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22.
* 본 문 : 마가복음 3장 13-15절 말씀
* 제 목 : 함께 가는 길 - 1. ‘의미있는 소수(小數)’
아시다시피 저는 제가 쓴 칼럼을 한 인터넷 사이트 '갈릴리 마을‘에 계속 올리고 있습니다. 이제 거의 10년이 되었기 때문에 친한 사람들도 많이 생겼고, 여러 사람을 상담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가을 부흥 집회로 우리 교회를 방문했던 최용덕 간사님도 그렇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그 사이트에서 몇 번 치열한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적어도 3-4차례 된 것 같습니다. 이유는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제가 가진 정치적인 견해가 문제가 되었었고, 다른 하나는 저의 성품 때문이었습니다.
가끔 신문에 정치적인 견해차이로 논쟁을 하다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사건이 보도되지 않습니까? 저는 갈릴리 마을에서 논쟁을 경험하면서 그런 기사가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너무 쉽게 분노하고 너무 쉽게 색칠하고 너무 쉽게 정죄해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 역시 같은 경험을 한 것은, 평소에는 글 잘 쓰는 목회자로 칭찬하고 좋은 글 읽었다고 감사하던 분들이었는데,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판단을 하자 저를 집요하게 공경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목사 맞냐?” “잘난 척 하지 마라!” 저를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야.... 이러다가 정말 사람 잡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하나 논쟁을 일으켰던 것은 저의 성품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에 경기도에서 목회를 하시는 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참 착하고 순수하고 무엇보다 소위 ‘개혁주의’에 필이 팍 꽂힌 분입니다. 저는 그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혁주의는 저희 교단도 택하고 있는 신학적 노선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그분의 글과 생각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분이 글을 쓰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자신이 가진 ‘개혁주의’라는 잣대로 평가하고 판단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을 아예 신학이 없는 분으로, 어떤 목사님을 목회자로서의 교양과 양심이 없는 분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저에 대해서도 목사가 복음이 아닌 상담이라는 일에 집착한다고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집요하게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글에 제가 댓글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인터넷에서 싸움을 시작한 겁니다. 꽤 큰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분의 신학적인 입장이나 그분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글을 쓰는 방식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저를 너무 자극한 것입니다.
1. 그들, 하나될 수 있었을까?
정치적 입장의 차이, 그리고 성품의 차이 - 이 두 가지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이 두가지 문제는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원수 되게 만드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시대는 그랬습니다. 오랜 식민지의 경험은 유대 사회를 메마르게 했고, 각 계층의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며 민중들을 희생시켰고, 민중들은 각자 자신의 살 길을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의 조세 제도를 따라 세금을 징수했던 세리들은 가장 손가락질받고 천대받으면서도 가장 큰 부를 축적하는 집단이었습니다. 반대로 가난을 이기지 못해 광야로 모인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젤롯당이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열심당이라는 표현은 바로 유대의 독립 운동을 폭력적인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정치인들에 대한 암살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리인데 열심당인 사람과 함께 있다면 그들 중 한 사람은 죽어야 갈등이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또한 일하는 방식과 성품이 다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바울과 바나바가 그렇습니다. 목표중심적이고 주도적인 바울과 사람중심의 안정적인 성품을 가진 바나바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지만 의견 대립을 좁히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2차 전도여행 때 바나바의 조카였던 마가에 대한 의견의 차이로 갈라서게 됩니다. 바울의 멘토였던 바나바, 바울을 위기에서 건져내고 교회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시켰던 바나바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품의 차이는 결국 두 사람의 사역을 갈라놓은 깊은 강물이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는데 정말 이상한 사람들을 모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세리인데, 시몬은 열심당입니다. 정치적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을 함께 제자로 모으셨습니다. 반대되는 사람들은 또 있습니다. 베드로는 항상 말이 앞서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소위 친교 주도형입니다. 그런데 도마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에 대해 묻고 확실한 대답을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허리에 창자국과 손에 못자국을 확인해야 하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신중하고 안정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둘을 또 함께 제자로 부르십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얼마나 성격이 급했던지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는가 하면, 단순과격무식의 대표주자 ‘안드레’도 있었습니다. 시선은 앞을 보고 있지만 머리 속의 생각은 천만갈래로 흩어져 있는 가룟유다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같이 좀 모자라거나 지나친 면이 있는 각각 다른 사람들을 모아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과연 함께 일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과연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과연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일에 협력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오합지졸같고 이렇게 중구난방 어디로 튈지 모르는 12명의 제자들이 과연 예수님의 소원을 이땅에 이루는 초석을 놓을 수 있을까요?
