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예배 : 선교적 교회 - 15. 패전(敗戰) | na kim | 2018-04-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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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30. 정사예배 * 본 문 : 마태복음 26장 69-75절 말씀 * 제 목 : 선교적 교회 - 15. 패전(敗戰)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쓴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기독교 실존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쇼펜하우어와 함께 서양 실존주의 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착각하거나 행복을 소원할 수는 있어도 결국 불행해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모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키에르케고르는
이 병을 ’사람의 스스로에 대한 절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을 절망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절망을 극복하는 길이 있을까요?
그는 ‘더욱 절망하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한 절대적이고 처절한 절망이 필요합니다.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실존을 제대로 깨달아야 비로소 절망에서의 회복과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느끼는 절망의 수준에 따라 세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가장 위험한 절망의 상태로서 ‘자신이 절망적 상황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의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박고 조롱하는 병정들을 보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삶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장차 그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절망적 삶을 매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과 마약, 게임과 쾌락으로 자신의 절망을 위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과 성취에 자신의 절망을 묻어버립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부유하고 안락한 삶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의 깊숙한 곳, 이곳이야 말로 절망이 가장 편안하게 머무는 곳이다.”
솔로몬이 그 인생의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에 대해 처절하게 절망했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알지 못하는 절망적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보다 조금 나은 절망이 있습니다.
‘자신이 절망적 상황에 있음을 깨달아서 얻는 절망’입니다.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다만 그들은 그 절망의 이유를 외적인 세상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철학을 하고 종교를 만들며 학문을 통해서 절망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가 스승으로 여기고 평생 존경했던 쇼펜하우어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이 결국 절망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그는 거기서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습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하면서 좀 더 나은 자신,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보려고 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솔로몬처럼 마음을 헤집고 본성을 분석하고 욕망과 이성까지 부정해보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그래서 염세주의로 빠집니다.
그의 세상에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이 수준을 넘어서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희망의 가능성에 대해 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왜 절망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지를 정확하게 압니다.
스스로 어떤 희망의 가능성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절망은 신과의 관계의 단절에서 왔습니다.
사람은 이 단절의 상태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신과의 관계의 단절을 스스로 선택했지만 회복의 자격과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의 반대말을 ‘희망’이 아닌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할 때,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비로소 절망을 이기는 힘을 얻습니다.
칼빈은 개혁주의 신학의 뼈대를 세우면서 이 말을 ‘전적인 타락’과 ‘무조건적 선택’으로 해석했습니다.
사람의 절망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처절한 절망, 그 절망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는 답입니다.
그에 의하면 절망은 인생을 힘들게 만들지만, 그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답을 찾게 됩니다.
고난은 인생을 힘들게 하고 무너지게 하지만 결국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되고 깊고 의미 있는 삶의 진전을 획득하게 됩니다. 1. 패배의 시간 고난의 한 주간을 보냅니다.
저는 이 한 주간을 패배의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죄와 악에 대하여 완전하고 처절하게 패배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간입니다.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나 자신에게, 사람에게 그 어떤 가능성도, 소망도 없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일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얼마나 비겁한지 보이십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렇게 경고하셔도 두려움 앞에 마음을 잃습니다.
이렇게 부인하고 도망갈 것을 왜 굳이 예수님을 보려고 법정에까지 왔을까요?
베드로는 자신의 마음을 알까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까요?
예, 알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는 거듭거듭, 심지어 나이 어린 여종 앞에서도 처절하게, 완전하게 패배하고 맙니다.
성경은 왜 베드로의 사건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했을까요?
목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의 절망적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들에게 찾아오시고 그들을 택하시고 가르치시고 먹이시고 함께 사셨습니다.
그 정도 하면 사람이 좀 깨닫고,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이기면 좋겠는데.... 사람은 절망적입니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십자가에 혼자 버려둡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면전에서 관계를 거듭 부정합니다.
베드로의 예견된 패배는 우리들 모두의 패배입니다.
