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3. 2기 비전 - 6.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2) | na kim | 2011-09-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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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13.
* 본 문 : 히 12:1-2 * 제 목 : 2기 비전 - 6. 예수를 바라보자.
저의 아버님은 농담을 좋아하시고 잘 하셨습니다. 그 중에 가끔 아버님과 택시를 타면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애매한 상황이 발생하곤 했습니다. 택시를 타면 기사님이 물으십니다. “손님, 어디로 갈까요?” 아버님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예, 앞으로 갑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백이면 백 기사님들은 “예~(↓) 예?(↑) 어디요?”라고 다시 묻습니다. 아버님은 다시 진지하게 말씀하시지요. “뒤로 가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앞으로 가시지요.” 처음에 이 농담을 접했을 때 ‘야... 좀 웃긴데...’ 라고 생각했었는데, 매번 듣다보니 나중에는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요즘 아버님이 하시던 그 농담을 가일이한테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가일이가 제게 묻습니다. “아빠, 우리 지금 어디가는거야?” “응, 앞으로 가?” “뭐라고?” “짜샤, 지금 앞으로 가고 있잖아, 뒤로 갈까?” 그러면 가일이는 “아빠, 쫌(↑)!” 라고는 짜증을 냅니다. 속으로 흐흐흐... 웃으면서 무척 재미있어하곤 합니다.
예전에 전도의 방법 중 하나로 사용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위 실존주의적 전도방법으로 불렸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대학 교정에서 전도를 합니다. 학생 하나가 허급지급 학교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학생을 붙들고 묻습니다.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예, 강의실로 가는데요?” “강의를 들어서 뭐하시게요?” “좋은 성적 받아야지요.” “왜 좋은 성적을 받기를 원하시죠?”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가야하니까요?” “왜 좋은 직장에 가야되죠?” “먹고 살아야죠... 예쁜 신부 만나서 결혼도 하야하구요.” “결혼해서 뭐하실건가요?” “애도 낳고 행복하게 살아야죠.” “그래서 그게 끝인가요?” “아니... 뭐 애들 시집 장가보내고 손주도 보고...” “그후에는요...” “뭐...늙어가고...죽겠지요.” “그래요? 그러면 지금 당신은 지금 죽기위해서 이렇게 허겁지겁 올라가고 있는 건가요?” 그리고 혼란스러워하는 그 사람에게 참된 가치있는 인생을 위한 새로운 길에 대해 설명한다는 겁니다.
이야기가 다소 억지스럽긴 하지만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는 한데, 이 열심 끝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가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를 고민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두 다리와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의 눈은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1.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자,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타고 있는 택시의 목적지는 무엇입니까? 날마다 쉴 새 없이 옷을 다리고 행어에 거느라 손목과 팔목 관절에 염증이 생긴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지는 무엇입니까? 날마다 쪼그리고 앉아서 다른 사람의 손톱과 발톱을 갈고 있는 여러분의 삶의 참된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얼굴색과 언어의 색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친 하루하루를 보내는 여러분은 왜? 라고 하는 질문에 무엇이라 말하시겠습니까? 이 추운 겨울에도 칼바람을 맞으며 건물에 매달려 있는 여러분은 정작 인생의 마지막에 무엇을 원하십니까? 심지어 여러분! 우리는 지금 모여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하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한 교회가 한 지역 사회 속에 세워지고 성장하는 일은 참 어렵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필라 근교의 한인 사회 속에 서게 되고 예배당을 얻고 성장하는 일은 참으로 감사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교회는 분명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성장하게 될 것이고, 또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성장의 과정과 속도는 우리의 헌신과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개인과 가정의 관점에서건, 교회와 공동체의 관점에서건 우리의 현재의 상황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손과 발이 부르트도록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할 때, 내가 오늘 함께 예배하며 여러 가지 모습으로 헌신하고 있다고 할 때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이고, 목적은 무엇인지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2기 사역의 비전을 나누는 것은 오늘로 마치려고 하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가장 우선적이면서도 중요한 원칙 하나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읽은 대로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가 되며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되는 것이면서도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너무 쉽게 놓치고 있는 것, 모두가 다 알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그 반대로 쉽게 가고 마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초대교회는 우리 신앙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이 원칙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예, 바로 “예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2. 세 가지 이유
오늘 히브리서 본문은 교회가 왜 예수를 바라보는 일을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권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니던 학생들의 필독도서였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라는 책의 저자인 한완상 교수는 최근 ‘예수 없는 예수교회’라는 책을 썼습니다. 내용은 아마 여러분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대형 교회의 세습에서부터 교회 성장학이 가진 문제들, 그리고 맘모니즘이라 불리는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현대교회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예수가 없는 예수 교회, 왜 그럴까요? 바로 교회와 성도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예수 때문에 교회로 모였지만 그 속에서 사람의 만족과 성취에 방향을 맞춰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민 교회 또한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수많은 이민 교회가 예수가 아닌 직분과 건축의 문제로 넘어지고 다시 세워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는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입니다. 나의 소원과 성취가 아닌 예수의 뜻과 비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자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변화의 과정에 함께 하십니다.
