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 4. 내 안에 있는 것 | na kim | 2017-07-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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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16. * 본 문 : 열왕기상 3장 28절 말씀 * 제 목 : 우리 교회 - 4. 내 안에 있는 것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을 아실 겁니다. 그는 성공회의 목회자였고, ‘상처입은 치료자’라는 좋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현대 사회를 ‘인간의 발작과 고통의 시대’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묻기를 어떻게 하면 이런 시대를 살면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보편적으로 인류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각 시대에 다가오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내적인 길’, 즉 개인적이고 영적인 길입니다. 각 나라와 문화마다 명상, 정신 수양, 요가, 철학 등의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는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복잡하고 해석 불가능한 현실 세계를 이길 수 있는 내면의 성장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비슷한 접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개인의 영성을 강조하고 개인의 구원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현실과 변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의 영성에 집중합니다. 세상에 복잡할수록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묵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두 번째 방법을 그는 ‘혁명적인 길’이라고 부릅니다. 이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세계 질서를 부정합니다. 이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인간의 고통이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초월적인 자아나 존재에 대한 기대보다는 뚜렷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목표와 적극적인 참여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들 앞에 놓인 모든 사회제도는 점검과 변화의 대상이며, 그 속에 기득권을 누리는 모든 사람들 또한 변화의 대상입니다. 나우웬은 이 두 가지 길에 대한 문제와 한계를 지적합니다. 내면에 집중하는 길은 인간의 제도가 가진 폭력과 악함을 외면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문제로 그 원인을 돌립니다. 그들을 구원하고 복주는 하나님은 중요한데,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실만큼 사랑하시는 이웃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혁명적인 길 또한 사회 제도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그 제도 속에 있는 인간의 개인적인 고통에 대한 관심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웃에 관심이 있으시지만 나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의 내면의 성장과 자유는 사회 제도의 변화와 성장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혁명적인 길에 집중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절대화하면서 그 속에 자신의 문제로 고통당하는 개인의 연약함을 보지 못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나우웬은 이 두 가지 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해 21세기 교회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핵시대에 살면서 풍요한 물질과 황폐한 도덕성 가운데 헤매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는 과연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까요? 1. 세상 앞에 서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솔로몬 왕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상황은 좀 복잡합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3대 왕입니다. 이스라엘에서 1대 왕인 사울에서 2대 왕 다윗에게까지는 왕위가 세습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택하시고 기름부으셨습니다. 다윗 이후에 누가 왕이 될 것인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사였습니다. 하나님이 또 다른 사람을 기름 부으실 것인가? 아니면 다윗의 아들 중에서 왕이 될 것인가? 솔로몬은 그런 상황 속에서 왕이 됩니다. 아시는 것처럼 그의 어머니는 다윗에게 억울하게 죽임당한 부하 장수 우리야의 안 밧세바입니다. 그에게는 보다 나은 조건의 많은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배다른 형제 압살롬은 이미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형인 아도니야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선언한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큰 위협을 가했던 대장군 요합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비아달 또한 솔로몬의 편은 아닙니다. 백성들은 아직 어리고 검증되지 않은 왕 솔로몬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왕의 권력의 그늘에 있다가 이제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왕의 권력을 자기화하기 위해 솔로몬을 흔들 것입니다. 공격할 것입니다. 왕의 권력을 빼앗으려 할 것입니다. 비난하고 외면할 것입니다. 세상 앞에 선 솔로몬, 그가 대답해야 합니다. 자신이 왜 이스라엘의 왕인지, 어떤 왕이 될 것인지... 2. 두 가지 시험 성경은 솔로몬이 세상에 섰을 때 그에게 던져진 두 가지 문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 중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다른 하나는 백성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솔로몬은 정답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첫 번째 문제 - 하나님으로부터 /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냐?” 왕상 3:4-15에서 하나님은 왕이 된 솔로몬에게 문제를 던집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1Kings 3:5 At Gibeon the LORD appeared to Solomon during the night in a dream, and God said, "Ask for whatever you want me to give you.") 하나님은 지금 어린 왕 솔로몬에게 소원을 묻고 있습니다. 지금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나이 어린 왕, 정적들로 둘러싸인 왕, 첫 세습의 실험이 아직 성공으로 증명되지 않은 왕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우리들 모두가 아는 대로 정말 지혜로운 대답을 합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1 Kings 3:9 So give your servant a discerning heart to govern your people and to distinguish between right and wrong. For who is able to govern this great people of yours?") 그는 먼저 자신을 어린 아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부족함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가 원한 것은 권력이나 재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듣는 마음’(a discerning heart/NIV)입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이것을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KJV에서는 ‘an understanding heart’로 번역했습니다. 