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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교회 - 1. 겸손의 열매 na kim 2017-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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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사무엘상 1516-23절 말씀

* 제 목 : 낮은 교회 - 1. 겸손의 열매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에는 'An ass in lion's skin'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ass는 엉덩이가 아니라 donkey, 즉 당나귀라는 뜻입니다.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라는 뜻입니다. 고집이 센 바보나 멍청이의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 고사성아의 유래를 아십니까?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초나라의 선왕이 재상이었던 소해휼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휘두르는 권력이 막강했습니다. 그러자 지혜로운 신하였던 강을이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여우가 막다른 길에서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순간 여우는 꾀를 냅니다. 자신은 이 산의 왕이기 때문에 모든 동물들이 다 무서워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여우의 말을 호랑이가 믿지 않자 자신을 따라와 보라고 말합니다. 호랑이가 여우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산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다 혼비백산 도망을 갑니다. 감히 이렇게 힘이 센 나를 잡아 먹는다고!!! 여우가 호랑이를 위협하자 호랑이조차 겁을 먹고 도망을 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강을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동물들은 여우가 아니라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를 무서워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해휼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왕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결국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은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은 자격도 권력도 없는데 분별력이 없는 권력자의 힘을 빌려서 그것이 자신의 것인 양 휘두를 때 호가호위한다라고 말을 합니다. 아마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2016, 한국 역사에 다시없었던 큰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민이 위임한 공적 권력을 자신의 이익 위해 사유화할 수 있는 그 어떤 권리도, 자격도 없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순실 한 사람이 호가호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를 국민주권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한 나라의 권력이 선출직에서 나오는 것은 그 선출하는 과정을 통해서 국민들이 자신의 주권적 권리를 선출된 정부에 위임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가 호랑이가 아니라 권력의 주체인 국민이 호랑이입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선출직들이 자신들이 호랑이인 줄 알고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면 진짜 호랑이인 국민들이 그 가면을 벗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면을 벗은 여우들이 재판정에서 얼마나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지 보십시오.

 

1. 교만은 습관입니다.

 

실은 제가 얼마 전에 저희 타운하우스 관리인과 좀 다툰 일이 있습니다. 저희 집 뒤에 있는 숲에 겨울에 땔 나무를 좀 쌓아뒀더니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살짝 기분이 나빴습니다. 정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 벌금이 날아왔습니다. 제대로 정리를 하라는 겁니다. 기분이 더 나빴습니다. 그때가 마침 나바호 선교여행을 가던 때입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치우고 정리를 했습니다. 선교를 다녀왔더니 또 벌금이 날아왔습니다. 합치면 꽤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전화를 했습니다. 담당자를 찾았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따졌습니다. 몇 가지 생각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전화로 하지 말고 직접 나와서 무엇인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그냥 편지와 말로 하겠다는 담당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당신들에게 Pay를 주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 당신들의 직무가 아니라 입주자들이 보다 편하게 살도록 돕는 일입니다. 나와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알려주세요.” 결국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그가 정리하라고 지적한 부분과 제가 정리한 것이 달랐습니다. 서로 오해를 없애고... 그리고 벌금도 없앴습니다. 악수하고 헤어졌고, 저는 뒤뜰을 아주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왜 그 사람은 저를 꾸짖고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교만은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교만에 빠집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무엇 하나 더 가지면, 무엇 하나 더 하면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자랑하고 싶습니다. 공복인 공무원들이 권력화되는 이유가 그러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목회자들이 권위적이 되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Servantship은 사라지고 Ownership만 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쉽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망각합니다. 자신이 정말 호랑이라고 생각한 여우는 참으로 불행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세상의 문화를 구별하셨습니다. 세상의 문화는 지향점이 뚜렷합니다. 높아져야 합니다. 집중되어야 합니다. 많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지 않습니다. 낮아져야 하고 적은 무리와 함께 합니다.

