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8.
* 본 문 : 사무엘상 1장 18-28절
* 제 목 : 어머니 한나
어릴 적 저는 싸움을 자주 하는 편이었습니다. 싸움을 할 때마다 가장 겁이 나는 것은 부모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친구들과의 싸움이 부모님의 귀에 들어갔을 때 단 한 번도 부모님이 저의 편을 들어준 적은 없었습니다. 참 억울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그런 억울함은 단 하나의 사건으로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루는 동네 친구들끼리 모여 놀고 있을 때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집에서 한 아주머니가 저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집 마당에 중요한 물건을 놓아두고 대문을 열어두었는데 그 물건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아주머니는 집 주변에서 놀고 있었던 저희들을 의심했습니다. 특히 가장 많은 의심을 받았던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컸었고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주머니는 저를 다그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억울하고 난감했습니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너희 집에 가자. 너희 부모를 만나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당당하게 교회당 옆에 있던 사택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어머니가 나오셨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얘가 앞 마당에 놓아둔 물건을 들고 갔어요.”
정말 큰 일 났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싸움만 해도 벼락이 떨어지는데 물건이 없어졌다니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다 들은 어머니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이 아주머니의 말이 사실이냐?” 저와 같이 따라갔던 한 두 명의 친구가 나서서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다시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물건을 훔치지 않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주머니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물건을 찾아보시지요. 저희 아이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얘가 제 앞에서 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조용하면서도 굳은 표정에 그 아주머니는 주춤거리면서 다시 알아보겠다며 돌아섰습니다. 어머니는 함께 온 친구들과 제가 먹을 것을 주셨고 우리는 계속 어울려 놀았습니다.
지금도 그 때 어머니의 표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아… 어머니가 나를 믿어주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나를 믿어주는 어머니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이전에 친구들과 싸움을 하고 혼이 났던 모든 기억은 다 사라졌습니다. 모든 불만과 의문도 사라졌습니다. 내가 인정을 받는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요즘도 가끔 어머니의 굳은 얼굴을 기억합니다. “저희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늘 다른 사람의 편에서 저를 꾸짖던 어머니의 이 한마디는 제 마음에 남았던 모든 억울함을 지웠고, 백번 천 번의 사랑의 표현보다 더 강하게 저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교육의 원칙은 ‘절제된 사랑’이었습니다. 자녀들이 많고, 목회자의 가정이고 또 자녀들이 많다보니 넉넉하고 풍족한 사람을 주실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꼭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사랑과 믿음을 주셨습니다.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원칙으로 자녀들을 양육하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한나의 가정, 사무엘의 어머니를 통해서 성경적인 부모됨, 자녀 양육의 원칙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1. 내 삶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다.
한나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무엇일까요? 예, 한나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나의 기도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요?
한나는 삶에 슬픔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불합리한 가족 제도에 의해 한 남편에게 두 아내가 있었고, 한나는 그 중 하나였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따라서 미래도 없었습니다. 한나의 소원은 자녀에 있었습니다.
한나는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지난 주 목장에서 함께 말씀을 나누셨을텐데요, 성도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나는 자신의 삶의 고통과 슬픔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들어주시도록 간구한다는 것과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내 삶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해결되어야 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가슴 아픈 결핍, 자녀의 문제를 놓고 그 문제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하나가 한나의 기도 속에 있습니다. 한나는 기도했고, 엘리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한나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겼으므로, 그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고, 하나님이 그 뜻 가운데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었으므로 걱정하지도, 근심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소원이 응답되어서가 아닙니다. 내 뜻대로 다 이루어져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맡겼으므로 평안을 얻는 것 -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2. 한나처럼 살다.