2. 행복한 소수
·책나무에서 읽기 위해서 준비한 도서가 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의 책 ‘영적 성장이 길’입니다. 그 책에 보면 ‘행복한 소수’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는 40대에 목회와 인생에 심각한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그 때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나 부족함이 있어도 '그저 뭉기적거릴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늘 사명이나 목적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위기가 닥쳐왔을 때 정말 필요한 것은 비난이나 비판하지 않고 자신을 용납해주는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사귀기로 결정합니다. 그가 인생의 후반부에서 사귀기 시작한 특별한 사람들, 그는 이런 사람들을 ’행복한 소수‘로 불렀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평생 150명 정도의 사람을 친근하게 알게 된다고 합니다. 말콤 글래드웰은 “150이라는 숫자는 서로 잘 알고 의미 있는 교제가 가능한 진심어린 인간 관계를 나눌 수 있는 최대치”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150명 집단 안에도 ’공감 집단‘이 있는데, 그 규모는 10-15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서로 어떤 부족함이나 연약함을 발견해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도와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사용하는 동사들을 살펴 보십시오. 3단계로 나누어 봅시다. (1)“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세우셨으니”와 (2)"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와 (3)“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사이에 있는 간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그들이 주님 앞으로 나올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정말 정리되지 않은 모습, 각자 너무 다르고 너무 불행한 모습으로 예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주님이 그들에게 맡기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보내사 전도하게 하고 권능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맡기시는 사역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를 만들어낸 결정적인 열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예, 바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에 있습니다. 결국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시간,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시간, 예수님을 보고 느끼고 만지고 함께 먹고 마셨던 시간에 그들은 그들의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다른 그들을 이렇게 하나로 만든 것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그 열쇠는 바로 예수와 함께 한 3년의 시간, 예수를 경험하고 나누고 함께 했던 시간에 있습니다. 단순한 경험이 아닙니다. 훈련되고 변화되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연약함 속에서 오히려 나가 온전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서로 도와야 내가 온전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었고, 서로의 부족함을 용납할 뿐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오히려 내가 유익을 얻는지를 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는 바로 여기서 ‘행복한 소수’라는 개념의 기초를 발견합니다. 영향을 미치고 다수를 위해 희생하지만 결국 다수의 삶을 변화시키는 소수, 그 소수는 하나님 앞에서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행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신을 통해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소수의 사람 -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행복한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 바로 예수님입니다. 소망없는 삶을 살던 12명의 제자를 모으시고 그들과 함께 살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들과 3년의 삶을 함께 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보고 배우고 듣고 경험한 대로 복음을 전하며 능력을 나타내며 결국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됩니다. 행복한 단 한 사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들을 변화시킨 예수님처럼 이제 그들이 행복한 소수가 되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3. 주님,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같은 과정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양육하시고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교회는 바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현장입니다. 왜 우리가 교회로 모여야 합니까? 예수 한 사람으로부터 변화를 받아 행복하고 의미있는 소수로 변화되어 세상으로 나갔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면서 변화의 과정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시대와 사회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세상 가운데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에 기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무엇에 걸려 넘어진다고 했습니까? 예, 생각의 차이와 성품의 차이에 늘 부딪히고 넘어집니다.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인터넷 갈릴리 마을도 그랬고, 한국 사회도 그렇고, 미국도 마찬가지이고 그리고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차이를 넘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 공격하고 자신이 옳다고 말합니다. 서로에게 당신이 변해서 나처럼 되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서는 악하고 어리석고 더럽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로 모여 예수를 닮아 변화의 과정을 만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서로에게 있는 부족함을 서로가 닮아가기도 합니다.
