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교회 (4) : 겸손을 배우다. | na kim | 2017-1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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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12. * 본 문 : 마태복음 11장 28-30말씀 * 제 목 : 낮은 교회 - 4. 겸손을 배우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I.Q.조사를 학교에서 했습니다. 선생님이 어머니를 학교로 부르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내가 공부를 안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무슨 말이겠습니까? 저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거나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이런 말로 저를 방어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아예 못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충분히 저를 합리화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그 말을 안들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 이후 저는 늘 머리만 믿고 공부를 안하는 학생, 혹은 머리는 좋은데 그에 걸맞는 성적을 못거두는 학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제 인생에 처음으로 강적을 만났습니다. 우리 반 반장이었고, 릴레이 선수였으며, 한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고, 착하기까지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보통 키 큰 녀석들이 공부를 썩 잘하기는 어려운데 이 친구는 키까지 커서 저의 짝이 되었습니다. 사람 좋고 착하고.... 정말 인기가 정말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당시 그 친구의 집이 꽤 잘 살았었기 때문에 도시락 반찬이 좋았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이 우~ 몰려와서 그 친구의 고급 반찬을 다 먹습니다. 그러면 한 두 젓가락 밖에 밥을 못먹은 그 친구는 결국 저와 함께 제 반찬으로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둘째 시간이나 셋째 시간을 마치고 당당하게 그 친구의 도시락을 탐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 친구가 점심을 제대로 못먹는다는 것을 알았던 어머니가 계란덮밥을 했습니다. 그런데 밥에 덥혀 있던 계란까지 벗겨가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어머니는 요리한 계란 부침개를 깔아서 도시락을 만들었습니다. 친구들은 도시락 뚜껑에 밥을 뒤집어 놓고 부침개를 먹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는 그 친구가 좀 가식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거리를 뒀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 친구의 행동은 진심이었습니다. 이 녀석은 정말 성실한 녀석이구나... 어린 마음에도 감동이 생겼습니다. 결국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물었습니다. “너 그렇게 살기에 힘들지는 않니?” 의외로 그 친구의 대답은 단순했습니다. “힘들어!” 자기도 친구들이 허락도 없이 도시락을 먹으면 화가 난다는 겁니다. 1등을 놓치지 않기도 힘들다는 겁니다. “그러면 니 도시락 뺏어먹는 녀석들에게 화를 내! 그리고 가끔씩 나와 같이 해운대와 광안리에 놀러도 가고...!” 그 친구는 씨익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그 친구의 성실함은 계속되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고등학교 3년 동안 그 친구보다 단 한 번도 좋은 성적을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물론 저는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돌아다니고, 싸움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I.Q.가 저보다 좋은지 나쁜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별 차이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차이를 결정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둘이 무엇을 가졌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있었습니다. 1. 믿음이 겸손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늘 다투고 경쟁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모두 자신이 제일 좋은 제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왜 스스로를 오해하고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지금 당장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을 만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실은 그 누구도 좋은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그들의 제자로서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으로 대단히 만족했을 수 있습니다. 메시야의 제자가 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들 중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제자가 된 것은 예수님이 부르셨기 때문이었지만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그들의 결단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도입니다. 교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즉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성품은 저절로 변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경험한 성도들과 교회의 영역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가졌던가요? 우리는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은 있지만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성도로 불리지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교회가 되기도 합니다. 믿음은 선물이지만 믿음으로 사는 삶은 우리의 선택이자 노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을 닮은 성도라는 것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우라!’고 권면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들은 나에게서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 자신을 설명하려하지 말고 거룩하고 영적인 의지를 가지고 예수를 배우고 닮아가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2. 옛사람과 겸손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의 겸손에 대해 또 하나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옛사람의 본성과 관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세상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옛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고 30절에서 ‘쉽고 가벼운 짐’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이 약속하는 쉽고 가벼운 짐은 예수님의 성품인 ‘온유함과 겸손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을 예수님께 배워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쉽게 가벼운 짐으로 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옛사람의 본성과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새사람의 품성이 공존할 수 있을까요? 겸손이란 예수님의 성품의 핵심입니다.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될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절정입니다. 