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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 6. 사람의 복음 na kim 201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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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2/5301916

 

* 본 문 : 누가복음 1511-32절 말씀

* 제 목 : 우리 교회 - 5. 사람의 복음

 

한국에서 한참 국정 교과서가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기술하고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특히 역사관이 다른 다양한 교과서를 인정할 것인지, 정권이 정한 한 관점으로 기술한 교과서를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습니다. 한번은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그 문제에 대한 활발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한 패널이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각각 다른 관점으로 사복음서를 기록했는데, 왜 국가가 단 하나의 관점만으로 역사를 평가하려고 하는가? 라는 말을 했습니다. 반농담처럼 말했기 때문에 다들 웃었지만 의미가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 패널은 성경에 대한 꽤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사복음서는 그가 말한 대로 예수님에 대한 각각 다른 관점으로 기술한 성경들입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마태복음은 다윗의 계보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이자 만왕의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핵심구절은 1616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Simon Peter answered,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교와 그 나라의 능력이 교차되어 기술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마태복음에서만 32회 등장하는 이유는 당연히 예수님께서 그 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흔히 ()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 10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가장 간략하게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서 기술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역을 중심으로 기술됩니다. 핵심구절은 너무 잘 알고계신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1. 누가복음의 차이

 

그리고 오늘 여러분과 저는 누가복음에 대해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혹시 이번 주에 성경을 읽으시면서 각 복음서의 차이를 느끼셨습니까?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전후편에 해당되는 성경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복음이 무엇이며 교회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누가는 먼저 누가복음을 썼고, 다음으로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복음의 시작과 교회의 시작을 두 성경을 통해 설명한 것입니다.

 

(1:3-4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Therefore, since I myself have carefully investigated everything from the beginning, it seemed good also to me to write an orderly account for you, most excellent Theophilus, so that you may know the certainty of the things you have been taught. Luke 1:3-4)

 

(1:1-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In my former book, Theophilus, I wrote about all that Jesus began to do and to teach until the day he was taken up to heaven, after giving instructions through the Holy Spirit to the apostles he had chosen. Acts 1:1-2)

 

두 성경의 수신자인 데오빌로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다만 누가가 그를 부를 때 데오빌로 각하’(most excellent Theophilus)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그는 로마의 고위 관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신약 성경의 28%나 차지하는 두개의 긴 편지가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오늘날 그에게 기록된 성경이 우리들 모두에게 읽히는 현실은 그런 우려를 불식합니다.

 

2. 누가복음의 관심 - 사람

 

그렇다면 이 성경은 다른 복음서들과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까요? 사복음서에는 32개의 예수님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비유가 많이 등장하구요, 마가복음에는 4, 요한복음에는 하나만 등장합니다. 물론 겹치는 비유도 있습니다. 비유를 많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비교해보면 각 성경의 기록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주로 천국을 설명할 때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천국은 마치 .... 과 같으니...”라고 하는 것이 주된 비유의 형식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조금 다릅니다. 누가복음에서의 비유에는 대부분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탕자 비유, 부자와 나사로 비유 등은 모두 누가복음에만 소개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은 마치 ... 과 같으니...”에 등장하는 비유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비유에는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선한 사미리아인, 탕자와 아버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그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어떤 삶을 선택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누가복음의 관심이 사람에게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사용되는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들처럼 먹고 마시며 만나고 헤어지며 떠나고 돌아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라는 우호적인 비기독교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복음으로 살아가야 바로 당신 데오빌로와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누가복음의 많은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데오빌로가 결코 다르지 않은 것처럼, 데오빌로와 우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의 목적은 사람입니다. 복음의 현장에서 주인공의 역할 또한 사람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이 사람이며,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해야 할 주인공들이 사람들이며, 그들이 만나야 할 존재 또한 사람들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데오빌로와 초대교회 성도과 오늘날 우리들을 통해서 비유 속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3. 이런 사람들 - 아들들과 아버지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이 비유는 흔히 탕자비유로 불립니다. 탕자가 주인공일까요? 아버지일까요? 아니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큰 아들일까요?

