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 - 13. 무릎 높이 | na kim | 2017-10-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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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8. * 본 문 : 요한복음 13장 13-15절 말씀 * 제 목 : 우리 교회 - 13. 무릎 높이 얼마 전에 우연히 강호동의 씨름 선수로서의 전성기 시절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통통하고 복스럽게 생긴 얼굴형에 찢어진 눈매, 더벅머리를 한 약관 스물의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연거푸 당시 씨름천하를 호령하던 이만기 선수와 만났습니다. 이만기 선수는 크지 않은 체구에 탁월한 기술로 인기와 돈을 끌어 모았던 당대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놀랍게도 강호동 선수는 이만기 선수를 제압합니다. 이만기 선수가 이기지 못했던 유일한 선수가 강호동 선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천하장사 결승전에서 다시 만납니다. 으아아아~~ 강호동 선수는 자신만의 세러머니를 하면서 등장합니다. 이만기 선수는 가사롭다는 듯 강호동 선수를 쳐다봅니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경기를 시작하려면 샅바를 잡아야 하고, 샅바를 잡으려면 두 선수가 무릎을 꿇어야하는데, 누구도 먼저 무릎 꿇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사진1) 팽팽한 긴장감이 씨름판에 흐릅니다. 아나운서가 말합니다. “이만기 선수가 강호동 선수의 고등학교 선배입니다. 10년 이상 차이가 납니다. 강호동 선수가 먼저 무릎을 꿇는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거나 자존심 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강호동 선수는 먼저 무릎을 주지 않습니다. 이만기 선수 또한 새까만 후배 앞에 무릎 꿇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심판은 결국 같이 무릎을 꿇게 하고 경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다시 천하장사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두 선수가 준결승에서 만났습니다. 종합전적 3승 2패... 이만기 선수가 종합전적에서 열세에 있는 유일한 선수가 강호동이었습니다. “으라차차차!!!” 강호동 선수가 팔을 벌리고 포효합니다. 이미 이만기 선수는 기분이 많이 상해있습니다. 경기가 시작됩니다. 불꽃이 튀었습니다. 공격과 방어를 거듭하다보니 어느새 두 사람이 서로의 샅바를 놓치게 됩니다. 이만기 선수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강호동 선수가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밀어버렸습니다. 넘어진 이만기 선수가 어이없다는 듯 심판을 바라봅니다. 강호동 선수는 저편으로 가서 “우아아아~~~~”포효합니다. 두 번째 판이 시작됩니다. 이만기 선수는 급한 마음에 먼저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강호동 선수가 빨리 경기에 임하지 않습니다. 무릎을 꿇을 것처럼 하더니 다시 뒤로 돌아서 “우와아아....”하고 소리를 칩니다. 이만기 선수의 표정이 일그러집니다. 강호동 선수가 샅바를 잡으려고 하자 이만기 선수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깝치리 마라, 이 XX야!” 잠시 경기가 중단됩니다. 강호동 선수는 욕을 들어가면서 경기를 할 수 없다고 항의합니다. 감독도 항의합니다. 결국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고, 감정을 콘트롤하지 못했던 이만기 선수는 쉽게 지고 맙니다. 넘어져 있는 이만기 선수에게 강호동 선수가 손을 내밉니다. 씨름판에서 흔히 있는 승자의 여유이자 패자의 인정입니다. 그런데 이만기 선수는 강호동 선수의 손을 뿌리칩니다.(사진2) 그 이후 두 사람은 10년 간 만나지 않습니다. 1. 당위(當爲)와 현실(現實) 사이 여러분! 저는 목사입니다. 교회가 저의 가장 중요한 삶의 터전입니다. 저는 교회를 통해 생각하고 성도들과 함께 삽니다. 이렇게 좋은 직업, 이렇게 복된 환경, 이렇게 행복한 관계가 또 있을까요? 여러분은 저의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저는 이 말이 동의가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합니다. 동의가 되는 이유는 당위(當爲)에 있다면, 동의되지 않은 이유는 현실(現實)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섬기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직분, 하나님으로 설명되고 은혜로 유지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행복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꿇지 않은 무릎과 잡지 않는 손을 상식으로 합니다. 자존심을 세워야 하고 그것을 위해 죽일 수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도, 목회도 그 상식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가장 높은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먼 거리를 가득 채운 은혜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지만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이 상처받은 마음과 자존심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강호동과 이만기 - 그들이 당대 최고의 씨름 선수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처참하게 무너졌을까요? 그들 앞에 무너졌던 선수들 또한 매일 구슬같은 땀을 흘리며 훈련했고,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텐데 말입니다. 두 팔을 벌리고 포효하던 자신들의 등 뒤에서 모래판에 고개를 박고 눈물 흘리던 수많은 선수들이 있는데... 그들은 단 한번을 지지 않겠다고 먼저 무릎을 주지 않고, 기분 나쁘게 한번 졌다고 해서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와 지키기를 원하는 자존심 이전에 자신 앞에 부숴지고 무너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면 그들은 좀 더 자유롭게 자신들의 손과 무릎을 서로에게 줄 수 있지 않았을까요? 2. 상식(常識) vs. 비상식(非常識)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십니다. 제자들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온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이제 왜 십자가까지 지려고 하십니까? 안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와 말과 예수님의 말 중에 여러분은 누구의 말이 상식에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베드로의 말입니다. 사람이 가진 상식은 베드로의 편입니다. 예수님이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고 제자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물을 가져다가 그들의 발을 씻깁니다. 