 

2. 낮아짐의 동기(動機)

 

그렇다며 본능적으로, 습관적으로 높아지려 하고 커지려고 하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아갈까요?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19세기에 남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했고, 240여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청년의 시기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전적인 순종을 가로막는 그 무엇인가가 자기 안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본질적으로 불순종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인가...? 그는 깊이 고민하면서 침묵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낮아져야 하고 순종해야만 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첫째, 그는 자신이 피조물임을 고백합니다.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은 늘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조주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없이는 심판의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없는 자신의 모든 행위의 동기와 결과가 결국 죄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십자가보다 낮아지기로 결심합니다.

 

셋째, 그는 자신이 성도임을 고백합니다. 죄인인데, 무익할 뿐인데...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죄악의 본성을 가지고 죄 많은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거룩으로 옷 입히셨습니다. 겸손히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 고백을 하면서 앤드류 머레이는 내면의 평안을 회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고백을 붙들고 그의 평생을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프리카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3. 겸손에 대한 오해

 

여러분은 앤드류 머레이의 겸손이 세가지 내면의 동기에 대해 동의하십니까? 여러분도 그와 같은 생각과 고백을 하십니까?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겸손에 대한 아주 보편적이고 속기 쉬운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죄책감과 겸손을 혼동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죄가 있다는 것과 죄책감을 느낀다는 말은 같은 말일까요? 내가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을 더럽고 가치없게 여기는 것은 과연 겸손한 것입니까? 그것은 오히려 가장된 교만일 수 있습니다. 겸손함이란 십자가 밑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인정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죄 사하심을 얻고 십자가의 은혜의 인도하심을 받는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은 겸손에 대한 고백과 충돌합니다. 어릴 적 대예배에 참석하면 장로님들의 기도에 등장하는 자신은 늘 먼지 같고 벌레 같고 쓸모없고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낮고 겸손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장로님들이 서로 다툽니다. 성도들에 대해 권위적입니다. 내가 고백했다고 해서 내 마음과 삶이 겸손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 우리의 삶은 고백을 배반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는 일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창조주, 구원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겸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에게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 중에 아무도 예수님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도 자신의 두 아들을 부탁하되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으실 때 하나는 보좌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혀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보좌에는 앉지 않겠지만... 예수님 다음 자리를 노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적인 겸손이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 자신의 무릎을 줄 수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내 앞 뒤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4. 겸손의 열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는 겸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울왕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사람입니다. 또 선지자인 사무엘을 불러서 제사를 드려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를 교만하다고 책망하시고, 그를 버리겠다 말씀하실까요? 그의 겸손이 교만을 가장한 겸손이요, 그의 예배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섬기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주시는 말씀을 봅시다.

 

하나님은 사울이 스스로 낮은 자로 살아갈 때 택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삼상 15:17)라고 했습니다. 그의 능력이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택하심이 그를 왕되게 했습니다. 사람을 높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그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를 왕으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으로 다르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겸손하고 순종하다가... 왕이 되고 난 다음에는 교만하고 거역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사울은 그 어리석은 길을 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고 강화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기보다 백성들과 장로들의 마음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의 영광을 원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진실을 고백하기보다 거짓으로 말하고 사실을 왜곡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그의 행위를 해석하십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삼상 15:22-23) 하나님은 그의 행위를 거역으로 해석했습니다.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는 마치 점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책망하실 때 완고하게 변명하고 거짓말하면서 버티는 것은 마치 우상에게 절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뿐입니다. 제사를 드렸는데 왜 나를 이렇게 책망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내면의 동기와 생각을 보십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자신의 만족과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겸손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사울은 가장 겸손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의 겸손은 무엇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바로 순종입니다. 겸손의 열매는 순종입니다. 만일 그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왕권을 지켰다면 그는 가장 뛰어난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사울을 왕위에서 끌어내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고난을 준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의 마음을 높였습니다. 그에게 더 큰 권력의지를 주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높아진 마음과 부풀어진 권력의지를 따라 행하게 했습니다. 그는 실패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따라해볼까요? 하나님은 겸손한 성도를 사랑하십니다. 겸손의 열매는 순종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목사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자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자는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소견과 욕심을 따라 살 때에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따라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겸손하게 그 은혜에 감사하고 순종하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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