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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교회 - 1. 열린 사람, 열린 교회 na kim 201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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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2.

 

* 본 문 : 16:6-15

* 제 목 : 선교적 교회 - 1. 열린 사람, 열린 교회

 

최근에 가까운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신학생들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꼭 한번은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해서 미국 이민 사회에 남아서 목회를 하시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이민 사회에 대한 소명을 주셨습니까?”

 

저는 원래 한국 진주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던 팀이 있었습니다. 그분들과의 교회에 대한 생각, 계획, 동기가 다 좋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원한다고 해서 교회가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뜻이 있고, 우리의 삶의 정황들이 있습니다. 제에게 주신 소명은 저의 삶의 다양한 상황과 함께 역사했습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미국으로 유학왔고, 이곳에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사역을 만났고, 그 결과 저는 이렇게 이민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소명은 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있고, 좋은 목회자가 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열고 성령 하나님이 때를 따라 주시는 지혜와 열정을 따라 움직이다보면... 하나님이 삶의 다양한 상황을 따라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것에 마음을 열어 놓으면 그것들이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열심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 안에서 말하기 시작할 때 귀를 막지 않고, 하나님의 허락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됩니다. 그래서 제게 질문하는 신학생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열리고 세상에 대해 열린 목회자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열렸다는 말은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아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고, 사람에 대해 열렸다는 말은 제가 사는 지역과 시대와 소통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거절하지 말아야하겠고, 우리 시대와 지역에 대한 헌신에 주저함이 없어야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열린 사람, 열린 교회라는 제목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입니다. 오랫동안 우리 교회에 나눠왔던 복음적 중립지대라는 개념이 오늘날 신학교에서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이름으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적 교회라는 큰 제목으로 우리 교회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저는 선교적 교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고 하면 열린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말씀으로 우리에게 있는 열림과 닫힘에 대해 고민을 나누겠습니다.

1. 닫힌 사람

 

예수님의 시대는 참 불행합니다. 특히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렸던 메시야를 거절하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참 바보같지 않습니까? 수백 수천 년을 기다려온 메시야인데 정작 그들에게 메시야가 찾아오자 그들은 거절하고 외면하고 죽입니다. 복음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지 못했고, 복음이 없는 그들의 마음은 당연히 복음을 생산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닫힌 사람들의 가장 좋은 예가 예수님 시대의 종교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심각한 자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종교행위가 그들과 하나님의 소통을 증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행위와 제물을 외면하신다고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답답하다... 너희와 도대체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늘 하나님과 잘 통한다고, 하나님의 생각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의 판단이 옳습니까?

 

그들의 문제는 들어오는 문과 나가는 문이 모두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부지런히 묻고 대답하기를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께 말해야 합니다. 세상의 신음과 고통을 들어야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은 할 수 없습니다. 안으로, 밖으로 모두 문을 닫아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기를 거절하고 있으니 그 뜻을 알 리가 없고, 하나님으로 가는 문을 닫아놓았으니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복음도, 복음적인 삶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지 못했으니 자신들의 판단과 가치로 이웃을 바라봅니다. 이웃들이 다들 참 못났습니다. 긍휼함도 없고 동정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명성교회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한 교회가 목회자 세습을 결정했습니다. 교회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젊은 목사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모든 우려를 불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그들은 목회를 세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도 소통이 되지 않았고, 세상과도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으로 만나고 전도해야 할 대상이 바로 세상인데 지금 그 세상의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그 우려를 불식하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에 대해 열려야 하고 세상에 대해 열려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세상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이것이 선교적 교회의 원형입니다.

 

2. 하나님께만 열린 사람

 

한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나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민족과 시대에 대해 뜻을 세우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가 많고 사랑이 많고 말씀이 많습니다. 하나님에 대해는 어느 정도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요나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있고, 복도 인정하고, 말씀도, 사명도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과 삶에 세상에 대해 닫혀 있습니다. 나는, 내 민족은, 내 교회는 하나님께만 열리면 좋겠습니다. 한 방향의 소통만 하겠다는 겁니다. 그는 세상으로 나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벽의 역할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의 거역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가 여기 이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성도들 또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늘 가장 가까운 마을들로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음과 사랑을 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복음적인 삶과 함께 하지 않는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성도와 교회의 복음적인 삶 속에 녹아 있습니다. 우리 시대와 이 지역 사회에 복음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는 교회와 성도는 복음적인 삶을 통해서 이웃에 대하여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고, 받은 은혜는 충분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적인 삶과 복음의 조화이며, 삶으로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기를 원하는 이웃과 교회의 중간지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복음적인 삶의 장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 이 시대와 세상에 대해 마음과 삶을 열고 복음적인 삶으로 그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3. 사람에 대해서만 열린 사람

