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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18. 목숨 걸고 사랑하라 - 2. 자신을 사랑하다. 이응도 목사 201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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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18.

* 본 문 : 마 22:37-40

* 제 목 : 목숨 걸고 사랑하라. - 2. 자신을 사랑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누가복음 10장에는 영생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한 율법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다시 물으십니다. 그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과 같은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다시 묻는 것은 “그렇다면 제 이웃이 과연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질문에 대해 주시는 말씀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저는 이웃 사랑에 대해 주신 말씀인 이 비유를 다음 주에 여러분과 함께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하니 걸리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39절을 보십시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걸렸습니다. 내가 정말 이웃을 사랑하는가를 알려고 하면 먼저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요. 만일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국 한 말씀인데, 이웃 사랑의 전제가 되는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내가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도 함께 실패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부터 4주간 ‘목숨 걸고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눈다고 예고했었지요? 오늘은 목숨 걸고 하는 사랑 두 번째 시간으로 ‘자신을 사랑하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 질문 하나를 드리면서 말씀을 시작할까요? “여러분은 자신을 사랑하십니까?” 질문은 조금 업그레이드 해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아십니까?”


1. 자신을 사랑하십니까?


저의 질문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는 정말 자신을 바르게, 사랑답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저 역시 여러분과 같은 생각인 것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위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랑이 다 건강하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말세에 있을 일을 경고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을 함께 봅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바울은 지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말세에 있을 고통의 징조 중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권면할만한 일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성도와 교회가 경계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웃을 사랑하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경고하고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자주 건강하지 못한 자기 사랑에 우리의 삶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이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상담을 하는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 4-5년 되어가는 가정이었습니다. 두 자녀의 교육과 부부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부부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의 문제가 쉽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학교에서 한 아들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충분히 오해를 할 만한 행동을 했고, 선생님이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정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 자녀들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부모에게 말할 때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기 때문에 그 부모는 학교를 고소하느니 선생님을 그만두게 하겠다느니 하면서 대단히 화를 냈습니다. 제게 부탁을 해서 학교에 같이 가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확인해봤습니다. 그 녀석의 명백한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고, 또 그랬다고 하더라도 자기 아들을 학교가 오해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학교의 징계가 과하다고 대단히 화를 냈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 모든 분노를 통역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적정한 선에서 중재를 하고 학교에서 나왔습니다. 조금 있다가 그분들이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대뜸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왜 학교 편을 들고 자기 아들을 변호해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들이 얼마나 불쌍하게 성장했고, 얼마나 순진하고 착한데 왜 그런 말을 학교에 해주지 않느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목사님의 아들 가일이는 문제가 없는 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분들이 가일이를 만난 적도 없는데....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신문에서 읽었는데 제가 쓰는 칼럼에서 제가 가일이를 자랑했다는 겁니다. 30분 가까이 거의 쌍욕에 가까운 욕을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사랑한다는데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은 그 자녀에게 유익할까요? 해로울까요? 그 사랑은 건강하고 좋은 사랑일까요? 다소 문제가 있는 사랑일까요? 그분들은 이후에 더 심각한 문제로 다시 저를 찾아왔고, 함께 학교에 갔어야 했고, 더 큰 징계를 받았고, 지금은 아들을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와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건강하고 바른 사랑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아프고 고통스럽게 그들의 삶의 현실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도 마치 이와 같습니다. 왜 성경이 말세에 나타날 고통의 현실 가운데 ‘자기 사랑’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잘못된 자기 사랑에 대한 엄격한 경고입니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 자신의 욕심과 욕망, 교만과 아집을 채우기 위해 땀 흘리는 것, 자신을 변호하고 변명하며 부족함과 연약함을 애써 감추려는 비겁함 - 이 모든 것은 잘못된 자기 사랑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방식으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쉽게 이기심과 쾌락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기도 하고,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결국 자신이 상하고 병듭니다.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사랑이 아닌 해치고 무너지게 하는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3. 몇 가지 가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잘못된 자기 사랑에 쉽게 속을까요? 잘못된 자기 사랑은 우리가 너무 속기 쉬운 몇 가지 가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소개하는 몇 가지에 혹시 나도... 라고 생각되는 것은 없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속기 쉬운 가면은
‘자기 연민’입니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자신은 어려서부터 많은 상처와 고통을 당해왔고, 희생되어왔기 때문에 사소한 잘못이나 좋지 못한 습관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기 때문에 잘못을 반성할 수도, 새로운 삶을 위한 변화도, 참된 회개도 힘이 듭니다. 자기 방어의 벽이 너무 투텁고 높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 “당신이 내 고통을 알아? 내가 얼마나 아프고 슬픈지 알아?”라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가장 왜곡된 자기 사랑의 방식입니다.


