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 9. 사막이라 그렇다. | na kim | 2017-09-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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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3. * 본 문 : 요한계시록 4장 1-2 * 제 목 : 우리교회 - 9. 사막이라 그렇다. 여러분들에게 두 사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같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한 사람은 제가 몇 번 설교에서 소개드린 사람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1966년에 쓴 소설 ‘침묵’과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이 2016년 만든 ‘사일런스’(Silence)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기치지로’라는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는 1600년대 중반 포르투갈의 예수회 신부들이 일본을 선교하기 위해 도전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부들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복음을 전하지만 강력한 핍박을 만납니다. 기치지로는 선교사들에 의해 일찍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심성이 연약한 사람이었고, 고문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에 자백에 의해 많은 신자들과 신부들이 잡혀갑니다. 기치지로도 자신의 연약함을 원망합니다. 그는 풀려나면 신부들을 찾아가고 성도로 변하고 잡혀가면 자백하고 풀려나는 일을 반복합니다. 저는 이 소설을 신학교에 다닐 때 접하고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기치지로에게 있는 신앙, 참된 신앙이 맞는 것일까요? 그런 사람도 자기 안에 있는 신앙으로 다른 사람을 전도할 수 있을까요? 또 한 사람은 제가 아는 한 장로님입니다. 평생 한 교회만 섬겼고, 아주 젊어서 직분을 받아서 거의 30년을 장로로 섬겼습니다. 새벽 4시면 한 시간을 걸어서 새벽기도에 나오고, 철야기도에도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차갑습니다. 웃는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 원칙이 너무 강합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입니다. 주변에 그 장로님으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누구나 그 교회를 생각하면 그 장로님을 먼저 떠올립니다. 다만 웃는 얼굴, 편안한 마음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 아직도...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아주 젊은 교역자 시절에 그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4-5년 정도를 같은 교회를 섬겼는데, 그 장로님을 보면 늘 피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 장로님을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이 있을까? 자, 여러분! 제가 조금 전에 소개한 이 두 사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성도가 가까이에 있다면 친하게 지내시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믿고 싶으십니까? 1. 예수 믿는 사람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들이 뭐 딱히 특별한 사람들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험과 유혹에 연약한 사람이 어디 ‘침묵’의 기치지로 뿐이겠습니까? 좀 솔직해지면.... 우리는 아주 작은 돈의 유혹에도 신앙적인 원칙을 저버립니다. 신앙은 나를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은 나를 복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딱히... 재정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관계에 있어서 손해를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 믿음은 내가 유리할 때까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장로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성격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좀 교양 없고 좀 배려 없고 좀 거칠고 험한 성도들, 참 많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상처받는 말을 잘하는지 어디서 공부하고 오나...싶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모인 교회에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교회에서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삽니다. 여러분, 동의가 되십니까? 우리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서로를 보면서 실망합니다. 때로 비판하고 손가락질하기도 합니다. 특히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연약한 모습들을 보면 더 그렇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 또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의 서신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쉽게 우상에 빠지고, 쉽게 시험과 유혹에 흔들리고, 쉽게 이단의 논리에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같은 세기에 경험했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생생한 간증으로 살아있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도 교회와 성도는 의심하고 다투고 분열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을 향해 의심하고 비난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음의 아름다움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복음과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인정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2. 사막이라 그렇다. 그러다보니 제가 고백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실은 지난 달 나바호 단기 선교를 할 때... 황성기 선교사님에 대해서 좀 화가 나있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당신의 선교를 돕고 배우겠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쳐진 어깨로 힘들다고 말하니까.... 몇 년 전, 자신의 선교에 동참해주기를 요청했을 때의 패기와 단단한 결단은 사라지고, 뭔가 좀.... 느낌이 마치.... 낡고 쳐진 바랜 빨래줄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월요일와 화요일, 도착하고 짐을 풀고 교회 마당에 잡초를 제거하고 캠프 미팅을 준비하고... 분주하게 보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습니다. 수요일 아침 QT를 하기 전에 교회당 앞 길의 흔적을 따라 혼자 산책을 나갔습니다. 어... 그 마른 땅에 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보여드린 꽃들이 그 때 찍은 것들입니다. 좀 부끄럽지만, 시상이 떠올라서... 메모를 남겼습니다. 지난 주에 읽어드린 시가 그것이고, 이번 주에 다시 시 하나를 더 정리했습니다. 오늘은 ‘사막꽃 2’를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하하.. 당분간 시 안 읽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먼저 이 시에 영감을 준 사진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사진 1) 읽습니다. 사막꽃 2 사막이라 그렇다. 파릇한 이파리는 없다. 꽃 한 송이 겨우 만든다. 사막에 살다보니 내가 좀 그렇다. 가시가 있다 누군가 함부로 손을 대거나 배고파 덥석 무는 입이 있다면 가만있지 않는다. 나도 맞서 상처를 남긴다. 이름을 묻지 마라. 꽃 피면 들꽃이요 꽃 없으면 잡초다. 이름 가졌다 한들 모래바람만 뜨겁다. 그러나 나는 이곳, 사막의 꽃이다. 죽음의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향해 웃는다. 검은 밤하늘 별이 되어 생명으로 반짝인다. 사막이 살아있는 이유가 된다. 함께 꽃으로 핀다. 용서하라, 내가 좀 거칠다. 이 사막에서 꽃으로 살다보니 내가 좀 그렇다.