베드로가 만류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도 황송할텐데 왜 예수님이 우리들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십니까? 안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모두의 발을 씻기십니다.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희와 내가 서로 상관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곧 예수님을 팔기 위해 제사장들과 은밀한 만남을 가질 유다의 발까지도 씻기십니다. 누구의 말이 상식에 맞습니까? 예수님은 모두가 아는 상식과 예수님만의 비상식을 하나 더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5-27) 여러분은 제자들이 가진 상식에 동의가 되십니까? 예수님의 비상식에 동의가 되십니까? 3. 믿음이 필요한 이유 당연히 우리의 성정과 가치는 제자들 쪽에 가깝습니다. 제가 서론에서 드린 이야기를 ‘강호동의 무릎과 이만기의 손’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갈릴리 마을에 글을 올렸더니 ‘상한 갈대’라는 아이디를 쓰는 40대의 한 남성이 이런 답글을 달았습니다. “말씀은 맞습니다만, 천성적으로 잘 안되는 사람도 있어요. 신앙적으로, 이성적으로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안되는 사람들을 정죄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답글을 달았습니다. “완전 동의합니다. 저도 정말 잘 안되는 1인입니다. 그것 때문에 잃은 것이 정말 많은 1인이기도 하구요...” 저는 가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시면서 제자들과 동행하신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우리들과 너무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연약함과 비겁함이 때로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의 소원, 그들의 가치관이 우리가 가진 것들과 비슷합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들을 그 생각과 소원 그대로 버려두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도마가 예수를 믿지 않아서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버리고 3년간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까? 아직 그의 믿음이 자신들의 상식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비상식을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기도를 내려놓기에는, 자신이 평생을 품은 소원과 욕심을 포기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살기에는, 예수님처럼 엎드려서 발을 씻기기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은 믿지 못하고 용기 내지 못하고 결단하지 못하는 연약한 제자가 아니라, 믿고 용기 있게 결단하는 제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에게도 바로 이 믿음, 제자들의 상식이 아닌 예수님의 비상식을 선택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4. 믿음의 높이 VS. 무릎의 높이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 중에 참 안타까운 선택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율법사이면서 부자였던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좀 괜찮은 사람입니다. 스펙이 좋습니다. 엄친아입니다. 다 가졌습니다. 부자인데 잘 배웠습니다. 겸손하고 지혜로워서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해 질문합니다. “예수님, 내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 말씀합니다. “그 정도는 다 잘 지킵니다.” 그가 패기있게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그 사람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그에게 믿음이 있었을까요? 네, 그는 잘 믿습니다. 모든 율법을 자신 있게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믿음의 크기는 어느 만큼일까요? 그의 믿음의 크기는 안타깝게도 그의 재물의 높이를 넘지 못합니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그것만은... 이런 겁니다. 내가 다른 일에는 헌신할 수 있는데... 그것만은.... 아니되옵니다..... 20세의 강호동이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자존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강호동은 그 무릎높이만큼의 자존심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무릎 꿇린 수많은 선수들을 앞에 두고... 나는 결코 당신들처럼 무릎 꿇지 않는다고 외칩니다. 이만기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선수들을 쓰러뜨리고 그들에게 승리의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던가요? 그런데 그가 한 뼘 길이의 자존심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운동선수여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정도로 성공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성도입니다. 무너지지 않는 자존심을 걸고 싸우는 선수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서로를 섬기는 성도들입니다. 자존심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사용해야 하고, 욕심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사용해야 하고, 나의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믿음의 높이가 우리의 무릎의 높이를 극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길이가 내밀어야 하는 손의 길이를 극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의 무게가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발을 씻기는 자신을 말리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절) 예수님께서 무릎을 포기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고, 서로 헌신하고 섬기는 것이 옳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상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아닌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무릎의 높이, 허락하신 믿음으로 훌쩍 뛰어넘고 서로를 향한 헌신과 수고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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