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교회 (2): 하나님과의 평등 | na kim | 2017-10-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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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29. * 본 문 : 빌립보서 2장 1-14절 말씀 * 제 목 : 낮은 교회 - 2. 하나님과의 균형 여러분도 아마 이 그림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사진1) 이 그림의 제목은 ‘Equality and Equity'입니다. 굳이 해석하자면 ‘균등과 평등’ 정도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Equality(균등)은 양면의 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면은 좋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제공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담장 너머 경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한 면의 날은 다소 위험합니다. 가지고 있는 기본 조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기회의 균등은 불평등을 고착화합니다. 그림에서처럼 본인이 가지고 있는 현재적 조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균등만을 적용하면 결과는 불평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부와 권력이 대물림되고 집단화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평등을 가장한 차별이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금수저’니 ‘흙수저’라는 말은 실은 참으로 슬픈 말입니다. “어차피 수저는 가지고 있네... 그러니까 똑같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출발선이 다르고 가진 조건이 다른데 말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가 ‘기회균등’의 가면을 쓰고 ‘조건불평등’을 왜곡하는 것은, 그러므로 거짓말입니다. 반면 Equity, 즉 평등은 다릅니다. 그것은 기회조건의 균등을 인정하면서 선행 조건의 차이 또한 인정합니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담장 너머 야구 경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제공되어야 하고, 키의 차이에 대한 고려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 함께 야구 경기를 즐길 수 있게 되고, 보편적인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이 개념이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두 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성도들과 교회가 서로 협력하고 도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평균케 하는 원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되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던 것처럼 각 성도와 교회가 가진 조건과 삶의 상황은 다르지만 서로 섬기고 돕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참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힘이 드는 개념입니다. 특히 “왜?”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평균케하시는 원리에 동참하는 것은 의무이며 당위일까요? 선행이며 선택일까요? 예를 들어서 아까 그 그림에서 키가 작아서 볼 수 없는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는 은혜일 수 있는 원리가 키가 크고 이미 가진 조건의 우월함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불평등하게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적절하고 합리적인 평등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1. 조화와 균형 예를 들어 부부 간에는 어떤 관계가 평등일까요? 요즘 양성평등에 관한 논쟁이 많습니다.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부모의 성을 다 따와서 이름에 사용합니다. ‘이박가일’, 혹은 ‘박이가일’이 되는 거지요. 여러분은 부부 사이에 있어야 할 평등의 모습이 이런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내가 하나를 주면 당신도 하나를 줘야 하고, 당신이 하나를 가지면 나도 하나를 가지는 것 - 이것이 평등일까요? 또 부모와 자녀 사이에 평등이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는 세대 간의 평등의 원리가 잘 지켜지고 있습니까? 실은 얼마 전에 제가 참 불공평한 일을 성일이에게 했습니다. 남자 애들이 좋아하는 방에 걸어두는 조그만 농구골대(사진2)가 있지 않습니까? 성일이에게 그걸 하나 사줬더니 잘 놀더군요. 그래서 내기를 했습니다. 5번 공을 던져서 1불내기를 한 것이지요.(사진3,4) 성일이도 좋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이틀에 걸쳐서 제가 10불을 땄습니다. 10불을 잃은 성일이의 표정이 기억납니다. 10불.... 성일이 한 달 용돈입니다. 내기니까 서로 1불씩 하는 게 공평한 것일까요? 아니면 각자의 한 달 용돈을 거는 것이 공평할까요? 키의 차이와 능력의 차이가 있으니까 더 섬세한 조절이 필요할까요? 실은 제게 성일이의 10불은 전혀 큰 돈이 아니고, 성일이에게 있어서 저의 한 달 용돈은 감당이 되지 않을 겁니다. 또 알고 보면 성일이의 10불은 실은 제가 준 돈이기도 하구요.... 성일이와 저 사이에 평등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바로 여기서 조화와 균형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부 간에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는 것이 평등이 아니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하나씩 주고받는 것이 평등이 아닙니다. 모든 관계를 그 관계만이 가지는 조화가 있고 균형이 있습니다. 50대 50이어도 불공평할 수 있고, 1대 99여도 공평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주기만 해도 기쁜 것이고, 부부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헌신하고 수고해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관계의 특성에 따른 조화와 그것에 맞는 균형이 각각 존재합니다. 제가 10불을 딴 지 2-3일이 지나고 성일이가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시합을 하자고 했습니다. 사실 성일이 약을 올리느라고 10불을 성일이 벽에 압정으로 박아뒀거든요.(사진5) 1불 내기를 해서 제가 졌구요, 2불로 올렸는데 제가 졌구요, 3불로 올렸다가 또 졌구요, 4불 올려서 또 졌습니다. 결국 2-3일에 걸쳐서 땄던 10불을 한 30분 만에 다 잃고 말았습니다.(사진6) 그런데 저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빠 이겨보겠다고 날마다 공을 통통 굴리면서 연습한 것을 알기 때문이고, 저도 그렇게 컸기 때문입니다. 저와 성일이와의 조화와 균형은 그렇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2. 아름다운 조화, 적절한 균형 그렇다면 우리들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와 적절한 균형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성경에서 조화와 균형이 완벽했던 때를 기록하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온 우주만물이 가장 아름답고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넘침도 없고 부족함도 없이 서로에 대해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바로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 가운데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창조적 질서에 대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창조적 질서가 무너집니다. 