신앙을 연극으로 만들어서 공연합니다. 그 공연을 하는 극장 이름이 뭘까요? 예, 바로 Millenium Theater입니다. 그 극장에서 공연하는 모든 뮤지컬의 마지막에는 천년왕국이 등장하고 적그리스도를 물리치는 왕으로서의 재림 예수가 등장합니다. 그들의 역사관입니. 인디언 교회들 또한 미국 사회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가슴에 품고 주님이 재림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 왜곡된 역사를 뒤집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주님이 오셔서 그들의 모든 억울하고 분한 역사를 바로잡아주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보십시오. 11절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고 물었던 베드로는 12-14절에서 결국 ‘평강’에 대해 말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심리적, 정서적인 동력들을 가지고는 평강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평강으로 이 땅에서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 분노와 증오를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성도와 교회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1 Peter 3:14 make every effort to be found spotless, blameless and at peace with him)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과 삶을 지킬 수 있을까요? 두려워서가 아니라 불안해서가 아니라, 나의 억울함과 분함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와 무한하신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주님 오시는 날을 사모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평강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3. 인내하는 사람 종말을 사모하는 성도의 두 번째 덕목은 인내입니다. 구약에도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음에서 멀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모세 시대에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모세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자 불안해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눈에 보이는 모세를 통해 위로와 인도하심을 받았는데, 이제 모세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호렙산으로 올라가서 머무르지 그들 안에 있는 불안과 염려가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만들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하나님라고 선언합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종말을 선언하셨고, 때와 시기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하셨으며, 교회와 성도의 의무는 매순간 깨어 있어서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궁금합니다. 불안합니다. 두렵습니다. 그래서 자꾸 때를 말하고 시간을 말합니다. 마음 속에 들끓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서 무엇인자 자신이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내도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나바호 인디언 교회와 교류하면서 한편으로 그들의 고통과 눈물을 이해하고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만 저는 그들의 역사적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들의 인내 없는 신앙, 변화 없는 삶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건강한 신학으로 이 부분에서 인디언 교회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예수를 닮은 사람 마지막 세 번째 성경에 말하는 종말을 준비하는 성도의 모습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17절에서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말라고 권면하고, 18절에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1 Peter 3:18 grow in the grace and knowledge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을 줄이면 ‘세상을 닮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닮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 - 이런 사람이 종말에 가장 적합한 삶을 사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시는 장면을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양과 염소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뉩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하나님이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습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님처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것처럼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마시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가난과 불행을 정죄하거나 비웃지 않고 함께 눈물 흘리며 자신을 나누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종말에 합당한 사람은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가장 좋은 준비는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교회는 종말론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집단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거짓되고 헛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예수는 믿는데 마치 종말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모든 기도의 소원과 흘리는 땀이 이 땅에서의 번영과 안식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의 믿음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서 잘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실 우리는 굳이 믿음이 없어도 됩니다. 굳이 소망이 없어도 됩니다. 굳이 정의롭지 않아도 되고, 굳이 섬김과 나눔이 없어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올라가신 그대로 내려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았던 삶에 대하여, 우리의 준비에 대하여, 우리의 믿음과 소망에 대하여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잘 준비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다시 만나기에 합당한 삶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평강의 사람, 인내의 사람, 그리고 예수를 닮은 사람 -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성도가 이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번 따라하고 말씀을 마칩시다. 모두 이런 성도, 이런 사람들의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