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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기쁨 na kim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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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26.

 

* 본 문 : 고린도후서 127-10절 말씀

* 제 목 : 겸손의 기쁨

 

1980년대 초에 한국 사회에 안성기라는 걸출한 배우를 탄생시킨 두 영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1981년에 나온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영화구요, 다른 하나는 꼬방동네 사람들이라는 영화입니다. 두 영화는 모두 한때는 국회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이동철이라는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온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소설은 기지촌이 배경입니다. 실제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이동철이라는 작가는 기지촌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고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소설로 녹였습니다.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와 같은 여성들이 매순간 상품화되는 골목, 폭력과 마약과 도박이 일상이 되고, 약자가 더 약자를 착취하고 강자는 그 위에 군림하는 골목에서 사는 사람들을 그는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꼬방동네 사람들이라는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의 자식들의 후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소설에서 그는 서울 동대문밖 청계천을 끼고 있는 한 판자촌에 주목합니다. 그곳에는 행상, 품팔잇군, 윤락녀, 기둥서방, 포주, 밀주를 만들어 파는 사람, 앵벌이, 무당, 소매치기, 돌팔이의사, 호모, 불구자, 여자깡패, 사기꾼, 건달 등등 온갖 인생들이 각자 살아남기 위해 절박하게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소설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아닌데 두 소설에 같은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바로 공병두라는 목사입니다. 그는 어둠의 자식들에서는 기지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꼬방동네 사람들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판자촌에서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동네 공터에 교회를 세우고 사는 사람들을 모으고 격려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공병두 목사, 그는 실은 작가 이용철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한 실존인물입니다. 바로 허병섭이라는 사람입니다. 이름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제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로 삶을 준비할 때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목사이면서 목사가 아닙니다.

 

한국신학대학원을 졸업할 때 최우수 논문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던 그는 군목(軍牧)으로 군복무를 하던 시절에 청계천의 빈민들을 만나게 됩니다. 군복무를 마친 후 청계천으로 들어가서 도시 빈민들을 돕는 활동을 하다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서울 하월곡동 달동네로 들어가서 교회를 개척합니다. 당시 하월곡동은 주로 일용노동자들이 살았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술을 마시면서 도박하고 싸우는 일이 일상화된 동네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섬기고 헌신하면서 그는 목회에 한계를 느낍니다. 그가 섬기는 성도들은 주일 하루 한 시간 교회 나와서 예배하고 돌아가면 남은 모든 시간을 몸을 사용해서 돈을 벌고, 번 돈으로 몸을 망가지게 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용주들에게 부당한 노동환경과 임금을 강요받으면서도 일감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수중에 돈이 들어오면 함께 모여 도박과 술로 탕진했습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타일러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는 결심합니다.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일용노동자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목수일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2년만에 최고 기술자가 됩니다. 그리고 건축 일용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생산협동공동체, 월곡동 건축 일꾼 두레라는 조직을 만듭니다. 더 많은 소득을 보장하고 대신 건강하고 바른 삶으로 인도했습니다. 조직을 만들어서 부당한 노동환경이나 임금 착취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했습니다. 일용노동자들의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되고 형님이 되어서 그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용철 작가는 그가 목사로 판자촌을 누비면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고, 소설에서 그를 형상화했습니다.

 

1. 겸손의 의무에 대하여

 

여러분은 예수 믿는 우리들 모두가 겸손의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데 동의하십니까? 겸손하려고 노력하십니까? 좋습니다. 아마도 겸손은 우리들 모두에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질문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스스로 낮아지고 내가 스스로 겸손한 자리에 가도록 만들지 않으시고, 나를 정말 낮추시면... 그래서 겸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시면 어떻습니까? 도저히 교만할 수 없는 삶의 상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신의 연약함을 경험하거나 극단적인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있거나 삶의 상황들이 어려워져서 삶이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거나... 그래서 겸손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겸손은 좋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겸손하게 하시면.... 여러분은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속에서 먼저 겸손함을 배우고 인정하겠습니까? 겸손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믿음 있는 우리가 찾고 구해야 하는 덕목이라면.... 왜 대부분 우리는 내가 겸손해야 하는 상황, 삶의 고난과 고통을 벗어나려고만 할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들에게 겸손함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먼저 그도 삶에 다가온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세 번 거듭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민합니다. 왜 하나님은 선교에 힘쓰는 내게 이런 고통을 주셨지....? 고민하고 고민하던 그는 드디어 답을 얻습니다. ... 나는 원래 교만한 사람이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억지로 낮추지 않으시면 나는 하늘보다 더 높아질 사람이었구나.... 나의 연약함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구나.... 나를 연약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2. 가시가 주는 지혜

 

