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7. 추수 감사 예배
* 본 문 : 전도서 3장 11절 말씀
* 제 목 : 가장 깊은 감사
지난 한 주간, 어려운 시간을 보낼 때 많은 분들이 위로해주셨습니다. 그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다 감사를 드립니다. 그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어제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제 마음을 정리해서 쓴 글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글에 하나쯤은 달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답글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입니다.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에는 전해지는 유래가 있고, 시가 한편 있습니다. 차례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궁중의 세공인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나를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어라. 그 반지에는 내가 큰 승리를 거둬, 기쁨을 억제치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기도록 해라. 또한 그 글귀는 내가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를 함께 줄 수 있는 글귀여야 하느리라."
세공인은 명령대로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기는 했는데, 큰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두가지를 만족시키는 글을 찾는단 말입니까? 고민하던 그는 솔로몬 왕자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왕자님, 왕의 큰 기쁨을 절제케 하는 동시에 크게 절망했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솔로몬 왕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글귀를 넣으세요.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아버님이 승리에 도취한 순간에 그 글을 보면 자만심은 곧 가라앉을 것이고, 아버님이 절망 중에 그 글을 보게 되면 이내 큰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근거해서 랜터 윌슨 스미스라는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 짓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할 때
근심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적인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이 진실을 조용히 가슴에 새기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아니나 다를까 어떤 분이 제게 용기를 얻으라고 권면하신 말씀이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슬픔도 고통도, 기쁨도 영광도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쉬운 말로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문구는 “시간이 약이다”는 말의 고급스런 버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1. 시간 속에 두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말.... 틀린 말입니까? 아닙니다. 보편적으로 우리에게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실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4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허락하신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3)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4) 하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사람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잘 아실 겁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셨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좀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만 자, 한번 깊이 생각을 해 봅시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을 누가 암송해보시지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천지’란 1차 적으로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그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과 함께 또 하나를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시간 밖에 계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시간 속에 두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 11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11시라는 것은 누가 정했을까요? 예, 이것은 사람들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시간을 허락하시고, 사람은 그 시간 속에서 규칙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어서 1년, 12개월, 30일, 24시간, 60분을 약속으로 정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는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시간의 질서를 따라 살게 하셨고...”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나게 되는 인생의 모든 변화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름답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년 인생을 살 때는 그 때가 가장 아름답고, 20년 인생을 살 때도 그 때가 가장 아름답고, 40년도, 60년도 바로 그 때가 가장 아름다운 때입니다. 만일 그 인생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면 말입니다. 만일 그 때가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2. 가장 아름다운 은혜
중요한 것은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시간은 사람의 것이요, 영원 즉 시간을 초월한 상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시간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시간을 창조하시고 시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사모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시간 속에 사람을 지으시되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소망을 함께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가장 높은 벽,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아쉬워도 우리는 시간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시간과 더불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사랑은 국경도 넘고 혈통도 넘고 신분도 넘을 수 있었는데, 시간은 넘지 못했습니다. 시간은 인간에게 생명의 개념으로 찾아왔고, 죽음이라는 시간의 극단적인 모습은 인간이 결코 넘을 수 없는 경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더 이상 시간이 장벽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죽음조차 아름답게 하시는 그 뜻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알게 하셨습니다. 시간이 누구의 뜻 가운데 있는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흘러도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요, 하나님이 아름답게 하신 영역에 포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시간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 자신을 사모하는 마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시간 속에 있을 때는 불행이라 여겼던 모든 것들이 시간 너머 영원의 세계에서 감사와 찬양으로 회복되는 놀라운 경험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3. 알 수 없게 하시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뜻을 아시겠습니까? 이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허락하신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늘 힘들어하고 늘 슬퍼하며 늘 고통스럽다고 말하며 살고 있을까요?
