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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5. 주님의 기쁨 - 8. 관계 비전 이응도 목사 201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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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5.

* 본 문 : 고린도후서 5장 18-19절 말씀

* 제 목 : 주님의 기쁨 - 8. 예수님의 비전 (5) 화목하게 하는 직분


오늘은 가치와 목적, 그리고 비전에 대해 마지막으로 나누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 대하여 품으신 비전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나눈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우리 주님의 마음 속에 품으신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들 각자에게 ‘가치’에 대해 묻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의 마음에 있는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도, 성도에 대해서도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소요리 문답에서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가치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대한 비전을 품으셨습니다. 첫 번째 비전은 ‘삭개오 비전’입니다. ‘열므나 비전’으로 불러도 됩니다. 이 비전은 ‘한 므나가 열므나가 되는 비전’입니다. 동일한 은혜를 받았지만 그것을 풍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큰 은혜가 허락됩니다. 두 번째 비전은 ‘성찬 실현 비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와 찢으신 살을 기억하며 우리도 헌신하며 나누며 섬기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주님의 비전은 ‘마음 비전’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결단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나눈 네 번째 비전은 ‘인생 계획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인생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남은 계획을 하나님께 맡겨드릴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비전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가치와 목적,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를 채울 영혼들을 향하신 거룩한 비전은 바로 ‘관계’에 있습니다. ‘관계 비전’이라고 불러 봅시다.


1. 성경적 관계의 원리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관계에 대한 최초의 표현은 ‘돕는 배필’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suitable helper'라는 말인데요, 저는 이 단어에 대해서 이전에 여러분과 나눈 적이 있습니다. ’suitable'이라는 단어는 영어의 ‘suit'와 ’able'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몸에 꼭 맞는’의 뜻으로 직역할 수 있겠습니다. suit의 사전적 의미는 ‘정장’ 혹은 ‘특정한 활동 때 맞춰입는 한 벌 옷’입니다. 여기에 ‘할 수 있다’는 뜻의 able이 결합되어 ‘가장 적절한 조력자’라는 뜻의 ‘suitable helper'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관계에 대한 최초의 표현이면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창조원리를 가장 잘 설명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을 허락하실 때 서로에 대한 역할을 ’suitable helper'로 규정하셨습니다. 서로에게 가장 필요하고 서로를 가장 적절하게 도와서 온전함에 이르도록 할 수 있는 관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가정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한글 성경이 번역될 때 이 관계를 가정에서의 관계에 중심을 두고 ‘돕는 배필’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관계는 결혼 관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하와는 아내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구성하는 교회 혹은 사회의 또 다른 구성원이었고, 교회 혹은 사회를 건강하게 구성하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 소그룹이 바로 서기 위해, 성도와 성도가 만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거룩한 관계 속에 있기 위해 기장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협력해야 할 개념이 바로 ‘suitable helper'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관계의 출발은 ‘좋지 않음’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 과정을 마치셨습니다. 세상을 보시니 참 좋았다고 했습니다. 만족하셨습니다. 피조물 자체에 아무런 결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피조물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시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외로움’을 느끼셨습니다. 그에게 누군가가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 채우고 돕고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허락하시고 사람에게 사람의 관계를 허락하신 것은 바로 ‘외로움’에서 출발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서로 돕고 협력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경적 원리를 깨뜨리는 힘 - 분노와 정죄


그런데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 관계는 이러한 성경적 원리가 이뤄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교회, 여러분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인 ‘suitable helper'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안된다구요?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는 성경적 관계의 원리를 깨뜨리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분노이고 다른 하나는 정죄입니다.


1) 왜 다른 사람에 대해 분노하는가?


자, 조용히 눈을 감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2012년에 들어와서 이제 2주가 지나고 있는데 나는 한 번도 다른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말과 생각을 한 적이 없다는 분 있습니까? “저 사람은 왜 저래?” “왜 저렇게 밖에 못해!” 라며 다른 사람에 대한 gossip이나 험담을 하신 일은 없습니까? 나의 기대와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그 사람, 내 생각과 너무 다르고 나와 맞지 않는 그 사람, 나를 실망시키고 수고하게 만드는 그 사람,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분노하고 불평한 일은 없습니까?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게 될까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발견했고,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정당합니까? 예,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정당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복음서의 곳곳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에 대해서, 어린아이와 병자들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그들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그런 삶을 살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그 정도 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마음껏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 그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이 왔다.” 그들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내가 알고 그들을 하나님의 온전하심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가 왔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에 대해 분노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연약한 존재로서의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을 발견했다면, 그래서 그것이 불편하다면 분노하기보다 협력해야 하고, gossip하기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섬기고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이고, 이것이 성도와 교회가 지켜야 할 관계의 원리입니다.


