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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5. 목숨 걸고 사랑하라 - 3. 이웃을 사랑하다. 이응도 목사 201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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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25.

* 본 문 : 누가복음 10장 25-37절 말씀

* 제 목 : 목숨 걸고 사랑하라 - 3. 이웃을 사랑하다.



지난 주에 기도원에 다녀왔습니. 여러분이 잘 아시는 뉴저지 평화기도원입니다. 그 기도원을 섬기시는 남자 집사님은 기도원 주변에 농사를 많이 지으십니다. 그리고 식사를 할 때마다 농사짓는 재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땅은 정직해서 농부의 땀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말을 농부들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한 가정에 심방을 할 때에도 절대 배반하지 않는 것 하나를 만났습니다. 바로 진돗개였습니다. 진돗개의 충성스러움은 세계가 다 알지 않습니까? 꼭 진돗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애완견 혹은 반려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같은 말을 합니다. “사람은 배신하지만 동물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돌을 모으는 분들도 같은 말을 합니다. 돌은 한결같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좋다고들 합니다. 산을 찾는 분들도 그렇습니다. 변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는 한결같은 모습이 좋아서 산을 오른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무엇인가 슬프지 않습니까? 우리는 변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늘 배신을 한다는 겁니다. 친구도, 가족도 나를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도 변하고 우정도 식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찾아다닙니다. 사람이 주지 못하므로, 사람은 상처와 아픔만 남기므로 때로는 동물에게, 때로는 땅에게, 바위와 산에게서 변치 않는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한국 교회 성도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다면
“착하고 충성된 종(a good and faithful servant)”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착하고 충성된 종”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신뢰할만하고 한결같은 믿음을 주는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돌이나 산을 찾지 않아도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 “그렇지... 저렇게 한결 같아야지. 저렇게 의리가 있어야지... 저렇게 신실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요즘 날로 교회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는 시대, 믿지 않는 사회가 믿음을 가진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 좋은 이웃이 되는 믿을만한 삶’입니다. 바위와 같이, 산과 같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1. 누가 내 이웃입니까?


본문에서 율법사의 처음 관심은
‘영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그의 질문은 초점이 바뀝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들은 누구를 자신의 이웃이라고 여겼을까요? 그들의 ‘이웃’에 대한 생각은 매우 계급적이며 차별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누가 이웃인지, 이웃이 될 수 없는지 결정되어 있었고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개념과 확실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1-3의 말씀을 봅시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눅 15:1-3)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비유가 100마리 양 중에 잃은 한 마리 양 비유, 열 개의 드라크마 중에 잃은 한 개의 드라크마, 아버지와 집을 버리고 떠났다가 돌아온 두 아들 중 한 아들의 비유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예수님의 말씀에는 뼈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죄인과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이미 그 상황 속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더 기가 막힌 것은 눅 18:10-14의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0-14)


그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교회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발끝에도 따라올 수 없는 사람들이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한 선생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 사람(세리)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버림당해야 마땅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는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요, 이웃이었습니다. 자신들만이 구원 얻을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자신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그가,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웃이 누군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이웃이 누군지, 그것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웃과 어떻게 다른지 말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은
“당신은 이웃은 누구입니까? 저 세리와 죄인들입니까? 우리들입니까? 당신은 과연 누구의 편입니까?”라는 질문과 같은 뜻입니다.


2.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예수님은 그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한 상인이 예루살렘에서 사미리아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쓰러져서 도움을 청합니다.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갑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가 죽어가고 있을 때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멸시 당하던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갑니다. 그는 강도만난 자를 치료하고 여관에 데려다 줍니다. 여관에서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비용이 모자라면 돌아올 때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비유를 들으면서 ‘음... 그래,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나 던지십니다. 이 질문에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이 했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면, “강도 만난 이가 너의 이웃이다.”로 대답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성도 여러분! 이 질문은 성경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입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 이 세상 가운데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의 참된, 변하지 않는, 끝까지 책임지는, 많은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을 구원하는 선한 이웃일까요? 예, 오직 한 분 예수님입니다. 누가 그 이웃됨을 스스로 포기하고 거절하고 있을까요? 그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들과 죄인들을 가르고,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를 물었다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들의 이웃이냐?” 만일 이 질문이 우리들에게 던져졌다면 어떤 질문일 것 같습니까?
“누가 너희들의 이웃이냐?”입니다. 너희를 구원해주는 참된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3. 가서 너도 참된 이웃이 되라!