또 다른 가면은 ‘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해서 욕심을 채우는 자기 사랑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곡간에 곡식을 가득 채우고 자기 배에는 욕심을 가득 채우는 사람,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시간과 재물과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을 성경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인생을 헛된 것에 소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소원과 감각을 만족시켜 본 다음 결론을 내닙니다. 그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편들기’는 어떤가요? 사실 언젠가부터 “자신을 사랑하세요.”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이라는 거죠. 그런데 자신을 있는 대로 받아들였더니 더 비참하고 더 아플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괜찮다, 괜찮다 자신에게 말해도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매일매일 다가오고, 자신보다 객관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사람들과 계속 비교됩니다. 아무리 자기를 일방적으로 편들어보려고 해도 안될 때가 있는 법입니다.

4. 이렇게 자신을 사랑합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가장 바르게, 가치있게 사랑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질그룻에 비유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질그릇과 같은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질그릇에 무엇을 담는 것이 그것을 가장 크게 사랑해주는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5-10을 함께 읽어 봅시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5-10)


자, 어떻게 나를 사랑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나를 잘 사랑해줄 수 있는 길일까요?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질그릇인데 아무리 다듬고 꾸미고 사랑해준다고 해서, 변명하고, 편들고, 욕심을 채운다고 해서 금그릇, 은그릇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을 가꾸고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다른 길을 찾습니다. 그것은 그릇에 정말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을 담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보배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 잘 준비될 수 있다면 나 자신은 비록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이지만 나는 가장 귀한 일에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여러분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길인지 보이십니까? 우리는 모두 질그릇과 같은 인생입니다. 아무리 색칠을 하고 아무리 가꿔도 그릇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금은그릇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이 담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릇은 바뀌지 않지만 그릇에 담는 것은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무엇을 담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위해 헌신하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아름다운 보석이 자기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 보석이 사도 바울의 인생을 가치있게 하고 의미있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보석은 여러분과 제 안에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질그릇에 집착하고 그것을 꾸미고 가꾸는 동안 내안에 빛나고 있는 참된 보석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나를 참되게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질그릇을 꾸미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보석이 빛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인도하고 나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으로 인한 거룩한 뜻을 품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로소 질그릇의 투박함이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 보석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군대 이야기 하나 해드리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저는 군대 생활을 공군 교육 사령부에서 의장대장으로 지냈습니다. 사병 20명 정도와 함께 생활하면서 공군의 각종 행사를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마도 이것을 잘 모르실 겁니다. 사병들 간에도 나름대로의 등급이 있었습니다. 의장사병을 뽑을 때는 키가 178cm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178이면 지금도 큰 키 아닙니까? 그런데 의장대 내에서는 그런 키를 가지면 어김없이 ‘땅콩’이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그리고 행사에서 제외됩니다. 키가 작아서 폼이 안나는 것이지요. 사무실에 앉아서 행정일만 봅니다. 183-4cm 정도가 되면 모든 행사에 투입됩니다. 특히 별이 뜨고 열병을 하는 행사에서 차 문을 열어주는 Door병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키 185cm 정도에 미끈하게 빠진 몸에 얼굴까지도 잘생겨야 합니다. 한 사병이 제대하고 나면 서로 그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왜 그럴까요? 기왕에 의장 사병으로 복무할 바에야 좀 근사하고 폼 나게 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땅콩들을 어땠을까요? 불쌍해서 가끔 초등학교에서 행사를 할 때 의장쇼를 할 수 있도록 넣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제대할 때까지 뭔가 불만스런 표정과 알 수 없는 열등감을 가지고 지내게 됩니다.


여러분! Door병과 땅콩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같은 계급, 같은 기간, 같은 의장대의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릅니다. 한 사병은 의장대가 할 수 있는 가장 폼 나는 일을 하고, 다른 한 사병은 의장대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일을 합니다.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것이요, 그 다름 때문에 한 사람은 자부심을, 다른 한 사람은 불만과 자괴감을 가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아니 자신을 사랑할 줄 아셔야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더 예쁘고 멋있게 꾸미면 됩니까? 더 돈을 많이 벌까요? 더 자기 벽을 높이 쌓고 누구도 나를 괴롭힐 수 없는 벽을 만들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보석으로 일하게 해야 합니다. 보석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 보석 때문에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우리의 목숨을 걸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나를 참되게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욕심내고 즐기고 이기적인 선택을 반복하는 것은 복음이 없어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보석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 정도에 우리의 인생을 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심고 살며 섬기며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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