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6. 제2기 비전- 5. 다음 세대를 향한 꿈(엡 6:4) | na kim | 2011-09-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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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6.
* 본 문 : 에베소서 6장 4절 말씀 * 제 목 : 5. 다음 세대를 향한 꿈
얼마 전 한국 총회 선교부에 의미 있는 요청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가 한국 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100년 전 조선의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선교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100년이 지난 후 도리어 한국 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드릴까요? 저희 교단의 총회 선교부에는 미국으로 파송된 선교사가 몇 있습니다. 그 중 한 분을 지난 주에 있었던 ‘교단 발전을 위한 포럼’에서 만나고 왔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한국교회가 미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미 미국 교회가 그들의 뿌리가 되고 동력이 되었던 청교도 신앙을 잃었고 다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신앙을 정립해야 할 시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교단 혹은 넓게 한국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지역 가운데 우리들에게 익숙한 지명들이 있습니다. 에베소, 안디옥, 데살로니가, 빌립보 등이 그 지역들입니다.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그런 지역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그곳은 성경이 기록된 곳이며 초대교회가 시작된 곳입니다. 왜 2000년이 지난 지금,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그곳이 오히려 피선교지가 되고, 가장 늦게 복음을 받았던 한국으로부터 오히려 선교사를 파송받게 되었을까요?
지난 주 우리는 중국 연변과 북한에서 사역하고 있는 한 선교사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선교는 오늘날 교회의 지상 명령이자 과제입니다. 저는 같은 질문을 여러분께 다시 드립니다. 100년 전 선교에 성공했던 스코틀랜드 교회, 2000년 전 선교에 헌신했던 초대교회는 오늘날 왜 사라지고 무너지고 말았을까요? 왜 연약해져서 오히려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을까요?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는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지상명령이 선포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다'는 당시 교회가 있던 곳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 끝'은 그들이 나가고 도전하고 헌신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는 내 삶의 터전, 내 가족, 내 자녀와 이웃에 관한 사명이라면, 다른 하나는 아직 복음이 선포되지 않은 곳, 아직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명입니다. 굳이 이 둘을 나누자면 내 삶 속에서 가족과 자녀,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명은 수직적 선교로, 복음을 듣지 못한 먼 지역과 사람들에 대한 선교를 수평적 선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 선교에 성공한 역사적 교회들이 오늘날 연약해지거나 사라지는가 물었습니다. 답을 아시겠습니까? 예, 그것은 바로 수평적 선교에 성공한 교회들이 그 믿음과 전통을 수직적으로 전승하고 가르치고 나누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1.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몇 년 전, 한 부부가 상담을 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아버지의 고민은 아들이 자신을 너무 닮았다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아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11학년된 아들이 흑인 및 중국 친구 4명을 때려서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1:4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지요. 승리를 거둔 후 집에 돌아왔는데 손이 퉁퉁 붓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손등에 있는 뼈에 심각한 손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몰래 애빙턴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결국 병원에서 집으로 연락이 갔고, 부모님의 요청으로 제가 병원으로 갔습니다. 왜 싸웠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그럴 때는 싸우라고 했다는 겁니다. 알고 보니 그 아버지는 남자다운 것을 꽤 좋아하는 분이었습니다. 또 정의를 지나치게 사랑하셔서 가끔 어른들끼리 싸우기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어릴 때 남자는 싸울 줄 알아야 한다고 싸움이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싸움이 있던 날 한국 친구 중 하나가 약하다는 이유로 흑인, 중국인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4:1의 싸움을 한 것입니다. 결과는 심각했습니다. 자기 병원비뿐만 아니라 4명의 병원비도 물어야 했고, 학교에서도 정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전혀 반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했다는 것이지요. 남자는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이 자기를 보는 눈빛이 마음에 든다는 겁니다. 너무 심각한 부모, 너무 즐거운 아들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문제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분별력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무엇을 전승해야 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역시 분별력에 대해 말합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여러분 중에 일부러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아마도 자녀가 화를 내고 날뛰는 모습 보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런 상황을 경험합니다. 아버지 학교 혹은 어머니 학교에서 각자에게 있는 상처를 나누다보면, 정말 놀랍게도 우리들에게 가장 큰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부모입니다. 물론 부모가 내게 사랑과 은혜를 줬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만큼 부모는 자녀를 분노하게 하고, 그 은혜만큼 부모는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부모가 자녀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부모가 자녀에 대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것, 자신의 성품, 자신의 판단과 기준이 아닌 ‘주님의 교육과 훈계’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실 이 자녀들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지 말아야 할 것, 즉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은 언제 발생하게 될까요? 예, 부모가 자신의 가진 기질과 성품, 가치관과 욕망으로 자녀를 양육하려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사용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자랄 것이요, 자신의 것을 사용하면 분노하고 격동하는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 여러분! 자녀를 양육하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분별력일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키울 것인가? 무엇을 심어줄 것인가? 무엇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무엇은 피해야 하는지를 알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전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자녀에 대해 가장 말 할 것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야곱일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계승되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야곱을 거쳐 아들들에게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그 가정에 정하신 것은 변함없고 흔들림없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정에는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을 거의 죽일 뻔했습니다. 죽이는 대신 노예로 팔고 말았습니다. 형들이 동생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이유로 제거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전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분노였습니다. 사실 분노를 전한다기보다 분노하게 한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분별 없는 삶으로 말미암아 형제 요셉과 아버지와 그리고 하나님에게까지 심각한 분노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 분노가 그들의 삶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고, 회개와 돌이킴이 없는 길로 몰아갔습니다.
