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30.
* 본 문 : 에베소서 3장 14-19절 말씀
* 제 목 : 영적 성장 - 4. 그 사랑을 붙들다.
몇 년 전 어느 교회 집회를 초청받아 간 일이 있습니다. 교회마다 문화가 있기 마련인데 그 교회는 우리 교회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특히 담임 목사님은 나이는 저와 같은데 목소리의 굵기나 표현만으로 보면 10년 이상 연배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첫 만남에서부터 뭔가 저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방문했을 때 저기서 누군가가 두 팔을 벌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저를 꽉 끌어안고는 “목사님, 사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었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표현.... 약간 어색하기는 해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금요일 저녁 첫 집회를 마쳤습니다. 그 목사님은 저를 예배실 입구에서 성도들과 인사를 시켰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평소에 저는 거의 형제들과는 악수를 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매들과는 목례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당황했던 것은 그 목사님은 성도들과 허그를 하는 분이셨습니다. 물론 형제들과 찐하게 등을 두드리면서 허그를 하고, 연세가 있으신 할머니들과도 격하게 허그를 하고, 자매들에 대해서도 악수를 섞어가며 허그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인사 끝에 늘 굵은 저음으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사 끝에는 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잘 모르는 분들과 허그를 하는 것이 너무 어색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먼저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청하고 성도들이 먼저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저도요....” 혹은 “저도 사랑합니다.”라고 답변을 하고, 아니면 “반갑습니다.”라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고맙게도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하면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이 교회는 정말 사랑이 많고, 표현이 풍부한 교회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당회장실에서 차를 마셨습니다. 어떻게 저를 집회에 초청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알고 보니 교회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두 편으로 나눠져 있었고, 목사님은 다른 편에 대해 대단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매년 그 기간에 하는 집회였기 때문에 어느 목사님을 강사로 섭외했는데, 그것이 목사님 반대편에 있던 분들에게 마땅치 않았던가 봅니다. 결국 상담을 한다는 목사를 강사로 모시면 괜찮겠다 싶어서 잘 모르는 저를 강사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3일간 숙소로 가는 길, 교회당으로 오는 길에 저를 태워주셨던 장로님은 정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목사님을 비난했습니다. 목사님 편을 드는 설교를 하지 않아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집회를 하는 내내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의 서로에 대한 비난은 계속되었고, 집회를 마칠 때마다 “사랑합니다.”와 찐한 허그 또한 계속되었습니다.
집회를 한 지 7개월이 지나서 그 목사님은 아주 가슴 아픈 과정을 거쳐서 사임하셨습니다. 교회 또한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랑의 표현이 그렇게 많았던 교회인데, 사랑을 마음과 삶에 뿌리내리게 하고, 사랑의 열매로 서로를 섬기는 일에 크게 실패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1. “사랑합니다.”의 함정
사실 알고 보면 요즘처럼 사랑에 대한 표현이 많은 시대는 없었습니다. 사랑은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해야 하며, 많이 고백할수록 좋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표현과 고백이 마음 깊은 곳에 담긴 참된 사랑과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오히려 관계를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으면 불안하십니까? 그래서 그런 표현을 강요하신 적이 있습니까?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 모릅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내가 해야 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역시 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 모릅니다. 그 표현으로 “나는 지금 당신에 대한 나쁜 의도나 해칠 의사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역시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런 표현으로 어색함을 감추려 한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들어도 또 들어도 좋은 말이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과 삶에 깊이 내린 뿌리가 없다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에 숨어 있는 함정에 속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생각과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에 대한 불안함이나 심리적인 연약함을 그 고백으로 덮어두려고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관계가 불안할수록 더욱 헌신하고 수고할 일입니다. 참된 사랑의 실천이 있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성도들과의 관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이 믿음에 뿌리내린 사랑, 그리고 지식을 넘어서는 사랑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그 사랑에 의지해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분쟁과 다툼이 끊임없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사랑,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사랑은 단순한 고백의 차원이 아닌 마음의 진실과 삶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의미를 알고 붙드는 능력, 그 사랑에 자신의 삶을 묶어두는 것 -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 지식으로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참된 의미를 깨닫고 알아서 그 능력이 관계와 삶에 나타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8-19上)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다.