2) 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가?


또한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 정죄합니다. 왜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을 정죄할까요? 여러분은 올해 2012년에 들어와서 다른 사람의 부족함 때문에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한 일은 없습니까? 있다면 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분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정죄하고 심지어 심판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들에게 있는 허물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손가락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할까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다 연약한 사람들이요, 다 부족하며,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성경적 관계가 바르게 서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먼저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볼 수 있어야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있는 연약함이 바로 나의 연약함인줄로 알아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하는 판단과 정죄가 우리 자신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영적 성찰이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 성경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어리석음을 막을 수 있습니다.


3. 화목하게 하는 직분


오늘 말씀 18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그리고 19절에서 같은 내용의 말씀을 다시 반복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에 동의가 되십니까? 결국 하나님은 세상과 자신을, 그리고 세상과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일을 누구를 통해서 한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수를 통해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예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갑니다. 또한 예수는 성도와 성도를, 교회와 교회를, 나아가서 교회와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가 됩니다. 십자가는 연결하고 결합하는 다리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입니다. 세상을 품는 다른 마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통해 세상을 볼 때 분노나 정죄함이 없이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거절된 기대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 자신이 십자가로 책임지시는 분이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 대해 우리 주님은 그들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한 가장 완벽한 suitable helper의 역할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죄를 자신이 지고 십자가에 오르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신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십자가에 오르십니다. 죄의 결과로서의 모든 고통을 세밀하고 완벽하게 다 담당하십니다. 우리를 정죄하시거나 책망하시면 아무도 주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인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정죄가 아닌 긍휼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사랑의 대상이 되고 구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완벽한 suitable helper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 모두에게 하늘로부터 온 직분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목사직보다, 장로직보다, 권사나 집사직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뿌리내린 직분입니다. 어떤 직분입니까? 다시 본문을 읽어볼까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것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을 받은 성도는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뿌리내리고, 성도와 교회, 이웃과 세상을 통해 열매를 맺는 사역입니다. 조롱하고 손가락질하는 세상 가운데 그 모든 이유가 되는 연약함과 부족함의 자리에 서서 서로를 위해서 서로를 섬기는 직분과 사명,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비전이요, 우리들의 비전인 것입니다.


4. 함께 갑시다, 우리 이 길을....


마지막으로 제가 자주 영감을 받는 사진 하나를 나눌까 합니다. 함께 이 사진을 보실까요?


(사진)

 


여러분은 이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이 사진이 마치 우리의 인생길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언덕을 오르면 또 다른 언덕이 나타나고, 그 언덕을 넘어서면 또 다른 거 거친 언덕이 나타납니다. 뜨거운 태양이 나를 죽일 듯 이글거리고, 더 급하고 험한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손 잡아주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샘물이 되셔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외칩니다.
주님, 왜 이렇게 나를 버리십니까? 왜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까? 내 인생 너무 힘들고 내 인생 너무 거칩니다. 나는 외롭고 나는 힘이 듭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너희를 이끌고 있고, 너희의 손을 붙잡고 있고, 내가 이미 너희들의 샘물이 되고 있다. 눈을 들어 나를 찾아보아라. 먼저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참지 못하는 너의 분노를 걷어내고,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정죄하는 너의 교만을 버리고, 너는 나를 찾아보아라. 나는 이미 네 안에 있고, 나는 이미 네 곁에 너와 함께 있고, 나는 이미 네가 가진 모든 관계 속에 있다.” 내 안에 계신 예수가 같은 길을 허덕이며 오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에 대해 일할 수 있도록 나를 열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가 내 삶에 역사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로 세우신 주님의 뜻을 따라 서로 돕고 연결하고 결합되어야 합니다.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넉넉히 감당하여 우리들의 모든 관계 속에 참된 중보자요,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이 메마르고 거친 세상에서(사진 다시 보여줄 것) 우리가 서로에게 suitable helper 가 되고 서로에게 샘물이 되며 서로에게 마주 잡을 손이 되고 서로에게 화목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화목케 하는 자로 세우신 주님의 뜻이 우리의 삶과 관계를 통해 풍성한 열매로 나타날 수 있기를 화목제물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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