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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22. 스데반에서 안디옥까지(행 11:16)9-2 na kim 201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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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22.

* 본 문 : 사도행전 11장 19-26절 말씀

* 제 목 : 스데반에서 안디옥까지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부모를 점점 닮아갑니다. 그런데 그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얼마 전 성일이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 이제 어른 됐어!”


가일이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 이번 6월에 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녀석이 어른이 되었다니요. 혹시 이 녀석이 무슨 나쁜 행동을 배운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잘못된 생각을 가졌나.... 짧은 시간에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있잖아, 나 이제 치카치카할 때 아빠처럼 할 수 있어.”

“그게 뭔데?”

“이제 나 거품 뱉을 때 카악~하고 소리 크게 낼 수 있어.”

“그런데 그게 왜?”“그러니까 나 어른이라구. 아빠처럼 할 수 있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가일이와 저는 푸하하하...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비로소 성일이의 생각이 이해가 됐습니다. 바로 그거였습니다. 무엇인가 아빠처럼 할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가일이는 제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빠, 양치질할 때 좀 조용히 하라고~ 아빠는 정말 시끄럽게 양치질한단 말이야.”


가일이도 성일이만한 나이에 그런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방에 들어가 보니 제 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서 폼을 잡고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 이제 아빠야!”


아빠처럼 되기, 혹은 아빠처럼 보이기.... 아들들의 ‘아빠처럼 되기’ 놀이를 생각하며 웃고 또 웃습니다.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귀엽습니다. 내 아들이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너무 신기하고 고마운 느낌이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마냥 좋아할 것만도 아닙니다. 과연 이 녀석들이 저처럼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아빠처럼만 살면 성공적인 인생일까요? 저를 닮아가고 배워가는 일이 이 아이들에게 좋은 일이 맞는 것일까요?


저는 가끔 제 안에서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제가 어릴 적 보던 아버지, 느끼던 아버지의 아주 사소한 습관과 모습이 제게 있습니다. 체질이 그렇고 입맛이 그렇습니다. 심지어 요즘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설교의 패턴과 제가 하는 설교가 닮았다는 생각도 합니다. 피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버지를 닮은 저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좀 더 조심스럽게 살아야겠습니다. 막내딸 승하까지, 제게는 3면의 거울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보며 웃고, 저를 보며 자라고, 저를 보며 삶으로 각인하여 배우고 있는 세 자녀.... 자라가며 그들의 인생을 만들어갈 때 더 아름답고 더 유익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겠습니다.


1. 스데반에서 안디옥 교회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한 사람, 스데반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순교했습니다. 나중에 사도가 된 사울은 당시 극렬한 유대주의자로 자신이 법적인 책임을 지고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교회에 대한 광범위한 탄압과 핍박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 등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환란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가서 했던 일은 무엇일까요? 예, 유대인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아가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복음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말하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라고 증거합니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 뿐이 아닙니다.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예루살렘 교회와 지도자들이 안디옥을 비롯한 여러 지역게 복음이 증거되고 많은 사람들이 믿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라는 선생을 안디옥에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스데반처럼 가르치는 일과 권면하는 일에 탁월한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혼자 그 일을 감당하려 했지만, 한 사람을 생각해 냅니다. 가르치는 일에 자신보다 더 탁월한 은사가 있는 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스데반을 죽였던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성도와 교회를 핍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신앙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그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사랑받던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그를 환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복음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자 했지만 낙향하고 말았습니다. 바나바는 바로 그 사람을 기억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찾아가서 함께 일할 것을 요청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안디옥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성도 여러분! 안디옥 교회에서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이 의도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드린 대로, 한 사람 스데반의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안디옥이라는 이방 지역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라고 불렸다고 소개하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여기에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2.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유혹


저는 이번 주부터 허락하는 대로 인류의 오랜 소원이자 욕심일 수도 있는
‘하나님처럼 되기’에 대해 생각하려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 - 이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먼저
인류의 최초의 범죄는 바로 ‘하나님처럼 되기’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뱀을 통하여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되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창세기 3:4-5를 봅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하와는 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죽지 않는다는 말과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선악과를 먹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었을까요? 사탄이 사용한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은 결국 거짓이었고, 인류는 오랫동안 이 거짓에 속아왔습니다. 가장 먼저 성경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을 바로 ‘바벨탑’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되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들 또한 세상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유혹’은 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유혹은 여전히 우리 안에 숨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power 혹은 control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 뜻대로 살고 내 의지대로 결정하겠다는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한 유혹은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에 대해working합니다. 자신에 대해 working한다는 것은 소위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완벽주의적인 경향을 띠기도 하고, 쾌락주의적 경향을 띠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working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내 뜻 대로 control한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흔히 남성들이 잘 사용하는 방법은 권위와 힘이구요, 여성들이 잘 사용하는 방법은 상황을 조작하고 여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요컨대 다른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따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렇게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유혹’의 목표를 바로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 성취와 영광입니다. 결국 삶의 중심이 자신이 있고, 모든 것을 수단화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삶의 성공과 즐거움을 위한 수단이라면
우리는 신앙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되시는 분이지,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 위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처럼 되리라!


그렇다면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일까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도
감히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그대로 이룬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7장 1절에는 잔뜩 겁을 먹은 모세가 등장합니다. 자신은 말도 잘 못하고, 애굽에 반역을 한 경험이 있어서 바로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 같지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출 7:1) 모세가 떨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앞에 마치 신처럼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하나님을 만나듯 모세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고 일하시고 영광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7장 1절에 의하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본 것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무슨 뜻입니까? 결국 그 사람을 통해서 세상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말씀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닙니까?


문제는 이 두 가지 하나님처럼 되기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담과 하와,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며, 자신의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는 법은 스스로를 높이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자꾸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합니다. 그곳에서 군림하고 다스리고 영광을 취하려 합니다. 더 많은 결정을 하려하고 더 많이 중요한 일을 하려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4. 가장 낮은 곳을 채우시는 은혜


그런데 모세의 길, 스데반의 길, 초대교회의 길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실 때 그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통해 초대교회와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 그는 돌에 맞아 죽임당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들을 보면 그리스도가 보인다고 칭찬을 들었던 것은 그들이 오늘날처럼 크고 높은 건물과 수많은 헌금을 드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는 것은 그 성도와 교회가 가장 약할 때였습니다. 가장 부족할 때였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였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어서 비워낼 때 오히려 그 모든 빈 곳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하심이 함께 하고, 그 연약함과 부족함에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고, 자신이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진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고후 13:9)


따라서 성도 여러분1 하나님과 같이 된다, 혹은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같은 능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결정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가장 잘 닮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안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서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먼저 비워야합니다. 내가 먼저 낮아져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의 자리에 하나님의 충만하고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요? 나는 더 낮아지고, 나는 더 말씀을 따라 섬기고, 나는 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벌써 마음이 뜨거워지고 도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함께 도전을 받읍시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 땅 안디옥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도행전을 이렇게 기록하셨을까요? 그것은 스데반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았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언제 가장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었을까요? 예, 처절하게 돌아맞아 죽어갈 때였습니다. 그 모습이 바울의 가슴에 남았고, 예루살렘 교회와 흩어진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 그리스도예수의 모습이 스데반을 죽였던 사울을 통해 안디옥 교뢰에 증거되고 그들을 변화시켜 스데반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닮아야겠습니다. 본 받아야겠습니다. 하나님처럼 능력과 영광을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성품과 사랑이 나를 통해 나타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나를 보며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스데반,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을 통해 일어난 놀라운 변화가 오늘 초대교회와 우리들 모두의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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