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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교회 - 8. 십자가의 능력 na kim 2018-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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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 4.

 

* 본 문 : 고린도전서 117-18절 말씀

* 제 목 : 선교적 교회 - 8. 십자가의 능력

 

지난 주간에 교단 선교위원회 임원회가 있어서 시카고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예정에 없던 한인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필라에서 온 상담을 하는 목사라고 소개되고, 제가 하는 목회와 사역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저의 사역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전에 상담을 많이 할 때 자주 하던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되물었습니다. “아니... 목회자로 설교를 하고 또 상담을 하면서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럴 때 저는 수많은 예를 들면서 이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당연히 사람은 말씀과 은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목회를 해보면 알고 상담을 해보면 압니다. 사람 변하는 거, 천하가 변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변할까요? 대답하기 쉽게 물어볼까요? 예수를 믿으면 사람은 변할까요? 십자가는 사람을 변화시키나요? 나는, 우리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변화되었나요?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라는 흔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받고 누림으로 나의 성품과 가치와 판단과 선택에 어떤 구체적인 변화가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1. 십자가의 도

 

오늘 읽은 본문을 보시면 십자가의 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라고 번역된 것은 원문에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십자가를 설명하는 말씀혹은 십자가에 대한 말씀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십자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7-18)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그것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이해되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바울의 이 선언 혹은 고백에는 고린도 교회와 자신의 삶이 배경이 됩니다.

 

고린도전서를 볼 때 우리는 바울의 고민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눈에 띄는 두 가지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영성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문화였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충돌할까요? 조화될까요? 신약의 27권 중에서 바울이 기록한 편지는 14권입니다. 권수로는 신약의 절반이 넘습니다. 그의 서신서들 중에 프뉴마’, 다른 말로 하면 이라는 단어가 24번 나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만 15번 나옵니다. 또한 바울은 자랑한다는 단어를 그의 서신에서 53번 사용하는데, 고린도전서에서만 35번 나옵니다. 이 둘을 합쳐서 보십시오. 그들의 영성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교만한 영성, 서로 충돌하고 지배하려는 영성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건강한 교회였을까요?

 

영성에 관심이 많고 영적인 삶을 살려고 애쓰는데 왜 그들은 교만이라는 잘못된 결과를 만났을까요? 당시 고린도 지역이 가지고 있었던 세상의 문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도를 보실까요?(사진 1) 고린도는 서쪽으로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동쪽으로는 이집트와 동방의 상인들이 들어오는 통로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상업의 중심지였고 모든 문명이 섞이는 지역입니다. 딱 세 가지 말로 고린도의 특징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혼합입니다. 다양한 이방 종교들이 고린도에 섞여 있었고 그 영향이 교회로 흘러들었습니다. 둘째는 노예입니다. 시민은 250.000인데 노예는 350,000이었습니다. 노예는 그들을 풍요롭게 했고, 게으르게 했고, 교만하게 했습니다. 세 번째는 아프로디테라는 미의 여신입니다. 고린도 지역의 가장 높은 곳에 신전이 있었고, 수천 명의 여사제들이 신전에서 일하면서 밤이면 거리로 나와서 매춘을 했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쾌락이었습니다. 당시 평범한 고린도 여인들은 매춘을 하는 여인들과 스스로를 구별하기 위해서 머리에 수건을 썼습니다. 바울이 여자 성도들에게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권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예와 창녀들이 거리에 범람하고 이교도의 영성과 성적인 문란이 와글거리는 타락한 도시 고린도 - 안타깝게도 교회는 고린도라는 타락한 도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를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쉽게 서로를 비판하고 싸웠습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1-12) 그들은 서로 높다고, 옳다고, 서로 틀렸다고 분쟁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너희를 교만하게 하고 악하게 하는가? 너희를 겸손하게 하고 섬기게 하는가? 십자가는 너희들의 삶에서 어떤 열매로 나타나고 있는가? 너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변화되었는가?”

 

2. 복음을 들고 산을 넘다.

 

예배 전에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라는 찬양을 했었지요. 이 찬양은 이사야 52장의 말씀을 배경으로 합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52:7)

 

