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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21. OMTL 4 - “주의 진리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25:4-5) 이응도 목사 2012-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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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1.

* 본 문 : 시편 25편 4-5절 말씀

* 제 목 : OMTL 4 - “주의 진리로 나를 가르치소서!”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막 중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추석 혹은 설 명절이었는데, T.V.에서 특선 명화를 방영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외화를 방영했었는데, 그 날은
‘순교자’라는 한국 영화를 방영했습니다. 별 뜻 없이 봤던 영화 한 편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현목 감독의 영화였고,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소설가 김은국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김은국은 우리나라 소설가로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 후보자로 추천되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1950년 6월 25일 당시, 평양에서 처형된 12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2명의 목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심도있는 토론이 벌어집니다. 특히 제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살아남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젊은 목사는 위기가 다가왔을 때 의연했습니다. 그는 처형대에 매달려서 연약한 모습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다른 목회자들을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사람씩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절망합니다. 때로 그들을 위로하기도 하고 때로 비판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보기도 하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총살당하기 직전, 그는 고통과 위협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처절한 배신감에 배교를 선언합니다. 인간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는 신을 더 이상 믿지 않겠다는 분노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미치고 말았고, 살아남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 영화를 보면서 받았던 충격은 참으로 컸습니다. 아버지가 목회자였고, 나도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혀왔는데 그 영화는 목회자들로 대표되는 신앙인들의 연약한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제가 보고 듣고 배운 목회자는 어떤 순간에도 진리와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영화에서는 고민하고 배반하며 비겁해지고 나약해지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처형대에 매달려서 하나님을 저주하는 젊은 목회자의 울부짖던 모습은 제 마음 속에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흔히 하는 표현 중에
‘바닥이 드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 여러분은 이런 말을 사용합니까? 사람이 가진 기본 소위 ‘바닥’은 위기 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강바닥이 가뭄에 드러나듯 얕은 저수지가 더운 여름 한철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을 드러내듯, 위기의 순간 - 시련이나 고통 앞에서, 유혹과 시험이 다가올 때, 헌신과 희생의 필요가 펼쳐질 때,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힐 때, 상처와 분노가 마음을 장악할 때 우리는 여지없이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 거칠게 누워있던 바닥을 드러냅니다. 그 바닥에는 숨기고 깊은 비겁함도 있고, 잘 감춰두었던 이기심도 있고, 자기 신념과 확신으로 똘똘 뭉친 두려움도 있고, 단단하게 굳은 교만과 아집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어린 나이에 그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 영화가 우리 마음에 있는 바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극한의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얄팍한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쉽게 자신의 바닥을 세상에 드러내며 살고 있는지를 어린 마음에도 두려움 속에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어린 제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만일 그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해 자신 있고 신념에 찬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 내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 자주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충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위기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신앙과 두려움이 나타나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두려움, 불신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그들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헌신하고자 했던 결단을 내린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재산을 정리한 돈을 앞에 두자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실제가 달랐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때로 자신에 대해 놀라신 적은 없습니까? 평소에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위기의 순간에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과 차이를 느끼신 적은 없습니까? 저는 가끔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숨은 분노가 많은 편입니다. 젊었을 때는 그것이 조절되지 않아서 표현되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진주에서 부교역자로 교회를 섬길 때였습니다. 주일 아침 집에서 교회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다섯 개 정도의 길이 모이는 작은 로타리를 끼고 돌아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1톤 트럭 한 대가 갑자기 차선을 바꿔서 끼어들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이런...싸가지....없게...’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운전자도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만 했던 말을 그 운전자는 입과 손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숫자와 동물과 신체 부위를 사용한 욕설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앞으로 쌩~하니 지나갔습니다.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3-400m를 쫓아갔습니다. 차를 세우고 운전자를 내리게 했습니다. 비록 욕설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거칠게 몰아붙였습니다. 워낙 드세게 나갔더니 그 운전자가 겁을 먹고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차에 타고 운전대를 잡는 순간.... 아... 내가 지금 뭘한거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주일 아침 교회로 가서 유년 주일학교 주일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데, 아이들에게 설교를 해야 하는데... 지금 교회로 가는 길을 멈추고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 시험의 상황, 유혹의 상황 등에 대한 나의 무의식적인 반응, 그것은 내 안에 무엇이 있는가? 를 말해 줍니다. 그 일을 통해서 제가 스스로에 대해 발견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나의 바닥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 속에 여전히 변화되지도 않고 변화하려고 하지도 않는 거친 습성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신학과 목회학 외에 상담을 공부하기로 결정한 것은 저의 이런 못난 바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2. 무엇을 사용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이 분명한 위기 속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먼저 그는 늘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시에 많이 등장하는 표현 중에
‘원수’라는 대상이 있습니다.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닌 자신을 대적하고 위협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2절에 보면 지금 이 기도를 드리는 상황도 원수 때문입니다. 19절에서 그 원수는 수가 많고 다윗을 심히 미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윗의 1차적인 반응은 무엇입니까? 16-17절을 봅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시 25:16-17) 그가 표현한 자신의 정서적 상태는 무엇입니까? ‘외로움과 괴로움과 근심’입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위기에 빠져본 경험이 없습니까?