사실 시는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기는 합니다만, 설명을 조금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막에서 핀 꽃이 예쁠까요? 우리 교회 화단에서 피는 장미가 예쁠까요? 당연히 장미가 예쁩니다. 붉은 사막에서 뜨거운 햇볕과 모래바람에 지쳐서 황토색 마른 줄기와 이파리에 겨우 맺혀 있는 사막의 들꽃들이 이곳에서 비옥한 땅에 관리를 받는 꽃들보다 더 예쁠 수 있을까요? 아침에 그곳에 피어있는 꽃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막이니까, 광야니까... 좀 독한 거지요. 가시도 있고, 야위고, 예민하고, 누렇고, 초라한 것이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뭡니까? 꽃이라는 겁니다. 꽃을 피워냈다는 겁니다. 그 뜨겁고 황량한 사막에서도 꽃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마른 땅에 뿌리를 내렸다는 겁니다. 결국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꽃을 피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야 합니다. 3. 세상 속에서 믿음의 꽃을 피우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귀양을 가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왜 섬에 귀양을 갔을까요? 정치인이 아닌데 말입니다. 시대가 그랬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사도들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과 교회들은 더욱 그랬습니다. 로마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고, 로마 제국 외에 지중해 모든 국가들이 식민지가 되는 시대가 수백 년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곡된 삶의 현실 속에서 부서지고 찌그러진 마음과 삶에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서 마음을 펴고 삶을 바로잡고 누가 보아도 당당하고 아름다운 새사람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마음이, 생각이, 삶이 온전하게 잘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썩어져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이 남아 있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따라오지 않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다. 여러분! 그래도 예수를 믿는 것일까요? 그래도 믿음이 있는 것일까요? 안타깝지만, 부끄럽지만.... 예...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비겁했던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마르고 황량한 가슴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이제 연약한 뿌리 하나 둘 내리고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뜨겁게 불타는 광야에서 푸른 잎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화려한 이름 하나 만들지 못하고, 교회당 강단을 장식하는 꽃들도 아니고, 어머니 가슴에 감사의 표시로 꽂아드릴 수 있는 꽃도 아니고... 누가 나를 공격할까 누렇게 변한 줄기와 가시로 무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막에 핀 그런 들꽃도 하나님이 피우시는 꽃인 것처럼.... 하나님은 이 거친 세상을 살면서 복음의 꽃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우리들을 믿음 있다고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뜨거움과 황량함과 우리의 연약함과 초라함 속에서도 믿음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복음의 꽃이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오해는 이 성경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 성경은 우리의 현재를 위해 기록된 성경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은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19) 이 명령으로 기록된 계시록의 목적은 바로 3절에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 기록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도와 교회가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언제 말입니까? 지금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승리를 보면서 지금 낙심하지 않고, 지금 패배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입니다. 현재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대한 성경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기록한 요한도 삶의 현실이 쉽지 않습니다. 외롭고 힘든 귀양생활입니다. 주님, 언제까지 입니까? 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요한 또한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교회의 과거를 말씀하시고, 일곱 교회를 통해서 교회의 현재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4장부터 하나님은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계 4:1)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은 하나님과 요한이 서로 아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차 있을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4장 2절에 그 비밀의 열쇠가 있습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계 4:2) 그는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그가 하늘의 보좌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죽임 당한 어린 양을 보게 됩니다. 장차 미래에 있을 심판과 구원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영광된 모든 장면들을 보고 경험합니다. 장차 이렇게 될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에게 영으로 임하셨고, 그에게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을까요?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그 말씀을 듣고 믿음의 꽃을 피우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의 삶이 밧모섬에 있고, 로마 제국의 말발굽 아래에 있고, 핍박과 고난이 있고, 시험과 유혹 가운데 있을지라도... 장차 있을 완전한 승리의 날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삶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저는 우리가 서로를 좀 격려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에 대해 좀 관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고 상황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이 어려운 시대에 믿음의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못나 보일 수 있고, 때로 거칠 수 있고, 때로 실수하고, 때로 안타까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좌우에 앉은 성도들의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면서, 서로 눈을 보면서 격려합시다. “당신은 사막에 핀 꽃 같은 사람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더욱 힘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격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과 용기를 잃지 않고 꽃으로 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의 꽃씨가 내 가슴에 떨어져서 그저 말라버리고 새들이 먹어버리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가슴을 이렇게 안아봅시다. 그리고 토닥토닥하면서 이렇게 말해봅시다. “하나님, 나와 함께 하셔서 감사합니다. 믿음의 꽃, 복음의 열매가 열리는 성도가 되게 해주세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더 좋은 목회자, 더 능력있는 목회자가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막에서 살다보니 그렇습니다. 혹 저의 가시에 찔린 일이 있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가시가 좀 있나봅니다. 저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사막 같은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목회자와 가정이 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목회자와 가정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저 역시 같은 제목으로 여러분과 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 초대교회가 성령 하나님이 경작하시는 복음의 꽃밭이 될 수 있기를, 멀리멀리 복음의 꽃씨를 날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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