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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11. 주님의 기쁨 - 2. 가치 충돌 이응도 목사 20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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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11.

* 본 문 : 로마서 7장 21-25절, 8장 8-9절

* 제 목 : 주님의 기쁨 - 2. 가치 충돌


가일이가 지금 성일이만 할 때, 그러니까 6-7년 전이었습니다. 하루는 제 주변을 자꾸 맴돌면서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부활 주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교회 유년 주일 학교에서는 플라스틱 계란 안에 초콜릿과 캔디를 넣어 줬더군요. 호시탐탐 그 캔디와 초콜릿을 노리고 있던 가일이는 드디어 그날 결단을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빠~~"


제게 몸을 비비면서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다가왔습니다.


"가일아, 왜?"


"있잖아~~, 나는~~ 꼭 하고 싶은 게 두 가지 있어."


"뭔데?"


"있잖아, 나는... 이스터 에그 안에 들어 있는 초콜릿과 꿈틀이도 먹고... 이도 안썩고 싶어."


제 웃음이 터졌습니다. 푸하하하... 웃다가 왜 그러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사실 그 이유는 뻔한데 말입니다.


그 얼마 전에 가일이는 치과에 가야 했습니다. 벌써 빼버린 어금니까지 포함하면 10개 가까이 충치가 있었는데, 한 달 간격으로 계속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해왔고, 이제 남은 두개와 이미 빠진 어금니 공간을 메우는 일만 하면 되는 상태였습니다. 치과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가일이는 작은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회개도 하고 결단도 했습니다.


"아빠, 내가 정말 잘못한 것 같아요. 나는 이제 아빠 말씀 잘 들을 거예요. 이제 캔디하고 초콜릿 하고 안먹을 거예요."


잉잉잉... 눈물도 흘리면서 회개와 결단을 굳게 굳게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가일이는 초콜릿과 꿈틀이, 캔디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터 에그를 향한 가일이의 반짝이는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가지를 다 하고 싶은 가일이, 과연 할 수 있을까요? 과연
달콤한 캔디와 건강한 치아를 함께 소유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 것은 요즘 제가 정리하고 있는 고민과 맞물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요즘 조금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곧 50이 될 것이라는 생각, 내가 교회를 책임을 가지고 섬기고 헌신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잘 정리되고 질서 있는 남은 사역이 되어야겠다는 결론에 쉽게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 제 안에 있는 중요한 가치들을 정리하고, 그것들이 얼마나 서로 잘 연결되고 결합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충돌하는 가치가 내 속에 있어서 서로를 소모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말씀은 ‘가치의 발견’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늘의 말씀은 ‘가치 충돌’이라는 제목으로 나눌까 합니다. ‘주님의 기쁨’이라는 큰 제목으로 나누는 두 번째 말씀입니다.


1. 오호라, 오호라.... - 충돌하는 가치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탄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지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자신을 평가합니다. 여기서
‘곤고한(wretched)’이라는 말은 '비참한, 형편없는, 가련한‘의 뜻입니다. 생각하고 생각해 보니 나는 참 못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고, 사도로 살고 있지만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자신의 영적 현실이 참으로 비참하고 참으로 어이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안에서 가치들이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가치의 충돌을 발견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사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 안에 있고, 늘 발생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것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는가 하면, 불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치가 충돌하고, 갈등이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기 전에 이미 우리는 가치의 경중을 판단하는 또 하나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의 양심을 자극하거나 그 시스템에 도전하는 가치를 만나게 될 때 우리가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 교회는 사회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 핵심에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로 인정받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설립자 조용기 목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이미 그 가족들의 비리와 다툼은 너무도 많이 언론에 노출되었습니다. 조목사님의 은퇴 연기와 후임 목회자와의 갈등 또한 노출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가족은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의라는 가치가 없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분명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충돌하고 있는 또 다른 가치가 그들 안에 있습니다. 가족 이기주의, 내가 교회를 개척하고 세웠으니 내 생각과 주장대로 교회의 모든 일들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들, 교회를 소유물로 여기는 마음들.... 이런 생각과 마음들이 그들 안에 있는 믿음과 충돌하고 싸워서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삶에도 이런 가치들이 충돌하지 않는 영역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성도들을 만날 때나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는 보편적인 성도, 혹은 목회자 가정으로 살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한 부분에서 그들은 가치의 충돌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 가치가 우선일까요? 어느 가치가 그들이 붙들어야 할 참된 가치일까요? 그런데 그들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있을까요?