이사야의 말씀은 역사적이 배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와 악으로 말미암에 결국 멸망당했습니다. 바벨론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70년의 포로생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들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소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근동지방의 새로운 제국으로 등장한 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예루살렘을 재건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줄 알았는데... 더 이상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 이제 다시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구나... 그들은 저 먼 길을 거친 광야와 산을 넘고 또 넘어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사진 2) 돌아오는 길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소리 높여 외칩니다. “이제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자유다!”를 외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외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을 다스리신다!”였습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52:7) 그들의 이 외치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입니다. 세상의 어떤 세력도, 유혹과 시험도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선포한 복음을 믿으십니까? 그들의 복음은 우리의 복음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삶을, 세상을, 가정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3. 산은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보셨던 지도를 다시 보실까요? 정말 먼 거리지요. 그들은 돌아갑니다. 단순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가족이 이방 땅에서 70년을 살면서 이루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산을 넘고 광야를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내 힘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돌아가겠다고 결단하고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내 안에 있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의 과거의 죄와 악이 용서되었고,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시며, 우리는 이제 변화된 모습으로 새 이스라엘을 건설해야 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나 자신과 민족에 대해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복음이 산을 넘는 힘이 되고 광야를 건너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음을 들고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근동지방의 지형과 날씨를 생각해 보십시오, 포로 생활 70, 이제 겨우 부모와 자녀들이 정착해서 살만 한데.... 다시 그 무너진 땅으로 돌아가라고...? 실제로 많은 유대인들이 돌아가지 않기로 선택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들고 넘어야 할 산은 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넘어야 할 산은 그들의 마음에 있고, 관계에 있고, 삶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복음이 그들 안에 들어오고 그들은 복음의 눈으로 넘어야 할 산을 발견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받았습니다. 복음이 그들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소원하고 즐겼던 모든 것들은 이제 그들이 넘어야 할 산입니다. 이전의 가치관과 습관은 그들이 건너야 할 광야이며, 그들이 누리는 부와 쾌락은 넘어야 할 산이 됩니다. 고린도를 설명하는 세 단어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이교도적인 영성이요, 두 번째는 노예요, 세 번째는 아프로디테였습니다. 이 세 가지는 고린도 교회가 넘어야 할 대표적인 산들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종교는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습관처럼 살아오던 신앙을 벗어나서 오직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노예제도는 그들의 부와 권력의 원천입니다. 노예 없이는 누릴 수 없었던 부를 십자가를 붙들고 넘어서야 합니다. 아프로디테는 그들의 욕망과 쾌락의 상징입니다. 이 쾌락과 즐거움을 복음을 들고 넘어서야 합니다. 십자가는 그들이 세상을 이길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 모든 것들을 복음으로 넘어선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복음을 넘어서서 교회와 성도들의 삶으로 들어왔다는데 있습니다. 각 나라의 문화와 종교적 영향을 받았던 그들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서로를 비판하고 싸웠습니다. 교회는 분열되고, 복음은 능력을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미련한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이 편지로 기록된 고린도 교회에게 복음은 미련합니까? 능력입니까?

 

4. 십자가는 우리에게 능력인가?

 

1세기 초대교회의 모든 문제는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던지시는 모든 질문은 곧 우리를 향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문제 많은 초대교회에 사도들을 통해서 편지하게 하시고, 그 편지가 각 시대의 교회에 자신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읽혀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 허락하신 이 십자가의 도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나를 변화시키고 내 가정과 교회를 이끌어가는 능력입니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입니까?

 

혹시 진통제입니까? 우리의 죄책감과 영적인 고통을 위로하고 우리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대상임을 확인시켜주는 영적인 안정제입니까? 때로 그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고 주여~~ 하고 엎드리면 내가 필요한 영적, 심리적 안정감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까?

 

혹시 장식품입니까? 예수 믿는다고.... 여성들의 목과 귀에 대롱거리는 장식품과 같이 우리의 삶에 데롱데롱 매달려 있기는 한데, 씻을 때는 벗어서 함에 넣어두어야 하고, 때로 다른 것으로 나를 꾸밀 필요가 있을 때는 한쪽 편에 밀어두는 해묵은 장식품입니까 ?

혹시 오랫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입니까? 워낙 오래 입어서 버리기는 애매하고 입어도 별로 느낌이 없습니까? 혹은 책입니까? 읽으면 재밌고 흥미 있고 때로는 잠 오는 책... 이야기입니까? 혹은 복음은 가까이 하면 좀 위험한, 그러나 멀리할 수 없는... 당신입니까? 아주 중요하고 우리를 구원하고 나를 살리고 위로하긴 한데, 또 너무 가까이 있으면 내 삶에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기니까... “복음, 딱 거기까지!”입니까? 우리가 받고 믿고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복음은 우리들에게 귀찮고 재미없고 미련한 것입니까? 우리를 변화시켜서 새사람, 새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까?

 

이번 주일에 여러분께 중요한 질문을 말씀과 함께 드립니다. 복음은 내 삶에 능력입니까? 어떤 능력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요 바울의 능력이요 초대교회의 능력이요 어떤 성도들, 어떤 교회들의 능력입니까? 나의, 우리의 능력입니까? 다음 주일에는 구체적인 사람들과 교회의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다만 오늘 여러분과 저는 중요한 질문 앞에 서야하고 대답해야 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에 질문하셨고,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이 편지를 함께 읽는 모든 초대교회에 질문하셨고,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 초대교회를 통해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존재하는 모든 성도와 교회에 질문하십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까? 어리석고 미련한 희생입니까? 여러분과 저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주님의 희생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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