그리고 그는 오늘 본문에서 그가 고난을 통해 깨달은 것을 고백합니다. 그가 가장 먼저 고백하는 것은 그의 가장 연약함에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바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핍박을 받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힙니다. 그가 매를 맞습니다. 그가 누명을 쓰고 로마로 잡혀 갑니다. 지중해에서 큰 파도를 만납니다. 그는 그 많은 시련과 환란을 당하면서도 단 한번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통, 그런 시련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을 감사하게 여기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하나님께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시련은 믿음과 의지로 이길 수 있겠는데.... 자기 안에서 시작된 질병에서 오는 고통은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을 보면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세 번이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나도 연약하구나... 하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을 공격하는 모든 시련은 이길 수 있는데 내 육신의 질병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구나.... 만일 사탄이 육신의 연약함을 사용해서 공격하면.,.. 넘어질 수 있겠구나....’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기도에 대해 고민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귀한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첫째 고통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고통이 충분하다 말씀하시지 않고, 은혜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나의 겸손함과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만나는 길입니다.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셋째, 그러므로 이제 나는 기뻐합니다. 감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넷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고통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이 없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채워주시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을 받기 위해서는 좀 연약해도 좋습니다. 좀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좀 느리게 가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능력으로 만족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3. 믿음, 낮은 곳을 향한 선택

 

허병섭 목사의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가 하월곡동에 개척한 동월교회는 금방 성장합니다. 원래 그곳에서 도시빈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었고, 그들을 위해 싸우다가 감옥에도 여러 번 다녀왔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교육했습니다. 그는 두 번의 큰 결심을 합니다. 첫째는 자신도 노동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평일에는 일을 하고 주일에는 말씀을 전하는 생활이 10년 가까이 계속되었습니다. 하루는 부당한 노동현실에 대해 항의하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일용노동 조합원들도 함께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한 사람씩 취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허병섭 목사님에게는 경찰들이 목사님, 목사님...”하면서 깍듯이 예우를 하는데, 자신의 동료이자 성도들인 다른 노동자들에게는 하대를 하고 욕을 하면서 취조하는 것을 봤습니다. 함부로 대하고 무시했습니다. 허목사님은 미안하고 또 부끄러웠다고 했습니다. ... 나는 노가다인 척 했지 아직 완전한 노가다가 아니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과 자신을 다르게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허목사님은 이 때를 고백하기를 노가다인 척 하는 고상한 목사노릇을 계속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왕에 이 교회와 사람들에게 헌신하기로 결단했다면 그들과 완전히 동화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두 번째 결심을 합니다. 목사가 아닌 목수가 되기로 했습니다. 교회를 후배 목회자에게 위임하고 그는 완전히 목수로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낮아짐은 믿음으로 선택하는 삶이었습니다. 생각이 아니고 고백이 아니고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가식 아니고 장식품도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실천이자 구체적인 삶의 현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낮아짐을 선택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그에게 맡기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그 사람들처럼 되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목사직을 버렸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가장 목사다운 목사로 기억됩니다. 제게도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겸손에 대해 여러분께 물었습니다.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겸손하기를 원하십니까?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도하신다면... 여러분은 바울처럼 낮은 곳에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실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시기 전에 내가 먼저 낮은 삶을 믿음과 의지로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과 말이 아니라 삶으로 말입니다. 한 순간, 잠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삶의 현장에서 말입니다.

 

4. 겸손, 예수와 함께 하는 기쁨

 

제가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시험 들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어제 새벽 기도를 마치고 설교준비를 마무리하면서 결론 부분, 바로 이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찬송가 하나가 생각이 났습니다. 불렀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가사를 결론 부분에 적었습니다. 더 이상 원고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딱 한 마디 말을 적어놓고 잠시 잤습니다. 까먹고 있다가 일어나서 다시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빵 터졌습니다. 그리고 한참 그 가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1절만 함께 불러볼까요?

 

제가 1절 가사 마지막에 뭐라고 썼겠습니까? “뻥 치시네~~”라고 썼습니다. 여러분이 아니라 절 말입니다. 주님과 함께 길을 제대로 가는 것도 아니고, 항상 즐거워하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발자취를 밟는 것도 아니며, 한 걸음씩 주님과 함께 날마다 걷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저를 잘 압니다. 그런데 설교의 내용과 맞아서 찬송를 부르다보니.... 제가 좀 싫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낮은 곳에 두셔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평안한 삶에 두실 때 내가 믿음과 의지로 낮고 천한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내려갈 수 있는가? 제게 묻고 또 묻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 삶에 가장 귀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확인하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도 바울조차도 벗어나기 힘들었던 시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시련과 하나님의 거절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평안하고 아무런 문제없는 삶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는 삶이었습니다. 그 삶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교통하심이 있고 기쁨과 감사가 있었습니다. 낮은 삶, 겸손한 삶에는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는 참된 기쁨, 참된 감사가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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