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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2. 정사예배/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눅 23:39-43) na kim 201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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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22. 정사 예배 설교

* 본 문 : 눅 23:39-43

* 제 목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어제 포도나무 성경 공부를 하면서 고통과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너무 쉽게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의 현재의 삶의 고난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만든 선택의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함께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택의 결과가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결과로서의 오늘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고난에 얽매이거나 허우적거리는 삶이 아니라, 고난의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성숙한 신앙과 인격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자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포도나무 회원들이 집으로 가고 난 다음 혼자 사무실에 앉아서 오늘 나눌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고통과 고난뿐만 아니라 신앙은 결국 우리의 선택의 연속이자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기까지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선택하며 삽니다.

1. 선택하는 인생

미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악명으로 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존 윌크스 부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남부 출신의 배우였고, 인종차별주의자였습니다. 남북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나고,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그가 공연하던 워싱턴DC의 포드 극장에 온다는 것을 알고는 일당들을 모아 암살을 계획합니다. 1865년 4월 14일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의 머리에 총을 쏩니다. 그리고 10일 뒤 자신도 암살당한 채 시체로 발견됩니다.

에드윈 토마스 부스는 존 윌크스 부스의 형제입니다. 그 역시 유명한 연극 배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의 범행이 부끄러워서 무대를 떠납니다. 하루는 그가 기차를 타기 위해 뉴저지의 한 기차역에 갔습니다. 그때,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은 한 청년이 군중에게 떠밀려서 기차와 승강장 사이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에드윈은 즉각 선로에 한 발을 내려 놓고 그 사람을 붙들어 살려 냈습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청년을 에드윈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청년은 유명한 배우였던 에드윈을 알아봤습니다.

몇 주가 지난 후 에드윈은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그 편지는 그랜트 장군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 링컨의 아들인 로버트 토드 링컨이었습니다. 그랜트 장군은 에드윈에게 암살당한 대통령의 아들을 구해 준 일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에드윈은 그 편지를 죽는 날까지 가슴에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물론 무대에 복귀했습니다.

두 형제 중 한 사람은 아버지를 죽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들을 살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두 형제 중 한 사람은 살인 했을 뿐만 아니라 살인을 당했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람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같고, 직업도 같고, 열정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가치와 길을 선택했고, 그 결과를 그들의 삶으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2. 두 사람의 강도

환경이 같다고 해서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같다고 해서 같은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선택’하는 능력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 결과가 만들어내는 삶의 일정한 패러다임 속에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을 blame 할 수 없고, 환경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기로 한 이상 다른 사람의 좋은 영향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나의 선택이요, 다른 사람의 악한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 또한 나의 선택의 연장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두 사람을 만납니다. 그 두 사람은 강도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골고다 언덕에서의 공개 사형은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잔혹함을 보여주기 위한 식민 통치 정책의 일환이었으므로 그들은 정치범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로마에 반대하는 유대 독립 운동을 하는 열심당원들이 많았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문에서 읽는 대로 그들은 죽기 전까지 중요한 선택을 합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다른 선택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27장 38-44절에 보면 그들은 처음에는 같은 선택을 합니다.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38-44)

그들은 많은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아니 원망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를 왜 구원하지 않는가 하는 원망이 있었습니다. 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지 못하는가? 왜 배고프고 헐벗은 우리 민족을 구하지 않는가? 그들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들은 같은 이유로 체포당했고, 같은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같은 날 같은 방식의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 대해 같은 마음으로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갑니다. 그들은 점점 죽어갑니다. 이제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들은 더 이상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선택의 능력이나 자격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상황으로 갈 것입니다.

3. 왜 두 사람이었을까?