한나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앙의 좋은 본을 잘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네 가지를 알고 본받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드린 대로 한나는 자신의 삶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는 중에 중요한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대부분 우리는 우리가 가진 수단들을 사용해서 문제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때로는 사람을 사용하고, 때로는 재정을 사용하고, 때로는 관계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문제를 해결하는데만 집중하게 되고, 어느새 문제의 노예가 됩니다. 내 인생에서 지금 내가 만난 이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무당을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할여 했던 사울왕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자 기도입니다. 우리가 한나에게서 본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의 원칙은 바로 이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본 받을만 한 것은 한나의 기도의 자세입니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주어진 답에 만족합니다. 어쩌면 한나가 원했던 대답, 한나의 마음에 흡족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음성을 들려주고 언제 어떤 방식으로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얻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나가 얻은 답은 부패한 제사장 엘리의 성의 없는 대답이었습니다. 삼상 1:17-18을 봅시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 1:17-18) 여러분은 이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았습니다. 내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므로 응답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을 것임을 믿었습니다. 때로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도에 답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답은 이미 말씀을 통해서 주셨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그 답에 만족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나에게서 우리가 본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답이 자신을 만족시킬만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답을 주셨으므로 믿고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셋째, 한나는 이 아들이 하나님이 주신 응답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무엇을 믿었다구요? 예, 하나님이 주신 응답입니다. 누구의 것입니까? 예, 하나님의 답,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아들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아들의 삶에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고백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자 기도의 응답임을 고백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아들, 딸들을 이 땅 사는 동안 맡기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실 수 있겠습니까? 내 뜻과 세상의 윤리로 이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이 아이들을 먹이고 키워야 함을 고백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한나를 통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자녀 양육의 Key입니다.
따라서 넷째, 한나는 아들을 하나님의 뜻의 거대한 강물 위에 띄워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한나의 자녀 교육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다면 오늘 말씀에 성공하신 겁니다. 내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때 내 삶이 비로소 평안해집니다. 따라서 내 기도의 소원이자 내 생명과도 같은 아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가장 빛납니다. 이것을 믿는 한나는 아들을 하나님의 강물 위에 띄우는 것입니다.
3. 사랑합니다. 떠나보내겠습니다.
저는 한나와 사무엘이 이별의 장면에 대한 성경의 묘사가 마음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22절에 보면 한나는 자신의 서원과 결단을 남편에게 말합니다. 자신이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하였고, 이제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이 아들이 젖 떼기까지만 내가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낳은 아들, 하나님께 드릴 것인데, 젖만큼은 먹이고 싶은 어미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품에서 자라는 것이 옳은 일이고 또 신앙적 결정이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23절 마지막 부분,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때기까지 기다리다가...”(삼상 1:23)라는 표현에 한참을 생각했었습니다. 한나의 아픈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24절을 봅시다. “젖을 뗀 후에....”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서원한 때가 된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삼상 1:24)고 했습니다. 얼마만큼 어릴까요? 예, 막 젖을 뗀 어린 아이입니다. 한나는 그렇게 아들과 이별합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강물에 띄운 것입니다. 그 마음이 26-28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함께 읽읍시다.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 1:26-28)
아직 어리고 아직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임을 성경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전을 내려가는 한나의 눈에 눈물이 강물처럼 흘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는 아들을 떠나보냅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은 품지만, 아들은 내 품에서 떠나보내는 것이 아들에 대한 참된 사랑일 수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품에서 떠나보내는 일이 실패합니다. 계속 관여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부모로서의 가치와 존재감을 나타내려 합니다. 사랑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건강하지 않습니다. 자녀 또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성장을 인정하고, 그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인정하고 그 자녀가 성장한 만큼 품에서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할 일은 자녀에 대한 더 큰 사랑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들에게 한 어머니와 슬픔과 기도와 서원과 헌신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극적으로 아들을 얻고 또 극적으로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 어머니를 통해 우리 가정이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을 마치 이렇게 받고 키우고 하나님의 뜻에 드릴 수 있는 가정과 부모가 되자는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에 우리의 어버이됨을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녀들을 맡길 수 있어야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바르게 성장합니다. 초대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에 한나와 같은 믿음의 결단, 기도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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