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9.
* 본 문 : 엡 3:14-19
* 제 목 : 영적 성장 - 1.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라.
‘포세이돈 어드벤쳐’라는 영화를 아십니까? 1972년에 만들어진 영화로 실제로 일어났던 해상 재난을 소재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 시기에는 유명한 재난 영화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타워링>, <대지진>, <포세이돈 어드벤처> 등이 있습니다. 이런 영화들은 일정한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삽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재난으로 무질서에 빠지고, 이어서 일련의 복잡한 시련들이 닥쳐옵니다.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방향을 잃고 서로 갈등하게 됩니다. 위기가 극에 달했을 때 그 모든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한 명의 지도자가 출현합니다. 사람들이 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결국 재난을 극복합니다. 포세이돈 어드벤쳐에서는 진 핵크만이 목사로 등장합니다. 그는 침몰하고 있는 배 속에서 냉정하고 차분하게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희생해서 많은 사람들 살립니다. 재난 영화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영화와 비슷한 상황 속에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구약의 선지자 요나요, 다른 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들을 만나보실까요?
1. 풍랑 속의 두 사람
여러분은 요나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구약의 유명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고 당시 가장 강대국이면서 이스라엘을 핍박하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곳에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악하게 살지만, 만일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가기로 결심합니다.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요나, 그는 배 밑창에 숨어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난리가 났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풍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지중해 바다가 뒤집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살겠다고 발버둥칩니다. 각각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둥대며 살 길을 찾던 선장이 배 밑에서 자고 있던 요나를 발견합니다. 그는 황당하고 화가 나서 요나를 꾸짖습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욘 1:6)
적어도 선장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승객들과 선원들에게 각자 믿는 신에게 기도하게 하고, 요나를 깨워서 역시 기도하게 했습니다. 풍랑이 이는 정확한 원인은 몰랐지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결정합니다. 이 풍랑이 왜, 누구 때문에 왔는지 제비를 뽑기로 합니다. 요나가 뽑힙니다. 결국 요나는 자기 때문에 이러한 풍랑이 온 줄로 고백하고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로마에 죄수로 호송되고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탄 배는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가는 중에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납니다. 배가 부숴지고 표류하여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파도는 여전하고 육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희망을 잃고 죽음을 준비합니다. 그때 죄수의 신분인 바울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행 27:22-27)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풍랑은 오히려 하나님을 증거하는 기회가 됩니다. 선원들과 군인들, 심지어 죄수들까지 바울의 말을 믿고 희망을 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입니다. 말씀을 전합니다.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차이점이 있습니다. 문제를 대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한 사람은 도망하고 잠을 자려하고, 한 사람은 모두가 낙망할 때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역할이 다릅니다. 한 사람은 이방인들로부터 꾸중을 듣습니다. 요나가 자신이 불순종해서 이런 일이 닥쳤다고 고백하자 이방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게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다른 말로 하면 “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방인에게 들을 말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다릅니다. 그는 당당하고 지혜롭습니다. 풍랑 속에 있는 배와 공황상태에 빠진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과 앞으로 있을 일들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 앞에 닥친 문제들에 대한 내면의 성숙도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2. 에베소 교회에 대한 바울의 권면 - 성장하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는 ‘전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이 없는 지역으로 가서 구원의 복음을 전했지만, 각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서 그들의 성장을 권면했습니다. 바울이 보낸 각 편지들은 모두 성도와 교회의 성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장이라고 하면 교회의 양적인 부흥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성장은 그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초점은 바로 성도와 교회의 내면의 성장, 즉 속사람의 성장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바울은 같은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3-15)
사도 바울의 권면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쉽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요나는 당시 한 시대를 책임지는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순종하고, 이방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의 삶의 모습이 이렇게 비참합니까? 그에게 자신의 성품과 기질, 가치관과 상식을 넘어서는 성숙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선지가가 성숙한 신앙이 없다니요? 그럴 수도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으십니까? 예, 당연히 있습니다. 적어도 요나는 신앙의 다른 많은 면에서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는지 몰라도 그가 가진 선민의식과 분노, 정죄하는 마음 등에는 마치 어린 아이기 떼를 쓰는 듯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서 4장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욘 4:9)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고 도망가고 잠자고 성냅니다. 성장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가 먼 나라의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실은 우리들 모두가 늘 저지르는 실수가 요나 속에 숨어 있습니다. 내가 가진 내면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아서 발버둥치고 죽겠다고 울부짖는 일들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손가락질하고 비판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내면의 성숙의 문제인데 말입니다.
3. 성장의 초점, 속사람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회와 성도의 속사람, 내면의 성숙과 성장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 부분에서 실수를 합니다. 성숙과 성장의 초점을 눈에 보이는 것에 맞추기 때문에 정작 우리의 내면이 황폐할 때가 많습니다. 정작 영적 성숙과 성장은 우리의 나이나 성별, 지위나 직분과 무관합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상황 속에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좋은 예를 다윗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를 보십시오. 사울왕을 비롯한 모든 군인들이 골리앗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 다윗이 그 모든 상황을 정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4-47)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 가장 성숙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울왕입니까? 왕의 장군들입니까? 여섯이나 되는 다윗의 형들입니까? 아직 어리고 연약한 다윗이었습니다. 그의 성숙함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의 고백에 잘 나타납니다. 그는 그 마음 속에 하나님과 교통함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 하나님의 이름을 품었습니다. 성도의 성숙과 성장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알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곧 성숙이자 성장인 것입니다.
4.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라.
따라서 성도 여러분! 성도와 교회의 참된 성장은 사람의 힘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4장에서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지라!’라고 권면하는 바울은 3장 오늘 본문에서 그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16절을 봅시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내면이 건강해지기 위해 우리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셔야 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힘으로 싸웠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각과 지혜로 배를 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약할 때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번 주일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성장’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주제를 함께 나눌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두가지가 깊이 새겨지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능력’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의 ‘속사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속사람의 성장이 우리의 삶의 성장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이 없는 모든 성장은 병드는 것입니다. 내면의 성장이 없는 모든 성장 또한 병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날마다 더욱 성장하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날마다 풍랑 속에 삽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날마다 바람이 몰아칩니다. 교회도 날마다 흔들립니다. 이 사회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각자 자기 살 길을 찾아 우왕좌왕하며,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기도 하며, 자신을 해치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이때 누군가 성숙하고 지혜로운 선택과 판단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일까요? 누가 다윗이 되고, 누가 바울이 되어야 할까요? 바로 여러분과 저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배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통해서 하나님의 보여주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내가 연약한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라고 생각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을 때 본질적으로 점점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구원과 언약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함께 성장하고 함께 협력하며 함께 섬기는 아름다운 성도로 우리가 서로를 만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이 풍랑 이는 세상 가운데 우리를 붙드시고 신실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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