이와는 반대로 사람에 대해 열린 마음과 삶은 있는데 하나님에 대해 막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열심당이라는 당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수난의 역사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이었고, 삶을 헌신해서 역사를 변혁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보내신 메시야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닫혀 있는 면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헌신적인 삶을 삽니다. 생명을 걸고 이웃과 역사를 위해 헌신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자신들의 열심에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역사해석과 선민의식, 제국에 대한 분노가 그들의 열심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것은 로마에 위협이 되는 정치범이었다는 뜻입니다. 열심당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헌신적이었습니까? 제자들 중에 아무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둘씩이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왜요? 그들에게는 그들의 이웃과 역사에 대한 뜨거운 헌신이 있습니다. 삶을 열고 이웃과 역사를 위해 헌신합니다. 다만 무엇이 없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열린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마지막 장면에서 성경은 좋은 그림 하나를 보여줍니다. 결국 한 편 강도는 메시야를 비로소 발견하고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다른 한편의 강도는 끝까지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습니다. 한 편 강도는 결국 자기의’(자기의)로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편의 강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닫히고 사람에게 열린 또 하나의, 우리들 모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예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엘리 제사장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가르치고 영적인 해석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엘리같은 사람입니까? 이미 신앙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더 이상 학습하려 하지 않는 사람, ... 그런지가 하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가르치려하되 배우지 않고, 일은 하는데 은혜는 없고, 충성하는데 메마른 사람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께 열려야 합니다. 마르지 않는 은혜에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가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요? 성도와 교회의 수고와 헌신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께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4. 열린 사람, 열린 교회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열린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선교팀은 1차 전도 여행의 결과로 예루살렘 공의회의 인정을 받습니다. 한 때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2차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2차 선교 여행의 계획은 1차 여행지들을 방문하고 교회를 돕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여행은 순조롭게 이뤄지는 듯합니다. 165절을 보면 교회는 더 믿음이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했다”(16:5)고 했습니다. 그런데 6절과 7절에서 그들은 특이한 경험을 합니다. 어떤 일인지, 어떤 상황인지 성경이 잘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의 영이 그 지역에서의 선교를 가로 막았습니다. 결과가 안좋았거나 그들이 예상할 수 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7절에서는 환상 중에 유럽지역에서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마게도냐 지역이라면 지금의 그리스 지역이고 유럽의 남쪽 입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계획하던 선교지와 전혀 다른 지역이면서 너무 멀고 험한 여행일 수 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이 막으시는데 저곳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릅니다. 이것이 뭘까...? 10절을 보시면 그들은 고민하고 회의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본 환상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정합니다. 유럽으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처음 만난 도시가 바로 빌립보입니다. 그곳에서 염색약을 파는 루디아를 만나게 되고, 15절을 보면 루디아의 집에서 교회가 시작됩니다. 이 교회가 바로 빌립보교회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이 교회를 사모하며 기록한 성경입니다.

 

정리해볼까요? 사도 바울과 선교팀은 하나님에 대해 민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명으로 충만했습니다.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획을 주십니다. 그들이 유럽으로 방향을 튼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첫선교지에서 루디아를 만났고, 그녀의 집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복음을 심령 깊은 곳에 품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열린 마음, 열린 삶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떤 삶을 사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저는 이런 교회, 이런 성도, 이런 목회자를 꿈꿉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대한 거룩한 뜻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때를 따라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을 만나고 지역을 만나고 시대를 만납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순종에 대해 역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좋은 건축물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웃에 대해 열린 삶을 생각하면서 이 사진을 마음에 담아두시면 좋겠습니다. (사진 1,2,3,4) 이 건물은 전라도 해남의 보길도에 있는 세연정’(洗然亭)입니다. 고산 윤선도가 세웠습니다. 그는 문과 시와 그림에 능통했었고, 건축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관직에 나갔지만 당파싸움에 휘말려서 귀양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얼마 전에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를 보셨을텐데요, 그 영화에서 인조가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당합니다. 윤선도는 조선의 임금이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하여 제주도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제주도로 가는 길에 해남을 거쳐 보길도를 지나다가 그곳의 경치에 반해서 정착했습니다. 그는 보길도에 정자와 누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가 시와 그림과 음악을 즐겼던 이 건축물을 보십시오, 기둥을 제외한 모든 벽은 문이요 창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세연정은 바람으로 들어와서 시가 되어 나가고 향기로 들어와서 음악이 되어 나가는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건축가가 해석하기를 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바람 한 점도 허투루 놓치기 싫은 마음을 건축물에 담았다고 했습니다. 건물이 자연의 흐름을 막지 않습니다. 따뜻한 봄바람과 여름의 시원한 바다냄새와 가을의 풍성한 과일이 익어가는 향기, 겨울의 차가운 바람까지도 건물이 막아서지 않습니다. 바람과 구름과 산과 바다 가운데.... 모든 문을 열었을 때 건물도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우리 삶의 모든 문을 열고 교통할 때....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과 하나되고 이웃과 하나되고 복음이 삶이 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열린 마음, 열린 삶, 열린 성도, 열린 교회.... 2018년부터 우리의 발걸음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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