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0. 나의 마지막 선택을 위하여(창 40:9-15) | na kim | 2011-09-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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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20.
* 본 문 : 창세기 40장 9-15절 말씀 * 제 목 : 나의 마지막 선택을 위하여
127시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애런 랠스턴이라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그는 산을 자기 집처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영화는 그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즐겼던 유타주에 있는 Blue Zone Canyon을 산악자전거를 타고 혼자 누비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사진 1) 혼자서 계곡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사진 2) 그런데 너무 편하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그는 조난을 당합니다.(16:00~17:03) 협곡에 미끌어지면서 함께 떨어진 작은 바위에 팔목이 짓눌리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협곡에 낀 바위와 팔목은 빠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먼저 자신이 가진 것을 점검합니다. 산악용 로프와 중국산 칼, 그리고 500ml의 물, 전등과 캠코드가 전부입니다.(사진 3) 처음에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사용해서 상황을 벗어나려 합니다. 칼을 써서 바위에 틈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줄을 써서 움직여 보려고도 합니다.(사진 4) 결국 자신이 처한 환경은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음 그는 소리를 지릅니다. 도와달라고, 누가 없냐고 죽을 힘을 다해 외칩니다. 아무도 그 외침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꿈을 꿉니다. 행복했던 꿈과 절망적인 꿈을 함께 꿉니다. 시간은 점점 지나갑니다. 힘이 빠지고 물이 다 떨어져 갑니다. 그는 결국 절망하고 맙니다. 캠코더에 자신의 유언을 남깁니다. 누가 이 캠코더를 발견하면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해달라고 말합니다.
지쳐서 잠 들었던 그가 화들짝 깨어납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판단을 합니다. 바위에 낀 자신의 팔을 보니 이미 오랫동안 피가 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남은 힘을 써서 뼈를 부수고 무딘 칼로 자신의 팔을 자르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그곳에 한쪽 팔을 남겨두고 자유를 얻습니다.(사진 5) 그가 조난을 당한 후 팔을 포기하고 구조되기까지의 시간이 영화의 제목인 ‘127시간’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우리 인생이 짧은 시간 안에 집약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가장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 잘 안다고 믿고 있는 것에서 반복해서 실수를 저지르거나 어려움에 빠집니다. 자신 있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위기를 만나면 먼저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해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위기는 참된 위기가 아닙니다. 위기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우리는 대부분 도움을 요청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환경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효과가 없을 때 우리는 결국 절망합니다. 절망와 낙심 - 고난과 위기 속에 우리가 너무 쉽게 빠지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다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노와 낙심, 절망 밖에는 할 것이 없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다음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라면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서, 아무런 내적인 힘과 외적인 도움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내 팔목이 지금 문제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애런은 자신의 팔목을 내려놓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비로소 자유는 얻을 수 있었습니다.
1. 그의 외침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상황을 아시겠습니까? 조금 설명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의 11번째 아들이었던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종으로 팔려왔습니다. 군대 장관 보디발의 집에서 시종으로 있었는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번도 생각한 적 없었던 고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가 팔려오던 때가 17세였습니다. 나중에 총리 대신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 나이가 30세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종으로 살고 감옥에 죄수로 살았던 시기가 약 13년쯤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총리대신이 되기 2년 전의 상황, 즉 그의 삶에 고난이 찾아온지 10년이 이미 지난 상황이었습니다.
성경은 사실 요셉에 대해 꽤 후한 편입니다. 요셉의 단점이 거의 노출되지 않습니다. 그는 고난을 넉넉히 믿음으로 이겨내고 동족을 구원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고, 예수님의 사역을 예표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요셉의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아마도 요셉은 어려서부터 상처가 많았을 것입니다. 어려서 어머니 라헬을 잃었습니다. 야곱의 다른 아내들이 아들들에게 어머니 노릇을 할 때 야곱은 어머니 없는 요셉을 불쌍히 여겨 많은 사랑을 주었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자랑하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꿈 꾼 일을 자랑하다가 더 큰 미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어려서부터 말하는 것에 대한 조심성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렇게 길고 큰 고난을 당했던 요셉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만한 표현한 일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비로소 요셉의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한 이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셉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창 40:15)
그리고 14절에서 요셉은 반짝 희망을 품습니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창 40:14)
그는 지금 두 가지를 외치고 있습니다. 첫째, 나는 억울한 사람입니다. 나는 이런 고난을 당할만한 잘못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억울함과 분노가 있습니다. 다만 숨기고 있을 뿐입니다. 또 하나는 누가 제발 나를 건져달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은 이방인의 땅에 끌려와서 그가 만난 첫 번째 빛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빛을 붙들려고 합니다. 꿈을 해석해주고, 그 꿈대로 되면 나를 좀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침묵