높아지고 많아지고 중심에 서려고 하는 우리의 옛사람과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낮은 곳에서 섬기면서 헌신하면서 완성되는 성품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세속적 본성을 거스릅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연습하고 익혀야 할 주님의 성품입니다. 3. 겸손은 나의 노력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옛사람의 흔적을 지워내고 겸손하고 온유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때로 우리는 겸손과 겸양의 미덕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더 낮은 자세를 취함으로 더 많이 사랑받고 인정받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낮은 자세를 취해야 편을 얻고 인정받는 다는 것을 압니다. 다...덕분입니다.... 뭘요...잘 못합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많이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등등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서 오히려 인정받는 방법에 익숙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가 사용하는 겸양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하시면서부터 마지막까지 ‘겸손’이라는 주제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마음과 삶은 참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겸손에 대한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아... 겸손은 사람의 힘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능력이면서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 입을 때만이 구현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하늘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이 이 땅 가장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고, 십자가에 있었기에 못 박혔습니다. 하늘에서 허락된 뜻이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고 무릎 꿇고 씻기는 자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시작된 뜻을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우리들이 이룰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의 뜻은 하늘의 능력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겸손에서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자신의 생각과 뜻이 섞입니다. 결국 온전한 겸손을 이루는 일에 실패합니다. 성경의 기록 중에서 다윗이 범했던 두 번째 범죄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24장과 역대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자신의 왕국의 백성들을 계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삼하 24장에는 이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삼하 24:1) 그리고 역대상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 21:1) 한 성경은 하나님이 다윗을 격동하신 것으로, 다른 하나는 사탄이 다윗을 충동한 것으로 표현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깊고 친밀하게 하나님을 경험했었는지 압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블레셋의 대장군 골리앗을 죽이고도 교만하지 않았고, 모든 백성들이 사울왕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칭송할 때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결국 벗어나지 못한 단 한가지의 유혹은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자신이 이룬 왕국을 확인하고 싶은 유혹,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진노와 사탄의 유혹으로 설명합니다. 표현만 다를 뿐 결국 같은 말입니다. 교만은 사탄의 것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위대했던 왕 다윗도 결국 넘어서지 못했던 교만의 장벽, 그것은 사람의 힘과 믿음으로는 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4. 겸손 - 하나님의 형상으로 조각되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재미있는 사진을 하나 봤습니다.(사진1)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마 남성들의 다이어트 혹은 운동을 자극하는 사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과 비교하면 재미있는 적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겸손이란, 저 그림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우리의 몸에 붙어 있는 교만의 비계를 도려내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들의 정직하고 진실한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집을 키워왔던 욕망의 살덩이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깎아내고 버리고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지으신 형상으로 회복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것은 참으로 아픈 일일 수 있습니다. 내가 키운 내 몸집을 포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왜소하게 보일 수도 있는 나의 실재를 고백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혹시 나의 실재가 드러나면 사람들은 나를 외면하지는 않을까?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거나 염려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 모습으로 정직하고 진실되게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렇게 도려내고 내려놓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결과를 겸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함이란 저 부숴지고 깨지고 잘려나간 조각들 자체입니다. 아니 자르고 깨고 부수는 과정이 겸손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겸손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영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한 자아가 드러나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우리의 본래적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겸손이 무엇인지 알고, 우리가 성도와 교회로서 겸손해야 함을 알고, 예수님이 겸손의 본이 되신다는 것을 압니다. 잘 압니다. 그런데 애써 외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겸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실은 나는 겸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낮아지면 높이신다고 하니 잠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척 할 뿐이지... 실은 높아지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면 좋겠고, 내가 인기를 얻으면 좋겠고, 내가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고, 내 뜻대로 사람들을 움직이고 싶습니다. 나는 겸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등학생 이응도와 같이 살아갈 겁니다. “겸손... 음... 해야지... 당연히... 예수 믿으니까... 내가 마음만 딱 먹으면 돼! 지금은 잠시... 내가 이렇지만... 나는 언제든 겸손해질 수 있어....”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영적 의지와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모든 교만의 살덩이들이 떨어져나가고 가볍고 아름다운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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