그의 패배를 통해서 우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의 통곡과 함께 우리 또한 통곡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악을 스스로 이길 수 없는 패잔병들입니다.
처절하고 철저하게 패배했습니다. 2. 두 가지 부인 베드로는 왜 이 예견된 패배를 극복할 수 없었을까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두 가지 종류의 부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부인하는 일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무엇을 부인해야 합니까?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또 하나의 부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기 부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일은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외면하고 부정하는 것이 있고, 취하고 받아들이는 것들을 결정합니다.
베드로 또한 부정할 것과 받을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삶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를 부인하고 세상이 주는 위협과 두려움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여전히 제자이고, 여전히 십자가에 가까이 와 있고, 여전히 시선은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부인에 실패하고 예수를 부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랐지만 예수님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실 때 잠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욕망에 사로잡히고, 걱정과 근심이나 분노와 염려에 사로잡히고, 자존심과 질투에 사로잡히고....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을 외면합니다.
부인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세상이 던지는 유혹과 시험 안에 던져 넣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는 일, 십자가를 지는 일에 실패합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두 가지 부인에 대해 베드로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대해 감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에게 그 사랑을 주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잠들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과 생각이 시험과 유혹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염려와 두려움이, 욕망과 일상의 반복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나는 무엇을 부인해야 하는지를 망각하고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3. 감사의 시간 하지만,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실은 이번 한 주간은 우리가 가장 깊고 높은 감사를 드리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제자들을 통해서, 그들의 비겁함과 연약함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고...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했다는 말을 듣고도 노예가 팔리는 가격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그것이 괴로워서 제사장들 앞에 돈을 던지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음을 선택했던 유다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유월절에 혹시 소요가 일어날까봐 누군가를 희생해야 하겠고... 결국 그들의 종교권력에 위협이 되고 있던 예수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는 제사장들의 악함을 통해서, 얼마 전까지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환호했지만 이제 침 뱉고 조롱하고 뺨을 때리는 군중들의 무지함을 통해서... 우리는 ‘절망’을 봅니다.
완전한 패배를 봅니다.
세상에 처절하게 패배해버린, 세상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의 조롱과 비난거리로 변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죄와 악에 대해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어떤 소망도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덤에 들어갔고, 우리는 죽었습니다.
바울이 고백합니다.
바울과 함께 성찬에 참여했던 초대교회가 함께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여러분, 왜 이 한 주간, 죽음과 절망의 시간이 감사의 시간으로 변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비로소 우리 자신에 대해 참된 절망을 배우게 되고, 그 절망을 넘어서는 신앙의 필요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 중에 났고, 죄악으로 살며, 죄악의 조롱거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우리들입니다.
제자들... 우리들입니다.
예수님께 소리 높여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주장했던 베드로는 결박당하는 주님을 뒤로 하고 도망갔고, 양심의 가책을 따라 법정에 따라온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고, 수치와 절망에 통곡했던 베드로는 갈릴리로 가서 고기를 잡습니다.
베드로의 절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자신에 대한 절망 또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감사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이렇게 처절하게 깨닫게 해주신 은혜에 있습니다.
4. 절망과 신앙 사이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위에 서야 합니다.
세상을 이길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약함을 인정합시다.
우리가 패배했습니다.
우리가 패전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조차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외롭게 죽임당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랍니다.
더 겸손하겠습니다.
더 엎드리겠습니다.
더욱 낮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나를 맡기고 성령 하나님 의지하여 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자 결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때 핍박자였던 사도 바울은 복음을 만나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함께 지는 일에 헌신합니다.
그러나 삶은 늘 어렵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고린도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5-58) 죄와 사망을 이기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견실하여 흔들리지 않아야겠습니다. 나에 대해 절망하는 일,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며 성령의 손을 붙드는 일 - 우리의 수고와 헌신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절망을 이기는 길은 신앙 밖에는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부활의 주님, 그 은혜에 더욱 의지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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