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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1. 드레스 코드(마 22:1-14) na kim 201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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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1.

* 본 문 : 마태복음 22장 1-14절 말씀

* 제 목 : ‘드레스 코드(Dress Code)’

여러분, 혹시 ‘Dress Code’라는 말을 아십니까? 한국어로는 ‘복장 규정’이라는 다소 딱딱한 말로 번역이 됩니다. 설명하지만 ‘내가 참석하고 있는 자리의 목적에 따라 갖춰야 할 옷차림새‘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는 이 드레스 코드 때문에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꽤 유명한 한복 디자니어인 이혜순씨가 신라 호텔의 뷔페 식당에 갔다가 입장이 허락되지 않아서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 호텔은 드레스 코드가 있고, 한복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복의 부피가 커서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혜순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토로했고, 급속하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습니다. 한복을 연구하면서 대중화에 앞장서온 그녀는 20년간 매일 한복을 입고 있는데, 외국도 아닌 한국에 있는 ’신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호텔의 식당에서 한복입은 사람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건희 회장의 딸이자 신라호텔의 사장인 이부진씨가 사과하고, 한복을 입은 사람의 출입을 허용하는 것으로 호텔의 policy가 바뀌었습니다.

노태우 전대통령의 시대에도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더군요. 남미 정상을 위한 청와대 만찬이 있었는데, 드레스 코드가 '세미 정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민자당 대표이던 김영삼 대표는 비서진들이 세미 정장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해 혼자 배에 붉은색 띠를 두른 연미복 차림으로 행사장에 나타났습니다. 주한외교 사절 등 다른 참석자들은 넥타이도 매지 않은 편안한 복장이었습니다. 만찬 후 상도동 자택으로 가던 김영삼 대표는 한강대교를 지나던 중에 차를 세웠습니다. 화가 잔뜩 났던 김영삼 대표는 앞자리에 앉은 비서에게 말했습니다. "니 고마 뛰~내리뿌라!"

1. 왕의 잔치에 초청을 받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드레스 코드가 필요한 자리에 참석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들의 만남, 예배,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들의 삶을 잔치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는 드레스 코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2장에는 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청하는 왕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하나의 이야기 속에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처음 에피소드는 초청해도 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청함을 받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일로 왕의 잔치에 오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왕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잔치가 시작되고 난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입니다. 왕이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잔치에는 참여했지만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왕은 그에 대해서도 진노합니다. 그는 잔치에 참여하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쫓겨나고 맙니다. 왜 그랬습니까? 소위 ‘드레스 코드’였습니다. 왕이 원하는 드레스 코드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지난 2주 전에 아주 즐거운 잔치를 경험했습니다. 눈물과 감동이 있고, 웃음과 즐거움이 있고, 맛있는 음식과 진심으로 축하하는 하객들이 있었습니다. 거의 완벽한 잔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다들 옷차림을 보셨습니까? 저는 말이지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 성도들이 예배드리러 올 때보다 더 잘 차려 입었네....”


여러분들, 왜 그날 그렇게 잘 차려 입으셨습니까? 예, 결혼 예식에 하객으로 참여하는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기 위함이지요.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담은 적절한 예복, 잔치를 다 함께 즐기고 잔치의 주인공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기본적인 사항 아니겠습니까?


2. 잔치를 즐기지 못하는 이유 - 교만한 마음과 수치심


그런데 오늘 왕이 준비한 잔치를 즐기는데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들은 왕의 잔치를 즐기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두 가지 이유로 그들이 잔치를 즐길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교만한 마음과 수치심입니다.


1) 교만한 마음


먼저 교만한 마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왕의 잔치에 초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초청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내 삶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가치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며 삽니다. 돈을 가치있게 여기는 사람은 돈에 순종하며 삽니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역시 욕망의 사람으로 삽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게 있고, 하나님의 잔치보다 더 즐거운 것이 내게 있습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는 탕자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결국 그가 집에 돌아올 때 알게 되는 것은 아버지에는 매일 잔치가 열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니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이 곧 참된 잔치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경험하고 난 다음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겨서 아버지와 집을 떠났습니다. 떠나는 그의 마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교만함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교만함이 있습니다. 잔치가 열렸습니다. 드레스 코드를 따라야 합니다. 그 잔치에 합당한 옷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합니다. 변화를 거부합니다. ‘나는 나’라는 것입니다. 왕의 잔치도 좋지만, 오라니까 오기는 왔지만, 왕의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포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왕의 잔치에 초청을 받기는 했는데, 그래서 잔치에 오기는 했는데 영~ 즐겁지가 않은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키라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불편합니다. 싫습니다. 나는 그저 이런 내가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왕의 명령 앞에 자신을 지키고 서 있는 사람,
변화도 없고 회개도 없는 사람 - 참으로 교만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5절에는 바리새인들이 세금의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23절부터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시작합니다. 34절부터는 또 다른 율법사가 등장하여 율법과 계명에 대한 논쟁을 합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도전하고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너무 높아서 예수님의 복음을, 천국 잔치로의 초청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수치심


