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24. 부활주일/부활을 경험하는 삶(사 50:10) | na kim | 2011-09-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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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24. 부활주일 설교
* 본 문 : 이사야 50장 10절 말씀 * 제 목 : 부활을 경험하는 삶
2주 전 수요일에 나눈 말씀이 있습니다. ‘영적 훈련과 성장’에 대한 8번째 성경 공부였고, 내용은 영적인 성장과 홀로서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16세기 수도사였던 ‘십자가의 요한’이 쓴 글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함에 대해 4가지의 단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하는 사람의 1단계는 자신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단계입니다. 많이 기도하고 많이 성경을 읽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 다가선다고 느끼는 단계를 말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2번째 단계는 ‘말하는 단계’에서 ‘듣는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입니다. 어린 아이의 성장 과정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세 된 아이가 부모의 말을 경청하고 순종할 수 있을까요? 어릴 때는 무조건 요구하고 떼쓰고 웁니다. 하지만 조금 성장하면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역시 성장합니다.
세 번째 단계부터는 좀 어렵습니다. 감각적인 단계에서 영적인 단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내가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 같고, 특별한 응답이나 역사를 보여주지 않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의 시기입니다. 나의 의지가 믿음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라고 말하는 것처럼 믿음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이정도만 해도 정말 영적으로 많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네 번째 단계는 죽음과 흑암의 단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느끼는 단계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단계입니다. 세상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며 구속주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대해서만은 하나님되시기를 거절하고 있다고 느끼는 단계입니다. 아무리 의지를 가지고 이겨보려 해도 결국은 절망 밖에 남는 것이 없는 시점 - 그 시점에서 성도는 하나님께 외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감각과 생각, 노력과 의지를 완전히 내려놓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하게 임하십니다. 마치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신 순간 하나님의 완전하신 긍휼과 은혜가 예수님을 붙드신 것과 같습니다. 이 네 번째 단계를 지나고 나면 성도는 자신의 모든 것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자신을 인도하고 주장하는 단계인 것입니다.
1. 성도의 인생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러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먼저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종이 전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있어야 마땅합니까? 그들은 평강과 은혜,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하나님을 빛으로 삼고 걸어가면 그 인생길에 기쁨과 환희만 가득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흑암 중에 빛이 없는 삶’을 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이럴 수도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맛이 없지 않습니까? 믿으면 무엇인가 형통하고 잘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말씀은 우리의 현실이자 사실입니다. 만일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고 잘되기를 원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실망하셨다면, 저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기대와 삶의 진실이 조화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만일 신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잘되는 종교, 그런 종류의 신앙을 원하셨다면 여러분은 잘못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조차도 결코 잘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잘되기를 철저하게 거부하신 분입니다. 그저 하늘에 계셔서 하나님으로 군림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왕이 되어달라는 부탁, 하나님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 달라는 계속되는 부탁을 거절하셨습니다. 결국 그는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연약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죽임당하셨습니다. 오죽하면 성경조차도 예수님을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표현하겠습니까? 죽임 당하신 어린 양, 도대체 우리들에 대해 무엇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떤 능력, 어떤 혜택을 줄 수 있습니까? 힘 없고 가치 없는 어린 양에다가 죽임까지 당했는데 말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예수님이 우리의 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뒤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우리 믿음의 본질이자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본받아야 합니까?
2. 예수님의 일생, 그리고 우리들
예수님의 삶은 조화될 수 없는 두 가지 개념이 늘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반대되는 두 단어를 가지고 예수님의 삶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그리고 사람’으로 예수님의 삶을 설명할 수 있겠지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낮아지심, 영광 받으심’ 이런 말도 있습니다. ‘사랑과 배신...’ 뭐 이런 말도 가능합니다. 또 ‘군중과 고독’은 어떨까요?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예수님의 삶에 대한 상반되는 두 단어 정리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과 부활’입니다.
정말 정 반대되는 단어들인데 예수님의 삶에서는 기가 막히게 잘 조화되어 있고, 이것의 거리가 큰 만큼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도 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성경은 이 두 가지가 성도의 삶에도 항상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에도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인데 같이 불러 보시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바울은 이 본문에서 ‘죽음과 부활’이 자기 안에서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간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공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상반된 개념이 바울 안에 함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음’과 ‘내 안에서 사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육체 가운데 산다’고 했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곧 ‘날마다 다시 산다’는 말입니다.
3. 성도의 선택, 흑암 중에서 빛을 발견하다.
여기까지 동의가 되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다시 천천히 잘 뜯어서 봅시다. 본문은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누구입니까? 예, 바로 우리들,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종의 가르침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성도의 삶의 현실입니다.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라는 표현은 우리 삶의 아픈 현실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것은 형통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성도들, 어떤 삶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의 행복과 평안을 허락하십니다.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평탄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닐 뿐 아니라, 때로 우리의 삶 속에는 내가 하지 않은 일과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의 결과가 내게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셋째,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도의 삶의 고난의 현실만 우리들에게 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입니다.
따라서 이 한 구절은 세 가지 질문과 대답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정체성을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입니다.” 두 번째 묻습니다. “당신의 삶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대답합니다. “때로 흑암이 나의 삶입니다. 때로 죽음이 나의 현실입니다.” 세 번째 묻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대답합니다. “나는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다시 삽니다. 그때 내가 아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4. 부활을 경험하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이사야 50장 10절에서의 성도의 이 기쁨,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 경험하는 부활의 영광을 경험하신 적 있습니까? 십자가의 요한이라는 사람이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마지막 단계’ 즉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후의 경지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유익이 없는 삶이 계속될 때 오히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더욱 깊이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나는 죽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살아서 역사하시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증거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활을 기념하는 오늘 주일에 우리가 동경하고 꿈꾸며 소망해야 할 영적 경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경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감사가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이며 고통일 수 있습니다. 흑암의 깊은 동굴 속에서 끝이 없는 아픔의 시간을 견디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 생각, 나의 능력과 판단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탄식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성도, 혹은 자신을 성도로 속인 사람은 죽음의 고통이 몰려오면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하나님의 법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내게 유익하고 좋은 말씀만 순종하고 내게 불리하고 어려운 말씀은 뒤로 미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영적 부활을 경험하는 성도는 그때를 놓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외치셨지만 십자가를 버리지 않으셨던 것은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로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새생명 얻게 하시고 보좌에 앉히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죽임 당한 어린 양’ - 죽음과 부활이, 고난과 영광이,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들에게 주님의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기쁨과 감격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천국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살고, 죽음과 눈물의 삶을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활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살면서 나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그의 부활을 나타내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을 때야 비로소 그리스도가 내 안에 생명으로 빛으로 다시 사시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주일에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서 다시 살아 역사하는 아름다운 믿음을 향한 결단이 여러분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결단의 끝에 기쁨으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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