바울의 표현은 참 적절하고도 재미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지중해 연안의 무역이 성행하던 도시로 행정과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는 에베소에 도시를 건설했고, 아직도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을 그 당시 로마가 에베소에 건축했던 아름답고 완벽한 건물에 비유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진 1 - 에베소 교회)

1) 사랑의 너비
하나씩 생각해 볼까요?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의 너비를 먼저 말합니다. “I pray that you may have power to grasp how wide Jesus' Love is"의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넓은 사랑을 붙드는 능력을 가지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기도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시대, 그리고 초대교회에 이르기까지 계속 논쟁했던 것은 구원의 범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제기했던 문제는 소위 죄인들에 대한 구원의 여부였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은 영생을 질문하는 바리새인에게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통해서 그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구원은 혈통이나 신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개념은 이미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항의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 4:10-11)
요나의 시대에도 열방을 품으시는 사랑을 제한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요나는 선민의식으로 가득찬 이스라엘의 편협한 사랑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열방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의 제 2차 전도 여행의 열매였고, 아볼로와 바울이 목회했고, 말년에는 사도 요한이 목회한 교회입니다.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넓은 사랑의 상징과도 같은 교회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장벽이 없습니다. 시대의 구별이 없습니다. 한때 범죄했다고 해서 그 문이 닫히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사랑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닫힌 문이지만,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넓고 견고한 구원의 길이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요, 우리들의 구원의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사랑의 길이
몇 달 전에 이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저는 이 본문에서 ‘끝까지’라는 말을 두 가지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는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을 설명하면서 ‘긴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 죄와 악함을 넘어서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한 때 부모님의 속을 상하게 하고, 비행청소년이 되었다고 해서 부모님이 나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는 것처럼, 이미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은 시간적으로도 영원합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길게 길게... 오래오래...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영어 본문으로 보십시오. 바울의 기도는 에베소 교회가 사랑의 길이를 깨닫고 알아서 그 사랑을 붙드는 능력을 얻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길이를 알고 이 사랑을 붙드는 능력이 있는 성도는 어떤 시련이 와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랑에 길이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이 놀라운 사랑의 길이에 대한 깊은 묵상과 믿음이 있어서 이 믿음으로 어떤 고난도, 시련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사랑의 높이
저는 사랑의 높이를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사랑,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면서 ‘거룩한 사랑’입니다. 사람의 행위나 사람의 삶의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약속으로 결정되는 사랑입니다. 이사야 44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사 44:1-2)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자 후손으로서 나라 전체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여수룬'이란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시적인 표현으로서 '정직한 자, 의로운 자, 사랑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삶 전체를 의롭게 받으셨다는 의미로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뜻하는 이름을 각각 다르게 부름으로 더욱 친근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십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나아가서 야곱은 그리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의 삶의 결과 혹은 행위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되는 것이라면 아마도 야곱 혹은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 삶의 열매가 그들의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약속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결정합니다. 그들의 죄와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열쇠인 것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만일 우리의 삶의 열매로 우리의 구원이 결정된다면, 우리의 현재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된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의 quality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에 있는 사랑과 약속에 근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사야 44:1-2의 말씀을 여러분과 제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이 능력의 복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낙심이 되거나 쓰러지려 할 때에 이 복음을 궅데 붇들고 다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4) 사랑의 깊이
마지막으로 사랑의 깊이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런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으로 방탕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선언하고 재산을 나누어 집을 떠납니다. 모든 재산을 탕진한 후 그는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아버지 집에 돌아옵니다.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받아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후 단 한 번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저 멀리 아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맨발로 뛰어나가 아들을 끌어안습니다. 저는 사랑의 깊이 즉 우리 주님의 ‘깊은 사랑’을 ‘가슴에 품은 사랑’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의 우리들을 향한 뜨거운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사랑입니다. 너무 깊이 묻혀 있기 때문에 때로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때로 나타나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의 어떤 연약함이나 악함이나 배반이나 패역에 흔들리지 않는 깊고 깊은 가슴에 뿌리내린 사랑입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을 표현할 때 “그 사람 참 속이 깊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속 깊은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예, 상황이나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변함 없는 모습으로 사람을 대할 줄 아는 사람을 깊은 속을 가진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의 형편이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마음이 깊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떠났지만 그것을 악함으로 해석하지 않고 연약함으로 보고 날마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깊은 사랑, 아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책망하고 꾸짖기보다 수치를 주지 않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어 아들을 세워주는 속 깊은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삶의 조건이나 상황이 아닌 기본적인 관계에 뿌리를 내린 사랑이 하나님 아버지의 깊고 깊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 깊은 사랑을 받고 있고,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깊고 깊은 가슴에 뿌리는 묻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3. 그 사랑을 붙들다.
지난 주일과 이번 주일 설교에 사용하고 있는 영어 본문을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you may have power to grasp how wide and long and high and deep is the love of Christ,”(엡 3:19)
그리고 이 사진을 한 번 보십시오. (사진 2,3 - 암벽 2,3)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다시 영어 본문을 보시겠습니까? 바울은 지금 기도합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또 하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you may have power to grasp how wide and long and high and deep is the love of Christ,”, 즉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 지를 깨달아 알고 그것을 붙들 수 있는 능력 얻기를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붙드는 능력이 바로 암벽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90도를 넘는 깎아지른 암벽에서 밧줄을 붙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밧줄을 붙드는 능력, 그것이 내 생명줄임을 믿고 결코 놓지 않는 믿음이 암벽 등반을 할 때 필요한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알아서 그 사랑을 결코 놓지 않는 참된 믿음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사랑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를 더욱 묵상하시고 더 많이 경험하시고 더 많이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의 사랑의 능력에 매인 바 되고, 우리 주님의 사랑에 하나가 되어 세상의 어떤 시험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아름다운 교회와 성도, 거룩한 사랑의 가정과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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