본문이 말하는 네 번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때를 따라 섭리하시는 일을 사람이 잘 알 수 없도록 숨겨놓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없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판단에 대해 시간의 커튼을 쳐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의 커튼 속에 사는 사람들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지혜는 바로 “시간이 약이다”라는 것입니다. 고통이 찾아오고 시련이 찾아오면 이것 또한 지나갈 것이고, 어느새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딱히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몸으로 견뎌내고 삶으로 부딪히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게 하셨기 때문에 시간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지난 금요일, 상담을 하는 한 분이 늦게 소식을 알았다며 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1년 넘게 큰 어려움 속에 있는 분입니다. 믿음으로 담대하게 이기려고 노력하지만 매일 새로운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그동안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일이 거듭 닥쳐오는데,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슬퍼하고 원망하고 분노했어요.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까 그동안 철없었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성장해 있었어요. 나는 헤매고 있는데 아이들은 성장했어요.”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삽니다. 내가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어려울 때도, 잘 될 때도,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일을 할 때도 시간은 흘러갑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언제까지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다음에 또 어떤 일이 다가올지는 더 모릅니다. 헤매며 삽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도, 아니 언제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아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 뜻을 따라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시간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영원’의 향기를 느끼게 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시간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시간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섭리하며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때를 따라 지으신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게 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4. 가장 깊은 감사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깊은 감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간의 장벽 앞에서 고통의 눈물을 뿌리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의 향기를 맡게 하신 일, 영원을 사모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주신 일, 이 땅을 살면서 하늘을 꿈꾸게 하신 일, 시간에 걸려 넘어지지만 시간을 넘어 훨훨 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일 -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요 복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그저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아름다운 영원의 향기를 맡지 못한다면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약으로 생각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게 하시고, 우리가 사는 모든 날을 아름답게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을 깨달을 때 때로 고통도 아름답고 때로 슬픔도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때로 눈물도 필요하고 때로 아픔도 성장의 거름이 됩니다.
지난 주에 제게 있었던 일 하나를 간증하고 오늘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지난 주, 치과 치료를 받던 중에 저도 모르게 혀를 깨물었습니다. 마취 때문에 아픈 줄을 몰랐는데, 치료를 마친 후 마취가 조금씩 풀리면서 어디가 아픈지 정확하지 않은 통증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문득 제 마음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토요일 새벽 2시 반, 아버지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교회 사무실에 나왔습니다. 멍하게 앉았다가 새벽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수련회 현지 답사를 가야했고, 구세군 교회에서 부탁한 아씨 마켓 앞에서 모금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설교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아...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제 마음을 마취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아쉬운 죽음과 이별의 시간에 오히려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여러분들과 눈 맞추지 않고, 말을 섞지 않기로 했습니다. 누군가가 위로를 한다고 눈물을 흘리면 빨리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모든 과정들이 흘러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예배도, 그렇게 천국 환송 예배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의 인사도 흘러갔습니다.
지난 수요일 즈음, 조금씩 마음을 묶어둔 마취가 풀리고 있었습니다. 문득 눈물이 흐르고, 문득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천진하게 뛰어노는 제 아이들을 응시하고 있고, 아내의 손을 잡게 되고, 사람 만나는 일이 더 힘들었습니다. 뿌리를 알 수 없는 죄책감같은 것이 저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만져야 할지 모르는, 깊은 통증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치과 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치료 받았던 이와 깨물었던 혀가 아파왔습니다. 마취가 풀리는 일은 분명히 필요하고 좋은 일일 것인데, 비로소 통증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쉽게 알았습니다. 쓰리고 아픈 상태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던 마취 상태보다 더 건강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 과정을 지나야 제대로 말할 수 있고, 제대로 맛을 느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잠시 통증을 멈추는 것도 지혜이지만 그 통증을 차근하게 담담하게 느끼는 것도 치료의 과정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 마음을 묶었던 마취가 풀리면서 제가 더 깊이 느끼게 된 고통도 그런 것입니다. 마취가 풀리면서 통증을 느끼지만, 또 마취가 풀려야 맛도 느끼게 됩니다. 마취도, 통증도 치료의 한 과정이듯 제 마음의 고통도 하나님께서 저를 만지시는 과정일 것입니다. 아무리 다잡아도 여전히 아프고 쓰린 이 마음, 제가 경험하고 알아야 할 인생일 것입니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야 말할 수 있고, 맛 볼 수 있고, 제대로 씹을 수 있는 것처럼, 고통도 슬픔도 제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제 인생의 중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달고 고소한 맛만 있는 것이 아니듯, 행복하고 좋은 기억만이 제 인생은 아닐 것입니다. 쓰고 신고 매운 맛과 어울려 좋은 음식이 되듯, 하나님이 만드시는 제 인생은 또 그렇게 어울려 질 것입니다. 내 인생의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향기를 맡을 때 비참하고 추한 인생이 아니라,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번 감사절에 처음 좀 색다른 감사를 드렸습니다. 제 삶에 지울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향기를 맡게 하시고, 시간이 허락한 그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을 경험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깊은 감사는 가장 깊은 고통 속에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2011년 추수 감사주일에 우리에게 그 마음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욱 깊은 감사를 드리며 더욱 깊은 사귐을 기도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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