죄송하지만 여러분들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사실 우리 초대 교회는 성도들 간에, 또 성도와 목회자 사이에 교제가 많은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을 터놓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대화의 방향성입니다. 우리가 다 서로 다르고 다 서로 연약하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문제가 극대화되는 길과 최소화되는 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을 먼저 듣고 싶으십니까?
우리의 차이가 만드는 문제를 극대화하려면, 그래서 그 문제가 관계를 깨드리고 교회의 하나됨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신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는 다수가 되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다수에 의해 손가락질 받은 사람은 넘어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그가 다시 일어날 때는 가슴에 상처를 품고 자기가 받은 것보다 더 큰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안겨주는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상처는 악순환되고, 문제는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하지만 혹 우리에게 있는 문제를 최소화하고 싶다면 여러분 스스로를 ‘의미있는 소수’로 여기십시오. 여러분 스스로를 문제의 전환점으로 여기십시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의 연약함으로 여기고 그저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그가 쏟아놓은 ‘어떤 사람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바로 잊으십시오.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 손가락질하는 다수의 편에 서려고 할 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 품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치료하는 소수가 되십시오. 우리 인생에 찾아오시고 가장 의미있는 한 사람이 되신 예수님처럼, 우리를 손가락질 하지 않으시고 ‘만나주시고 함께 하시고 품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변화의 과정을 인도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했던 바로 그 일을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비난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에게 하십시오. 어느새 문제는 사라지고, 어느새 그 성도 또한 의미있는 소수가 되어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그 일을 감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행복한 소수’, 이 땅에 사는 짧은 삶을 가치있게 살아가는 ‘의미있는 소수’가 계속 재생산될 것입니다.
4.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잠시 실험을 한번 해보실까요? 반주자는 ‘솔’ 음을 피아노로 짚어 보십시오. 다 같이 ‘아’하고 솔음을 내봅시다. 이번에는 피아노로 도미솔을 짚어주십시오. 그리고 앞에 앉으신 남자 성도 여러분은 ‘도’를, 여자 성도 여러분은 ‘미’를, 성가대 여러분은 ‘솔’을 다같이 ‘아~’로 불러 봅시다. 같은 수가 같은 크기의 소리를 만들지만 우리가 각각 다른 소리를 낼 때 훨씬 아름답고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모두 다르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고 거룩하신 뜻을 우리의 각자의 차이를 연결하고 연합하여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도와 교회가 되었습니다. 부르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내 안에 계시고 우리의 관계 속에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 주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일을 우리가 서로에 대해, 세상에 대해 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명을 허락하시고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 동거하시는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2000년 전 서로 너무나 달랐던 제자들이 제자들이 오랜 기간 주님과 함께 하고, 변화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결국 그들은 하나가 되어 초대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가장 의미있는 소수가 되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시대와 우리들의 지역에 대해, 우리 서로에 대해 의미있는 소수입니다. 주님이 이미 우리들을 부르셨고, 함께 하고 계시고 무한한 가치와 의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돌아보시겠습니까? 누가 나 때문에, 나로 인해 변화되고 있습니까? 아직 없다구요? 그렇다면 누가 나 때문에, 나로 인하여 변화되고 성장하기 위하여 나의 변화와 성장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님은 나를 바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소수로 사용하시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그와의 생각의 차이와 성품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여 여전히 그를 어려움 속에 있게 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변화되고 다른 사람의 변화에 기여하는 의미있는 소수로 살고 있습니까?
주님과 더불어 살며 주님으로 말미암아 변화와 성장을 경험한 아름다운 사람들, 우리가 함께 믿음과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평생에 이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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