단순한 ‘지식이나 지혜’를 원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을 듣고 이해하는 마음을 원한 것입니다. 그는 이 마음으로 백성들을 재판하고 선악을 분별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바로 이런 왕이었습니다. 10절에 보면 그의 이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칭찬하시고 그가 구하지 않은 모든 것을 함께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2) 두 번째 문제 - 백성들로부터 / “당신이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3장에서는 솔로몬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손가락질 받는 삶을 살던 두 여인이 왕에게 찾아옵니다. 한 아기를 서로 자기 아기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이미 죽은 한 아기는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솔로몬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지혜를 발휘합니다. 아기의 생모가 밝혀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어리고 경험 없는 왕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인생에 다가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방법,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가치관이 드러나는 순간이며, 내가 가진 무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순간입니다. 솔로몬은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과 정적들이 주목하고 있는 이 순간...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었던 ‘분별하는 지혜(discerning wisdom)’을 사용합니다.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과 정적들이 놀랍니다. 성경은 이 판결의 결과를 오늘 본문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왕상 3:28/1King 3:28 And all Israel heard of the judgment which the king had judged; and they feared the king: for they saw that the wisdom of God was in him, to do judgment.) 3.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성경은 두 가지 시험의 결과를 주목합니다. 그 결과는 백성들의 어린 왕 솔로몬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공포스럽거나(frightening) 위협적인(threatening)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백성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존경(respectful)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다윗의 솔로몬에 대한 왕위 세습을 받아들 수 있습니다. 솔로몬을 그들의 왕으로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아직 어리고 경험없는 왕에게서 존경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백성들과 신하들과 정적들이 솔로몬에게 느꼈던 두려움의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그들은 솔로몬의 판결에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본문을 다시 보실까요?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왕상 3:28/1King 3:28 And all Israel heard of the judgment which the king had judged; and they feared the king: for they saw that the wisdom of God was in him, to do judgment.)
그들이 본 것은 무엇입니까? 어린 왕 솔로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이 만난 것은 무엇입니까? 경험없는 솔로몬이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이 어리고 약한 왕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위엄을 어린 왕에게서 느낍니다. 4. 발작과 고통의 시대에 서다. 헨리 나우웬은 현대 사회가 21세기의 교회에 대해 던진 질문이 있고, 교회는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풍요한 물질과 황폐한 심령 가운데 헤매는 현대인들에게 교회가 가진 것은 무엇이며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끄럽게도 오늘날 사회는 더 이상 교회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나는 예수 안믿는 사람, 저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 발작과 고통의 시대에 교회는 세상에 대해 무엇을 보여줘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세상 앞에 섰던 솔로몬은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섬길 왕으로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무엇으로 그 나라를 섬겨야 하는지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부(富)도, 권력도, 군사력도,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했고, 백성들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원했습니다. 그 지혜로 백성들이 자신에게 던진 시험에 도전했습니다. 어린 왕의 어리석음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를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세상이 교회를 통해서 보고 싶은 것, 교회가 세상에 대해 보여줘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인류의 역사가 추구해온 인간의 문제에 대한 두 가지 길을 소개했습니다. 내면의 길이 있고, 혁명적인 길이 있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사람의 문제에 답을 주지 못했고, 완전히 해결하지도 못했습니다. 나우웬은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답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과 사회를 변혁하는 것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십자가가 종화 횡의 두 개의 나무로 만드는 것처럼 사람의 영적인 변화와 사회의 변혁은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신 예수님은 내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교회와 성도는 내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 또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두 길이 교차되는 지점에 자신의 생명을 걸어두셨습니다. 자신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발작과 고통이 일반화된 시대에 교회가 세상에 대해 줄 수 있는 대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도와 교회가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가? 성도와 교회가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는가? 성도와 교회가 세상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가? 예! 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이 세상 앞에 선 것처럼...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도 세상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세상이 물을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으로 승부할 것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가진 가장 큰 가치와 무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학문도, 지식도, 부와 명예도... 모두 세상에 패배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영원히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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