여기서 제가 여러분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아니 한번 상상해보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유대법으로는 종교법에 의해서 사형을 당하는 것이지만, 로마법으로는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두 강도 또한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로마에 반대했던 열심당원들이 한 두 사람도 아닐 것이고,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도 많았을 것인데, 왜 하필이면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두 사람을 세웠을까요? 왜 네 개, 열 개, 스무 개가 아니라 좌우에 두 개의 십자가였을까요? 또한 예수님의 자리가 왜 오른쪽 끝, 혹은 왼쪽 끝이 아닌 가운데였을까요? 정말 우연일 수도 있지만, 저는 갈보리 산 골고다 언덕의 세 십자가가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믿음은 곳 선택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을 수도 있고, 모래 위에 집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거나 혹 재물을 섬기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양에 속할 수도 있고, 염소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한 형벌의 삶을 삽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고,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길이 있고, 거역하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 있고, 고민하며 돌아설 수 있습니다. 다윗이 될 수도 있고, 사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될 수도 있고, 롯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의 강도는 그 마지막에 새로운 선택을 하고, 다른 한편의 강도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생각과 선택을 고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그 선택의 연장에서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회개한 한편의 강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살면서 많은 선택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의 선택의 결과로 십자가의 형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릴 만큼 좋지 못한 선택을 해 온 사람입니다. 그는 사상을 잘못 선택했을 수 있고, 친구를 잘못 선택했을 수 있고, 행동을 잘못 선택했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선택한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다른 강도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실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납니다. 그는 다른 선택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선택의 짧은 순간이 주어졌을 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최소의 진실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의 죄의 선택의 결과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함께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아무런 죄가 없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죄와 악의 선택의 결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마지막 선택에서 그는 승리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의 마지막 선택, 진리에 대한 선택, 그의 마음에 울리는 진실의 소리에 따르기로 한 선택, 예수에 대한 선택은 그의 이전에 모든 선택을 지불하고도 남는 가장 지혜롭고 가치 있는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4. 선택의 자유를 주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선택하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선택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내 의지와 내 생각, 내 기질과 내 성품의 모든 가능성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옳고 바른 선택을 해주시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가룟 유다도 없고, 그러면 가인도 없고,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돌아서는 제자들도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걸음 물러서지 않으시고 그의 선택과 결정을 지키셨습니다. 모든 시험과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우리에게도 선택의 기회와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한 구원의 선택을 하시기 전에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선택의 기회도,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세상 모든 사람이 걷는 편하고 쉬운 길 옆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작은 길을 두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열고 들어가는 죄와 죽음의 큰 문 옆에 생명으로 가는 좁은 문을 두셨습니다. 평생을 잘못 선택하고 살아왔지만 예수의 십자가의 한 쪽 편에 매달렸던 한 강도는 죽음의 문턱에서 비로소 그 작은 문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을 두드립니다. 그에게 선택의 기회와 가능성이 제시되었다는 것 - 이것이야 말로 가장 큰 은혜이자 사랑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일 모든 것을 대신 선택해주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지 나의 구원은 아닙니다. 우리 앞에 생명과 구원의 좁은 문으로 계신 주님은 우리들에 그 문은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그 구원이 우리의 구원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많은 것들 때문에 눈물 흘리며 아파하며 삽니다.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되었고, 어떤 사람은 기아와 고통에 허덕이는 나라에서 단 한번도 행복한 웃음을 짓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로 시련과 고통이 반복해서 밀려들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와 악의 희생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면서 참으로 많은 잘못된 선택들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그때 그 선택을 바꿀 수 있다면...”하고 후회하며 삽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정말 중요하고 아름다운 선택의 기회를 열어주십니다. 나의 그동안의 모든 불평등한 삶의 조건들, 내가 원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도 당해왔던 아픔들, 나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낸 상처와 고통들 - 그 모든 결과들로 말미암아 처절하게 고통 당하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과거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우리들에게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한 번의 선택은 이전에 있었던 모든 불평들은 한꺼번에 해소할 수 있고, 이전에 있었던 모든 잘못된 선택의 과정을 한꺼번에 되갚을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한편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강도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허락하신 마지막 선택의 아름다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결과로 죽어가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 주님의 생명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주님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만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선택, 마지막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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