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5 낮은 교회 (3): 겸손의 사람 | na kim | 2017-11-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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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빌립보서 2장 1-5절 말씀 * 제 목 : 낮은 교회 - 3. 겸손의 사람 이제 오늘로 겸손에 대해서 세 번째로 말씀을 전합니다. 아시듯이 큰 제목은 ‘낮은 교회’입니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높은 교회’도 있는가? 혹은 ‘교회가 높아질 수 있는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높아질 수 있고, 높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높은 교회의 두 예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에 대해 높은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20절에 나와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 교회는 심지어 예수님에 대해서도 문턱을 높입니다. 어디까지 높이느냐 하면 입구 전체를 막아버렸습니다. 문은 열리면 길이 되고 닫히면 벽이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문턱을 벽으로 만들어버린 교회였습니다. 또 한 예는 사람에 대해 높은 교회입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2-4) 야고보가 지적하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사람에 대한 자기 기준을 가지고 판단할 때 문턱 높은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필요이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사람이 가진 것이 기준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없는 것이 기준이 됩니다. “얼마나 복음이 필요한 사람인가?” 이 하나의 기준으로 우리는 교회가 되고 성도가 됩니다. 아마도 제가 조금 전에 드린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 분은 없을 겁니다. 문제는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에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이고, 야고보 사도 또한 교회에 대해 주는 말씀입니다. 왜 교회인데, 예수를 믿는데.... 마음이 점점 높아지고 고개는 뒤로 젖혀져서 뻣뻣해지고 마음에는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말들이 가득하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교만을 ‘잘난 체 하는 성격이나 습관,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 정도로 보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그 사람 참 교만해... 거만해...”라는 말을 할 때 대부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쉽게 무시하고 잘난 척 하는 것 같애”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 말은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교만은 그런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 교만은 무릎 꿇고 엎드린 사람에게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 교만은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면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만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시작은 교만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삶의 태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창조적 관계를 외면하는 데서부터 왔습니다. 교만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관심을 외면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내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관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도, 성공가도를 달릴 때도, 내가 군중들의 환호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교만할 수 있고, 나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주권과 관심에 대해 문을 열고 내 삶을 하나님이 통행하시는 길로 만들 것인가? 내가 하나님의 주권과 관심에 대해 문을 닫고 내 삶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벽으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오늘 여러분께 참으로 완전하게 겸손했던 한 사람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참된 겸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자기 진술을 봅시다. 1. 스스로 오지 않았습니다.(요 7:28-29, 요 8:42) 먼저 요한복음 7장 28-29절의 말씀과 8장 42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요 7:28-29)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예수님은 “스스로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셨고, 예수님은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이렇게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틀린 말입니까? 옳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화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셨고 나는 순종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때로 선하고 좋은 일도... 내가 내면으로 동의되지 않거나 하기 싫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보편적으로 옳고 신앙적으로도 해야 할 일 같기는 한데... 왠지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고, 손해보는 것 같고, 피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전에 보신 말씀들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보내셨고, 나는 왔다” 이외에 다른 진술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겸손은 순종입니다. 나의 의지를 설명하지 않고 순종의 결단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의 사람 예수님은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자신의 뜻과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요 5:30, 6:38-39) 두 번째 보실 말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단한 것일까요? 좀 전에 읽은 말씀을 보시면 답이 있습니다.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없을 수 없고, 능력은 충만합니다. 십자가의 잔을 거부하거나 외면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비난하거나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들에게 겸손과 순종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주 신앙적 결단을 합니다. 순종한다고 스스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내 뜻과 의지가 그 순종에 섞입니다. 목적과 결과에 대해서는 순종하되 내가 원하는 방법과 과정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때로 아픕니다. 분명히 선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인데... 상처가 남습니다. 관계가 어려워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 속에 내 뜻과 자기의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지만 내 생각과 뜻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3. 자신의 지식과 교훈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요 7:16, 요 14:10) 세 번째로 볼 두 말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말씀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이 모든 말들은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주시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해서 조금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몇 년 전 교단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문제를 제기했던 저희 젊은 목사들을 불러놓고 선배 목사님들이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배 목사님들의 말을 들으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거역하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과감하게 그 뜻을 어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고민하고 기도하고 내린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설명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일까요? ‘대언’(代言)이라는 말은 정말 신중하고 어렵게 사용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에도 선지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씀을 전할 때가 있었습니다. 대언하는 것이 맞습니다. 자신의 뜻을 섞으면 안됩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백성들을 이끌고 가데스 광야에 있습니다. 백성들은 광야에서 물이 없어 어려움을 당하자 금방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를 쳐서 물을 공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리석은 백성들에 대해 분노합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민 20:10)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의 결과로 모세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섞었습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는 말에 정말 신중한 두려움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말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배우고 연구하고, 그리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설명합니다.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목적을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나를 통해서 너희들에게 전달될 뿐이다.”
4.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요 5:41, 요 8:50) 마지막으로 볼 두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41)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요 8:50)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은 보이고 들리고 느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인정과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낌도 없다는데 있습니다. 사울왕이 넘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넘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사람에게서 내가 받는 영광의 달콤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칭찬받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그것에 갈급하거나 그것을 추구할 때 생깁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영광을 얻으려는 시도는 끊임없는 분쟁과 다툼의 이유가 되어왔습니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겸손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계속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했습니다. 우리 또한 그 겸손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한 가지 정말 조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잠시 말씀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한국을 대표하는 한 대형교회가 교회당을 건축하고 건물 전면에 크게 플랭카드를 내걸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자신들의 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마도 교회당만으로 보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 중 하나일 겁니다.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교회당으로 드리고, 자신들이 아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 겸손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교회당은 그 교회에 출석하거나 관련된 수많은 공무원들이 편법과 불법의 결과물입니다. 아직도 소송이 진행되고 있고, 시민들의 통행에 불편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일까요? 저는 그 비슷한 시기에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제목이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분의 삶을 잘 알기에 관심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간증의 내용은 자신이 목회에 성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고생했고, 노력했는지 구구절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제목에 결국 ‘내가 했습니다’로 결론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과연 그토록 큰 불법과 편법의 교회당을 하나님이 하신 것일까요?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이 거짓말에 속습니다. 제가 가끔 여러분에게도 말씀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거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어!”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셔!” 우리는 쉽게 이런 말을 합니다. 화법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 믿는 내가 마음이 아프고 내가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 생각과 방법을 합리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를 정당화하고 자랑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겸손은 내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소명과 사역과 가르침과 그 영광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났습니다. 그 겸손을 본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적을 주시고 이루시고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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