다윗은 ‘원수들’이 주는 고통 앞에서 일차적으로
‘외로움과 괴로움과 근심’이 생긴다고 표현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다음에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하나는 절망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분노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같은 뿌리를 가진 것입니다. 먼저 절망한다는 것은 자신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원망하는 경우입니다. 나아가서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원망과 적대감을 쏟아놓습니다. 예를 들어 엘리야같은 경우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결국 이세벨에게 쫓겨 광야로 도망가게 되자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대응은 분노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원수들에 대해 적대감을 표현하고 받은만큼, 혹은 받은 것보다 더 깊은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정직한 반응이면서 하나님이 가장 경계하시는 반응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들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우리들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그는 먼저 자기 안에 있는 외로움과 아픔을 하나님 앞에 털어 놓습니다. 그가 16-17절에 고백한 감정들은 누구나 위기의 상황에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가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다시 봅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시 25:4-5) 고난의 순간, 위기의 순간, 외로움과 두려움과 억울함과 분노가 마음에 가득 차는 순간, 그는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는 원수들이 아닌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은 참으로 정직한 인간적인 반응이지만, 그것은 지혜롭지도 유익이 되지도 않습니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 원수가 내게 했던 것과 같은 마음으로 원수를 대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시인은 아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자신의 감정가 분노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3. 그러므로 학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는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립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고 기다리며 하나님을 배우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배우기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이 나를 가르치려 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가르치려는 의도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교만해 보이고 권위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이 속에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가르치려 들지 마라는 말 속에 나는 더 이상 배우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숨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지식과 신념에 대해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감정적 반응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 자신의 지식이 부족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 자신이 붙들고 있는 신념이 연약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는 늘 모든 사람으로부터 모든 환경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용기 있는 사람은 많은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늘 모든 사람과 환경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4. 학습의 조건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여 사모해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의 바닥은 늘 악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늘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내 생애 마지막 30일 4주차를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고민할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우며 훈련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우리의 죄와 악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겸손해야 합니다.


배우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함의 정도는 우리의 마음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만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고일 수 없습니다. 낮고 낮은 마음에 깊은 은혜의 물이 고입니다. 우리의 바닥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려면 마음의 깊이, 인격의 깊이를 더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깊은 마음과 인격에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채우는 것입니다. 겸손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삶에 고이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은혜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게 배웁시다.


2) 성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서는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 새벽에 나눈 말씀
이 기억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반석은 무엇이고 집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반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반석으로만 살 수 있을까요? 집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집입니까? 우리가 배우고 순종할 때 우리는 든든한 반석 위에 아름다운 집을 짓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열정,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성실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3) 경이감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복음에 대한 경이감입니다. 복음을 깨닫고 알 때의 기쁨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말씀을 읽었기에 그 말씀이 내게 그렇게 단 것일까요? 우리가 읽는 것과 다른 것을 본 것일까요? 그저 주어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조명하며 말씀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하며 성취되는지를 경험하는 성도들에게 허락된 기쁨이 말씀에 대한 경이감입니다. 참으로 옳고 옳으며 참으로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말씀, 그 말씀을 깨달아 알 때의 놀라움 - 이것이 바로 말씀에 대한 경이감입니다.


4) 하나님의 뜻을 사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바리새인들의 실패는 열심히 없어서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기보다 자신들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메시야를 가르치려 했던 것이 바로 그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날까지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악한 본성과 나약한 성품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배우고 익히며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교훈해야 하겠습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납시다. 날마다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합시다. 하나님을 배워서 하나님의 뜻으로 인생을 사는 참된 지혜있는 성도와 가정과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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