여러분! 혹 여러분은 자녀들이 이것만은 본받지 말았으면...하는 것은 없습니까? 혹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가 당신을 꼭 닮았다는 말을 공격적으로 들은 일은 없습니까? 저요...? 물론 있습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말씀드린 상담했던 가정 또한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과거에 싸움 잘하고 좀 거칠어도 용납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저 역시 참 자주 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싸우게 되면 “사나이답다!”고 인정해 줄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 아버지는 ‘남자다움’에 대해 자신이 가르치고 보여준 것을 당시에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자녀는 그 맛을 즐기고 있었으니까요.... 또 혹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슴 속에 묻어두 었던 상처를 자녀에게 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여러분은 이민 1세대로서 미국 사회에 대해 느꼈던 열등감이나 minority feeling을 자녀들이 좀 다른 방식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일은 없습니까?
분별하셔야 합니다. 전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용하면 그 결과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도 이삭에게 다른 왕 앞에 아내를 버리는 비겁함을 물려줬습니다. 우리는 원래 비겁하고 연약하며 조급하고 욕심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물려줄 때 자녀는 우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3. 꼭 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대상 28장은 성전을 건축하려던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모든 신하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대상 28:3) 그리고 그는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세울 것을 선포하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찌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다윗의 아들에 대한 유언의 핵심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더 큰 왕이 되라고 유언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나라를 정복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부탁, 그것은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중심을 잘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들에게 나라를 물려주는 것보다, 왕권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을 주려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과의 견고한 관계, 다윗은 솔로몬이 바로 이것 안에서 나라를 다스리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할지를 정확하게 아는 아버지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교육하되 우리에게 있는 생각과 기질과 가치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바른 줄 알았는데 나의 욕심에 오염되어 있고, 정당한 줄 알았는데 상처 투성이며,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에게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뛰어는 것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양과 훈계,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자녀에게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입니다.
4. 다음 세대를 향한 꿈을 품읍시다.
혹 여러분, 오늘 말씀에 오해가 없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자녀를 말씀으로 잘 키웁시다’ 정도로 이해하신다면 만족할만한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부모입니다. 교회에서 부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예수 믿는 부모입니다. 내 자녀, 내 가정의 문제로만 보지 말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할 대상은 오늘날 우리가 지역 사회 속에 만나는 모든 사람입니다. 특히 이 지역 사회에서 자라나는 우리 자녀들의 세대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영적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들의 하나님’, 우리가 만나고 경험하고 믿고 순종하는 하나님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어리석어서 다음 세대에 상처와 아픔을 남깁니다. 탐욕과 거짓을 남깁니다. 치욕스러운 역사와 부끄러운 기록을 남깁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러분과 저는 ‘우리의 하나님’을 전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하나님은 다윗이 말했던 ‘아버지의 하나님’과 같은 개념입니다. 그의 삶 속에서 든든히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을 아들에게 전한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와 교제하면서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은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전하는 것, 선교입니다. 우리는 이 선교의 개념에 대해 오랜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직적 선교, 즉 세대와 세대에 이어가는 복음의 전승이 없는 수평적 선교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흔적 없이 사라진 초대교회처럼, 이름만 남은 유럽 교회처럼, 생명력을 잃고 방황하는 미국교회처럼 세계에 나아가 선교하되 자녀들을, 다음 세대를 불신자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선교에 점점 눈을 뜨고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을 향한 나눔과 섬김을 결단하는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선교의 분야가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향한 꿈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자녀들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역 사회 속에서 그 하나님을 나누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 그 하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처세술이 아닌, 삶의 지혜가 아닌, 우리의 소원과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교양과 훈계’를 전하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흔적들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생명과 사랑을 공급하는 진리의 샘터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다음 세대를 가르치고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헌신하고 수고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이 되고, 우리들이 섬기는 다음 세대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세대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놀라운 은혜와 복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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