2. 내가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 중에 걱정이나 근심을 해서 키가 자라거나 환경을 변화시킨 사람이 있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근심이나 걱정을 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체계가 우리들에게 경보를 울리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에 있는 그 가치가 만족되지 않거나 위협을 받는 것이 대한 정서적 반응이 불안함이요, 이성적 반응이 걱정과 염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거룩하고 가치있는 삶을 살지 않고, 늘 걱정하며 근심하며 사는 것이냐?”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걱정거리가 자꾸 생겨요.
저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말씀대로만 살고 싶은데, 잘 안돼요. 말씀을 몰라서 안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싶어도 잘 안되는 것을 어떻게 해요.”


한국에 있을 때 교도소 사역을 하면서 만났던 한 형제가 있습니다. 너무 착하고 선하게 생긴 형제였습니다. 교도소에서 신앙을 잘 배워서 사회로 진출했습니다. 잘 생긴 외모와 타고난 언변으로 좋은 직장에 취직도 하고 돈도 잘 벌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지 않아서 다시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길을 지나다가 차에 열쇠가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를 못한 것입니다. 비슷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일이 있습니다. 곽한구라는 개그맨이 있습니다. 잘 나가는 개그맨이었는데, 2009년에 벤츠를 훔쳤다가 잡혔습니다.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2010년에는 중고차 판매장에서 허머를 훔쳤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에 열쇠가 꽂혀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새 내가 운전을 하고 있었어요.”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요? 여러분의 선택은 누구의 것일까요?
여러분 안에 있는 가치들의 충돌과 그 결과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답은 쉽고 간단합니다. 나의 선택과 나의 판단, 나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나도 모르게.... 나도 어쩔 수 없이....”라고 말합니다.


3. 연약한 나를 바라보며....


여러분이 너무 지나치게 절망하거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은 오늘 성경이 말하는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미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입니다. 바울은 어땠습니까? 늘 당당하게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았을까요?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밖으로 보이는 삶이 아닌, 적어도 그의 내면은 치열한 전쟁터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고, 오직 복음으로 살고자하는 분명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그의 마음 속에 ‘사망의 법’이 함께 있어서 끊임없이 갈등하게 하고, 끊임없이 절뚝거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21절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선’이라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획득된 가치가 나의 소원에 있는데, ‘악’이라는 내가 원래 자기고 있는 본성적인 가치가 내 안에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22-23절에서 이렇게 다시 고백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이 아프게 고백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죄의 법이라는 가치가 하나님의 법이라는 가치를 이기는 상황을 종종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오호라... 이런 비참한 내 인생아!”라며 장탄식을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권면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직면하되 바울을 통해
서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도 우리처럼 연약했습니다. 거룩하고 완벽해보이는 바울 또한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이기지 못해서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하며 힘들어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가치 충돌의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우리 자신을 학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4. 주님과 함께 주님의 기쁨으로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어쩔 수 없다. 바울도 그랬으니까.... 모든 사람이 다 그러니까...” 정도로 스스로 위로하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로마서 8장 8-9절에서 우리를 향하신 두 번째 말씀을 주십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육신에 있다’는 말은 우리의 본성에 뿌리 내린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고, 하나님의 영에 뿌리내린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 처절하게 절망했던 사도 바울이 다시 소망 중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던 바울이 바로 다음 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미 너무도 잘 이해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래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시고, 우리의 소원과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소원과 생각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원대로 살아가면 결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없지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시는 아름다운 가치를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 가정,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치는 늘 충돌합니다. 충돌하는 가치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겠니?” 우리가 대답합니다. “예, 압니다.” 다시 물으십니다. “그렇게 살 수 있겠니?” 우리가 고개 숙이고 대답합니다. “하니님, 무엇이 옳은지는 알겠는데,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참 힘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욕심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그래, 힘들지... 힘이 들게야.... 나는 네가 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진 것만으로도 고맙단다.” 이제 우리가 묻습니다. “하나님, 그러면 저는 이렇게 우왕좌왕하면서 살아도 되는건가요?”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손을 얹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연약하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 안에 있는 거란다. 너희들은 잘 알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거란다. 조용히 눈을 감고 너의 욕심과 본성의 소리가 아닌, 네 안에 있는 나의 음성을 들어보렴. 내가 이미 네 안에 있고, 네 인생의 가치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 있단다.”


바울의 감사가 우리들 모두의 감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우리의 손을 붙들고 주님의 기쁨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주님 허락하신 아름다운 가치로 살아서
주님과 함께 주님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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