 

1) 작은 아들

 

먼저 이 비유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한 사람, 작은 아들, 탕자라고 불리는 아들을 봅시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삶이 즐겁지 않습니다. 아들에게는 두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있는 풍요함과 세상에 있는 즐거움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주는 풍요함과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있는 풍요함으로 세상의 즐거움을 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원래부터 잘 맞아떨어지지가 않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이 다 했을 때 그는 다시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돌아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탕자는 다시는 아버지의 집을 나가지 않을까요? 그의 마음에 있는 세상의 기쁨에 대한 소원이 바뀌지 않는 한 그는 다시 나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의 마음에 있는 소원이 그의 삶을 결정합니다. 좀 더 심각한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탕자와 같은 시도를 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세상의 즐거움을 사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의 욕심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시기와 질투로 자기만족과 영광을 구했던 어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기 성취와 만족의 기준이 되고, 교회가 십자가 아닌 다른 가치로 충만할 때.... 소원이 삶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탕자의 소원을 가진 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는 않습니다.

2) 큰 아들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았던 큰 아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아들의 말에 동의가 되십니까? 만일 이 곳이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면, 그들이 부자의 관계, 형제의 관계가 아니라면 그의 말이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아버지의 집이요 그들은 부모형제입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큰 아들의 소원은 아버지의 소원과 일치할까요? 이 큰 아들의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을까요?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늘 고민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자신을 탕자로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있다고 여기신다면.... 우리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 같은 소원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버지와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일까요? 아버지는 지금 큰 아들이 동생에 대해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품어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서로를, 이웃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고민합시다.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집에 있는 탕자에 불과합니다.

3) 아버지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자녀들을 사랑하고 품고 이해하는 분입니다. 작은 아들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돌아온 아들을 책망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아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큰 아들의 불평 또한 이해하고 품습니다. 질문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나를 받으시고 이해하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더 심각한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누가 해야 할까요? 우리들 모두는 큰 아들이거나 작은 아들이라고 합시다. 아버지의 역할은 누가 할까요? “느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알아서 느끼라고 할까요? 우리는 대부분 우리 자신을 탕자나 큰 아들에 적용시켜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이 천국이자 또 오늘날 천국의 모형인 교회라고 할 때... 누군가는 아버지의 역할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성도들을 품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다독거리는 역할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4. 교회, 그런 사람들

이번에 통독을 통해서 탕자 비유를 다시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너무 먼 이야기로 생각했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는 하나님, 우리는 돌아온 아들... 혹은 집에 있는 꼬장을 부리는 큰 아들....? 정도를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이 비유의 함정이 있습니다. 과연 이 비유에서 나는 누구이며 어디 쯤 있는 것일까요?

이 비유가 사람의 이야기이며 교회의 이야기이며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야기이고 내 가족의 이야기이며 내 교회의 이야기이며 내 이웃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 삶에서 늘 발생하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로 생각해 봅시다. 나는 때로 탕자와 같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 무료하고 세상이 주는 기쁨이 더 커 보입니다. 은혜는 바닥을 치고... 교회는 의미 없습니다. 물론 때로 회개하고 때로 눈물 흘리며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언제 말입니까? 세상에서 내 한계가 찾아왔을 때입니다. 다시 아버지의 풍요한 은혜로 충전합니다. 그리고 또.... 나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더 큰 기쁨과 영광을 얻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내 기도의 소원과 믿음의 초점이 세상에서의 영광과 성취에 맞춰져 있습니다.

 

때로 나는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늘 함께 있는데 아버지와 생각이 다릅니다. 이런 사람 많습니다. 마치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있었지만 결국 예수님과 생각이 달라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유다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려두고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과 같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아들입니다. 이것이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사는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시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형제에 대해, 이웃에 대해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점검합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하나님과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 안에서 만나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교회에서, 삶에서 그 역할을 누가 해야 합니까? 품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인내하며 격려하는 역할을 누가 할까요?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작은 예수로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과 저입니다. 탕자와 큰 아들의 모습 속에서 늘 반성하는 모드로 이 비유를 해석하려 하지 말고, 아버지의 이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을 함께 느끼면서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귀한 사명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비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탕자가 되었다가, 큰 아들이 되었다가, 그리고 그들을 품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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