요셉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은 그가 당한 고난과 고통의 깊이 때문입니다. 누구인들 요셉과 같은 일을 당한다면 그런 생각과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다 당했습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습니다. 형들에게 외면당하고 미움을 받습니다. 형들의 행동을 볼 때 아마도 보이지 않는 폭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폭력의 끝에 형들은 요셉을 때려서 구덩이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이번에는 노예로 팔렸습니다. 종으로 산 것도 억울한데 누명까지 썼습니다. 감옥에 죄수가 되어 갇혔습니다.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감옥살이, 언제 끝날지, 또 어떤 고난이 다가올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은 누구나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요셉 또한 같은 고민과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날을 밤이 새도록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입니까? 왜 나는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얼마 전에 저는 50대 초반의 한 여집사님을 상담하는 중에 정말 크게 당황한 일이 있습니다. 두 시간 반을 상담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만나서 인사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것 한 10분, 마칠 때 인사하고 다음 상담을 위한 준비 한 10분을 제외하고는 두 시간 넘게 울기만 하셨습니다. 그것도 조용히 눈물을 닦는 울음이 아니라 제가 당황하고 민망할만큼 엉엉엉 우는 울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사님, 제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로 시작한 울음이었는데, 나중에는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로 넘어가서 “하나님, 제발요. 너무 무서워요. 너무 힘들어요. 나 좀 어떻게 해주세요...”로 넘어가는... 정말 듣고만 있어도 몸이 떨리는 울음을 우셨습니다. 울음만 듣다가 끝난 상담을 마치고 조용히 앉아서 생각을 좀 정리했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면서, 하나님은 그 울음에 대해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13년을 침묵하셨습니다. 그에게 감옥에서 잠시 두 관원의 꿈에 대한 지혜를 주신 것 외에는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결국은 견디다 못해 자기 안에 있던 남은 모든 생각을 털어놓을 때까지도 어떤 답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억울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도와서 이 고난을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고난이 계속 될 때는 견고히 자신의 믿음을 지키던 요셉이 아주 잠간 희미한 희망이 보이자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3. 마지막 선택, 내려놓음
그때로부터 2년이 지납니다. 요셉이 붙들었던 두 가지, ‘자기의(自己義)와 사람에 대한 기대’는 처절하게 무너졌습니다.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의 말대로 복직되었지만 요셉을 까맣게 잊습니다. 요셉의 마음도 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더 이상 탈 것이 없는 마음이 되었을 때 감옥 밖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가 꿈을 꾸고 꿈을 해석할 사람을 찾았고, 비로소 술 맞은 관원은 자신의 꿈을 해석했던 요셉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다시 127시간이라는 영화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너무나 익숙한 곳에서 고난을 당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사용해봤습니다. 그 고난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고난이 점점 깊어집니다. 어느 순간의 점을 넘어서면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그는 결정합니다. 그의 결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무엇을 끝까지 움켜쥘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내려놓지 않으면 담을 수 없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애런은 팔을 내려놓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언제 끝날지, 어떤 다른 고난이 다가올지 모르는 세월을 살면서 ‘자기의(自己義)와 사람에 대한 기대’를 드디어 내려놓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는 결코 자신을 구할 수 없음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되었고, 이 모든 고난의 끝에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손을 잡고 걷다, 내 안에 계신...
성도 여러분! 요셉은 결국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것일까요? 못만난 것일까요? 아마도 요셉은 총리 대신이 되고도 자신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창세기 50장에서 요셉이 고백하는 자기 인생에 대한 묵상을 보십시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여러분! 그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났을까요? 예, 만났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중에 이미 그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한 순간도 그를 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주시는 방법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방식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동행하기도 합니다. 요셉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붙들기를 원했던 자기의가 무너졌던 2년, 사람에 대한 마지막 기대가 처절하게 짓밟혔던 그 2년 동안에도 하나님은 그의 안에서 늘 그의 손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고, 역사를 움직이시고 사회를 움직이셔서 그 일을 이뤄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고백을 통해 그가 결국 하나님이 자신을 만나시고 동행하셨음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고백은 크게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당신들은 나를 해하여 하였으나, 2)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3)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해하려 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울고 부르짖고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신다고 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계시지 않던 그 하나님이 이미 내 안에, 내 삶 속에 역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미 내 안에,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의 손을 든든히 붙잡아야 합니다. 네게 있는 것을 아무리 붙잡아봐도 나를 더욱 절망하게 할 뿐입니다. 사람에게 아무리 기대어봐도 나를 더욱 낙심하게 할 뿐입니다. 무엇을 놓고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참된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나를 놓고, 사람을 놓고, 하나님을 붙잡읍시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것, 내가 볼 수 없는 사람의 역사를 하나님은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그저 의미없는 고난인 줄로 알았는데 내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일에 쓰임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내가, 세상이 나를 치면 쓰러지는 내가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쓰임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의 고백은 자신의 삶에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감사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참으로 중요한 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내 뜻대로 안되는 일들이 너무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지혜, 그것은 바로 내가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 내 뜻과 의지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기로 결정하는 것,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가운데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돕고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뻗은 손을 거두고, 내 안에 나와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 - 요셉의 선택이었고, 우리들의 선택이어야 합니다. 이 선택의 아름다운 지혜가 초대교회와 가정과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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