바리새인이 겨우 입을 열어 말합니다. 아직도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못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이제 바리새인도 압니다. 예수가 이겼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의 처음 질문과 연관시켜 보십시오. 구원은 율법의 성취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백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신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요?
“너도 나처럼 하라. 너도 내 편에 서라”는 것입니다. “너도 나와 같이 이 죄인들의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처럼 너도 이웃을 위해 목숨 바쳐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그리하면 영생이 너의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 세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먼저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은 강도 만난 자입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만족하고 예수님의 길을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생에 관심이 있으면서 영생의 길을 외면하는 사람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사마리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나가는 사람인가요? 예수님은 모든 인생이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강도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역시 모든 사람입니다. 인생길 가운데 우리는 서로에 대해 나그네이며, 서로에 대해 길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레위인이기 때문에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다 서로에 대해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고 서로를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자, 마지막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누구일까요? 예, 예수님이 그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우리들 모두를 그 자리에 세우십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인가 하면 스쳐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삶을 살기도 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비유 속에서 사마리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선한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 어떤 사람이든 삶의 여정에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이 이야기 속에서 선한 사미리아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이웃됨은 이미 존재하는 관계, 확증되어 있는 관계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서 획득되는 관계, 이루어져가는 관계인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나그네되고 또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이웃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웃됨은 매 순간 우리들의 삶의 선택의 결과인 것입니다.


4. 우리들의 ‘여러분’


가수 윤복희씨의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이 노래를 작곡한 윤항기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동생을 위해서 노래를 만드는데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 말씀을 펼쳐놓고 곡을 완성했습니다.... ‘여러분’이란 노래는 영어 가사로 보면 가스펠입니다. 한국에는 종교적인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서울 국제 가요제에서는 1절은 한국말로 2절은 영어로 부르게 되어있었습니다.”


‘여러분’의 2절 영어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When you walk through the cloudy days, 당신이 어두운 날들을 방황할 때

He said, I will be the one to be your cane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지팡이가 될께

when you need someone to share you love, 당신이 그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할 때

He said, I'll the one to be your love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사랑이 되어줄께

So smile and look at me, I will tell you what, 웃으며 나를 보세요 당신에게 말해줄 게 있어요

every every everybody's passing through this way 모든 사람이 이 힘든 길을 지나간답니다

so have faith and be tall, you can't stop now 담대하게 믿음을 가지세요 멈출 수는 없잖아요

now is the start, this is the way, only way 지금 다시 일어서세요. 이 길이 바로 그 길입니다

We've got to march, and go to high up there 이 길을 가야해요 더 높은 곳으로 가야해요

He is the start and he is the way, only way 그와 함께 시작해요 그가 바로 길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의 백미는 마지막 나래이션입니다. “만얀 내가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을 “서로 친구가 되자”정도로 해석하면 유행가가 됩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gospel로 이해하면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의 친구가 되고 위로가 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경험한 우리들은 서로에 대해 참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가난한 영혼을 위로할까요? 바로 “여러분!”입니다.


저는 제가 섬기는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많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고 또 존경합니다. 또한 이 교회는 성장하고 변화해야 할 부분이 많은 교회입니다. 각 교회마다 받은 은사가 다르고 사역의 초점이 다를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성장해야 할 부분은 오늘 나눈 이 말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고의 전환이 이뤄져야 합니다. 신앙의 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나를 위한 신앙, 내가 구원받는 신앙, 내가 행복해지고 내가 유익을 얻는 신앙에서 벗어나서 이제 내가 주님의 이웃이 되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이 있는 교회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시고,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목숨 바쳐 사랑해주셨던 것처럼,
“가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는 교회”, 우리도 먼저 이웃이 되고, 먼저 눈물이 되고, 먼저 상처가 되고, 먼저 아픔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내가 그들의 아픔과 눈물이 되어주기를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보면서 나를 보호하고 방어하려 해서도 안됩니다. 연약한 성도들에게 이웃됨으로 한걸음 다가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연약함이 있는 성도를 소외시키고, 건강한 사람끼리 편하고 빠른 길을 걷고자 할 때 우리는 어느새 우리의 신앙과 삶의 자리를 ‘가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아니라, 제사장처럼, 레위인처럼, 바리새인처럼 외면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윤복희씨가 부르는 ‘여러분’이라는 gospel를 들으면서 마칠까 합니다. 가사를 음미하시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이웃이 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늘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들 또한 그 사랑과 은혜로 서로에 대해 좋은 이웃이 되며 세상에 대해 선한 이웃이 되는 성도와 가정과 교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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