또 하나의 문제는 수치심에 있습니다.
자신을 보잘 것 없고 낮은 존재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겸손하다구요? 아닙니다.
겸손한 마음과 수치심은 다릅니다. 겸손한 마음은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못해요, 안해요... 저는 자격이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철저하게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그 마음이 왕의 잔치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수치심입니다. 복음이 아무리 그를 설득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모든 죄와 악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했다고 말해도 자신은 여전히 죄인이요, 자격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마음은 변화의 의지가 없는 마음입니다. 변화된 삶에 대한 목표가 없는 마음입니다. “나는 아니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잔치의 삶에 대한 거룩한 목표, 그 목표를 향한 동기가 부족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잔치에 참여하게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잔치의 주인공이 되어 기쁘게 즐기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없습니다. 참석했으니까... 이 자리에 와서 왕의 진노를 피했으니까... 그정도로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이미 잔치에 참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의 비전으로 그들을 불렀는데, 그들은 여전히 ‘갈릴리 어부’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심령의 깊은 곳에서부터의 참된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인 목적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목표를 높게 가지셔야 합니다. 영적인 지향점의 수준을 높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왕의 자녀요, 잔치의 주인공으로 부르셨는데, 그저 적당히 구경만하다고 돌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3. 옷을 빌려드립니다.


성경에는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생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해 만족하실까요? 하나님의 생각을 찾아봅시다. 먼저 골로새서 3:12의 말씀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이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택한 성도들입니다. 거룩하고 사랑받는 성도로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가진 성품과 습관으로는 절대 거룩하고 사랑받는 성도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옷 입으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잔치의 드레스 코드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살기 위해서는 그런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옷입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입니다.


같은 말씀이 에베소서 4:22-24에 나타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이 말씀이 구조를 잘 보십시오. 성도의 삶에는 두 가지 지향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는 삶’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따르는 삶’입니다. 성도들이 자기 안에 있는 유혹의 욕심을 따르면 결과적으로 삶이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게 됩니다. 성도들이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면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새롭게 지으심’받게 됩니다. 그들의 삶의 현재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는 여전히 옛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변화된 새사람입니다. 바울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이 옷은 원래 우리들의 옷이 아니었습니다. 이 옷은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입을 수 있는 옷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성도들이 입어야 하는 옷입니다. 예시록 7장 12-14에는 마지막날 성도들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7:12-14)


여러분! 감격스럽지 않으십니까? 요한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한 장로가 요한에게 묻습니다. “요한아, 지금 네 옆에 흰 옷을 입고 서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인데,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그 옷을 씻어서 입힌 사람들이다.” 고난의 세상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 그들은 지금 희고 고운 예복을 입고 천국의 잔치에 주인공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 속에 여러분과 저,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씻은 새 옷, 거룩한 옷, 희고 정결한 옷 - 천국 잔치의 예복을 입고 천국의 기쁨에 동참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나를 변화시키는 힘


가까이에 William Penn Inn 이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202번 도로와 Summney Town Pike의 교차로에 있어서 잘 알려져 있지요. 아마도 Montgomery County에 있는 많은 식당들 가운데서 역사와 음식 및 서비스의 Quality면에서 가장 뛰어난 식당 중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 미국 식당을 그리 많이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 식당은 다른 식당에 비해 좀 특별합니다.


처음 그 식당에 갔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그 식당에 소위 Dress Code라는 것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갔었습니다. 쫓아내지는 않더군요. 다만 스스로 부담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종업원들까지 정장 차림으로 있는데, 정작 손님인 저는 너무 편한 옷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때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다시는 이 식당에 안와야겠다....’는 것과 그런데도 만일 오게 되면...? 음... ‘제대로 입고 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두 번을 더 갔는데요, 한번은 결혼 15주년 기념일에 가일이 성일이 옷 제대로 입혀서 온 가족이 갔었구요, 그 다음은 성경제, 강수진 부부가 지난 가을 약혼식을 할 때 갔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당당하고 멋있게 정장차림으로 들어갔었지요.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이 주인된 파티에 초청하셨습니다. 그 잔치에는 드레스 코드가 있습니다.
결단하셔야 합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잔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참석하지 않으시면 되지요. 그런데 참석하셔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잔치가 요구하는 드레스 코드에 자신을 맞추셔야 합니다. 우리의 외모, 성취, 성공 여부, 사회적인 지위의 드레스 코드가 아닙니다. 얼마나 우리 안에 생명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내면의 변화와 삶의 변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울리는 영적인 옷을 입으셔야 합니다. 불편하고 부끄러워서 제대로 잔치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기뻐하시는 왕, 우리 아버지가 베푼 잔치 - 바로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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