두 번째 우리가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도 2절에 연이어 나타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온전케 하신다’는 표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부족함과 연약함에서 ‘온전한 성도의 인격’으로 성장시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의지할 때 성령 안에서 참된 변화의 과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 번째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맞추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절 하반절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다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예,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을준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예,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곳,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 주님과 영원한 교제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이므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그곳을 준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시므로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며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버릴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버릴 것과 채울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버릴 것은 무엇일까요?
12장 1절에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정말 무겁고 힘든 시험은 무엇입니까? 혹은 얽매이기 쉬운, 즉 벗어날 수 없는 유혹은 과연 무엇입니까?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시험과 유혹’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이 두 단어를 정의해봅시다. 시험은 다소 우리들에게 힘이 들 수 있습니다. 시련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인되신 예수님만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세상으로부터 말미암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제대로 믿고 싶은데 그런 여러분들의 소망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믿음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사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시련과 고난보다 더 어렵고 힘이 든 것은 우리가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시험 즉, 유혹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벗어나고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어떤 것들이 이 영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협력을 깨뜨립니다. 곧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이것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과거의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위로와 사랑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나의 상처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계속 분노하고 계속 상처 속에 살아갑니다. 욕심일 수 있습니다. 굳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부도덕한 일로 부를 축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열심히 모을 뿐입니다. 그것이 있어야 안정감이 생기고 그것 때문에 삶의 보람도 느낍니다. 기분도 좋아집니다. 날마다 성실하게 일하는 이유가 내 삶의 성취에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믿음과 구원 또한 내가 성취해야 할 일 중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사람에 대한 의지와 기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하겠는데, 자꾸 사람이 보입니다. 사람에 대한 지나친 의지와 기대,. 그에 따른 실망과 분노가 우리의 믿음에 얼마나 큰 상처와 시련을 주는지 모릅니다. 이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겠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을 방해하는 이러한 짐들을 등에 지고 신앙의 여정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짐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시선을 가로막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4. 인내로 경주에 임합시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본문이 우리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영적인 덕목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여정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덕목, 그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것이 바로 ‘인내’라고 말합니다. 1절 하반절에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마치 경기장을 달리는 경주와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힘들다고 멈출 수 없습니다. 기분 나쁘다고 다른 트랙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주변 선수들이 성가시게 한다고 싸울 수도 없습니다. 오직 모든 것에 대하여 오래 참으면서 우리는 이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이 드신다구요? 도저히 끝까지 인내할 자신이 없다구요? 자꾸만 다른 사람들이 성가시게 한다구요? 도저히 내가 지고 있는 짐을 벗어버릴 수가 없다구요? 히브라서의 기자는 그런 성도들의 연약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가지 우리의 인내를 돕는 응원군이 있다고 말합니다. 힘이 들 때마다 그것들을 보면서 힘과 위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먼저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오직 예수만 바라보며 죽음도 기꺼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로 여기며 감사함으로 그 길을 갔습니다. 또한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되신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기쁨으로 참으셨습니다. 성도와 교회를 구름과 같이 둘러싸고 있는 믿음의 증인들, 성도와 교회를 늘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위하여 기도하시는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 -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할 수 있도록 힘과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다 채울 수 없다고 판단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또 다른 약속을 하나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1:6의 말씀을 봅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그렇습니다. 성경은 또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믿음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를 위한 상을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주의하실 것은 이 부분에 대한 한국 성경의 번역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는 부분 말입니다. 이것이 NIV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he rewards those who earnestly seek him.’ KJV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he is a rewarder of them that diligently seek him.’ 무엇이 빠졌습니까? 예, 부사 earnestly와 diligently가 빠졌습니다. ‘열심히, 신실하게, 성실하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찾되 변치 않고 성실하고 진실되게 찾는 성도와 교회에는 우리가 감히 예상할 수도 없는 크고 놀라운 상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성도들의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나타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직 예수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상을 준비하고 기다라고 계신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며 그 상으로 말미암아 더욱 크게 영광돌리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 성령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고 도우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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