하나님과 만물, 사람과 만물 사이에 있었던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이 무너지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탄의 유혹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탄은 사람을 유혹하되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는 깨뜨리는 사람의 가장 큰 죄는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함’입니다. 즉, ‘교만’입니다. 사람이 피조물로서의 창조적 질서를 넘어서려고 했을 때 하나님과 우주만물 사이에 존재하던 아름다운 균형과 적절한 조화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성경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교만에 대해 경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바벨탑을 쌓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이 형상화된 우상을 만듭니다. 사람이 만든 돈으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려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하나님이 되어 내 뜻대로 살아가려 합니다. 고대로부터 모든 제왕들은 인간신이 되거나 신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군림하려 했습니다. 결국 교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세상의 조화와 균형을 깨뜨리는 가장 중요한 죄가 됩니다. 3. 회복,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은 창조적 질서를 회복하는 일에 사람의 능력을 부정하십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창조하지 못했듯이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회복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아름다운 조화와 적절한 균형의 회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회복의 길,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의 죄의 시작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교만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시작되는 회복의 시작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낮아지심,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삶으로 겸손을 실천하셨습니다. 삼위 하나님 중 한 분이시며, 창조주이며 구속주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가장 낮고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사람의 젖을 먹고 자랐고, 사람을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며 사람들의 형제와 친구로 성장했습니다. ‘체험, 삶의 현장’처럼 하루 이틀 혹은 일주일을 잠시 경험해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사람으로 사시다가 사람의 모습으로 죽임당하셨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사시다가 더 낮은 곳으로 가서 죽임당하셨습니다. 인류의 교만으로 시작된 죄, 죄로 무너진 조화와 균형을 회복하는 길은 바로 예수라는 생명의 길 밖에 없습니다. 그 길은 뻥 뚫린 하이웨이가 아닙니다. 그 길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좁을 길이며 험한 길이며 무엇보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깔린 길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인 하나님과 같아지겠다고 약속을 깨뜨렸습니다.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조화의 가장 적절했던 균형을 깨버렸습니다. 파괴의 시작은 사람의 교만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창조주인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무너진 창조적 질서가 구속적인 회복을 이룹니다. 회복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회복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는 삶을 살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4. 하나님과의 균형 오늘 제목은 다소 도전적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서신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물론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복음이지만 오늘 본문은 참 아름답습니다. 이 본문에 설교라는 말로 덧붙이기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다함께 다시 한번 의미를 묵상하면서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 2:1-14) 본문의 말씀은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 문단에는 핵심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제가 밑줄 그은 부분만 한번 다시 읽어 봅시다. 1) 오직 겸손한 마음 2)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십자가(의 마음) 3)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4) 두렵고 떨림으로(겸손하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 사람이 교만하여 무너뜨린 하나님과의 균형을 하나님만이 그 사랑으로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균형 회복의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 그 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일까요? 십자가입니다. 낮아지심입니다. 겸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오직 겸손한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십니다. 그 마음을 품을 때 비로소 창조 때 천지만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존재만으로도 영광을 돌렸던 아름다운 균형과 완전한 조화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창조적 질서가 구속적 질서로 온전해집니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성도들이 해야 할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1) 먼저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 즉 오직 겸손한 마음이 변치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한하고도 놀라운 사랑에 대해 균형을 맞추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교회, 성도가 맞추는 균형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는 겸손과 감사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서로에 대해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겸손해지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관념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에서 서로에 대해 겸손해지지가 않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함께 교회로 섬기며 사역을 감당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결과가 분열이고 단절입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을 보시겠습니까? 서로에 대해 겸손한 성도들은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습니다. 오직 겸손하고, 섬기고, 그리고 나를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게 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만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14)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신 놀라운 사랑에 대해 우리가 더 낮은 곳에서 그 사랑에 화답하고 균형을 맞춰가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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