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5.
* 본 문 : 디모데후서 1장 1-8절 말씀
* 제 목 : 함께 가는 길 - 2. 당신은 보석입니다.
등산, 좋아하십니까? 제게 물으신다면 뭐... 좋아하기도 합니다. 성품이 다소 목표 중심적이라 ‘정상’을 목표로 꾸준하게 오르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좋아하지 않기도 합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오른 후에 얻는 길지 않은 기쁨 때문에 오르는 오랜 과정의 고통이 너무 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게 물으시면 “Yes, or No!"라고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대답을 “Always Yes!”로 바꿀 수 있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같이 갑니까?”라는 저의 질문에 제 마음에 꼭 맞는 대답이 나왔을 경우입니다. “야~~ 그 분이 함께 간다구요? 그 친구가 함께 한다구요? 그렇다면 등산이 아니라 오지 체험이라도 좋습니다.” 그 어떤 휴양지도 함께 하는 사람이 불편하다면 가고 싶지 않지만, 그 어떤 험한 곳도 함께 가는 사람이 즐겁다면 좋은 여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산행은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혼자 산에 오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오르는 일이요, 함께 산에 오른다면 그것은 함께 가는 사람들 서로의 마음을 오르는 일입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 한 걸음씩 계속된 오르막을 오른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걸음걸음 걷는다는 것이요, 서로의 마음을 길로 내어주며 걷는다는 것입니다.
제게 산을 처음 가르쳐 주신 분이 있습니다. 저가 중고등부 시절에 부장 집사님이었던 분입니다. 백집사님이라는 아주 남자다운 분이셨습니다. 산을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한번은 아주 추운 겨울에 동래 산성으로 둘러 쌓인 금정산을 오른 일이 있습니다. 정확한 코스가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가는 길에 눈을 녹여서 라면을 끓여먹기도 했던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30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데리고 눈이 쌓인 산을 오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에 산행을 마치기까지 백집사님은 정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챙기시면서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헉헉... 집사님, 언제 정상에 도착해요.” “응, 이제 저 고개만 넘으면 돼.... 힘을 내라구! 너는 사나이잖아.” “헉헉헉...집사님, 죽겠어요. 좀 쉬어가요.” “그래, 조금만 쉬자. 그런데 겨울에는 많이 쉬면 더 많이 힘들고 추우니까... 빨리 힘을 내야돼! 야, 내가 너 믿고 올라왔는데 벌써 지치면 안되지”
모두들 한마디씩 불평을 할 때마다 집사님은 우리들을 오히려 칭찬하고 격려하며 산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정상에 올라서 서쪽으로 너른 김해 평야와 남쪽으로 부산항과 동쪽으로 해운대를 비롯한 동해 바다와 북쪽으로 양산까지를 한 눈에 바라보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아... 정말 잘 올라왔구나.” 그리고 백집사님이 참 고마웠습니다. 이런 귀중한 경험을 주려고 우리를 격려하며 칭찬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이 산을 오르셨구나 생각했습니다.
1. 함께 산을 오를 때
저는 어쩌면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의 신앙 생활이 함께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산을 오를 때, 힘들고 어려우면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일단 우리는 너무 쉽게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자신의 어려움만 생각합니다. “나 하나 간수하기도 힘이 든데 누구를 책임진단 말인가...?” 라는 말을 쉽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저앉기도 합니다. “몰라, 몰라... 나는 이제 못가!” 가끔 그렇게 주저 앉는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제자리 걸음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의심하거나 비난합니다. “혹시 길을 잘못 올라온 것 아닙니까?” “이러다가 정상도 못가보고 하루 종일 헤매는 것 아닙니까?” “지금 제대로 알고 가고 있는 겁니까?” “왜 하필이면 이런 산에 올라오자고 해서 우리를 고생 시킵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애초에 산에 올라오자는 계획부터가 잘못된 거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백집사님 같은 역할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격려하는 사람, 그 사람이 가진 큰 단점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장점이라도 칭찬하며 세워주며 격려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원망하고, 누군가는 쓰러지고, 누군가는 비난하고, 누군가는 자신만 생각하지만 모두가 성공적으로 산행을 마치려면 누군가는 쓰러지고 허물어지는 사람들을 일으키며 격려해야 합니다. 비전을 제시하고, 목적을 새롭게 하며, 우리가 가진 장점들을 모아서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산을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라 이름하셨고, 성도라 부르셧습니다. 함께 이 믿음의 산을 오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지칠 때 격려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쓰러지려 할 때 기댈 수 있는 동지들을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나에 대해 낙심할 때,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라며 나의 가능성과 장점을 인정해주는 형제들을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음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2. 너무 다른 사람을 만나다.
오늘 읽은 본문은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일까요? 예, 믿음으로 아버지된 바울이 영적인 아들로 부르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뜻의 이름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유니스와 외할머니 로이스는 그에게 아주 경건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착하고 순진한 청년으로 살던 그는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접합니다. 루스드라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주후 49년, 1차 전도 여행 중인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서 그는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주후 51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할례를 받고 목회자로 안수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2,3차 전도여행을 다니며 영적 경험을 쌓았습니다. 바울을 따라 로마의 감옥에도 함께 갇힙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정말 서로가 사랑하고 인정하는 사이가 아닐까요? 그런데 알고 보면 디모데와 바울은 정말 다른 사람입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지극히 남성적인 사람입니다. 바울의 성품은 목표 지향적이면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은 비겁하고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가 유대인들 앞에서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 과감히 초대교회의 수장인 그를 공개적으로 책망하기도 했고, 절친했던 바나바의 조카였던 마가가 1차 전도 여행에서 보인 연약함 때문에 바나바와의 의절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연약한 사람, 우유부단 한 사람, 감성적인 사람은 바울에게 가장 잘 맞지 않는 인적 환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그의 헬라인 아버지는 일찍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외할머니인 루이스와 어머니인 유니게의 손에서 양육됩니다. 그 결과 그는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자랍니다. 사역의 결과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송받지만 그리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가 되지만 나이의 연소함과 성품이 소심해서 늘 바울의 기도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또한 신체적으로도 어릴적부터 위장병을 앓고 있어서 스트레스 많은 목회자로 섬기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4장 6절에서 16절을 보면 바울이 그를 위해 걱정하는 바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과 나이의 연소함, 그리고 지성적인 부분에서의 부족함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디모데와 바울이 함께 산을 오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두 사람은 좋은 파트너가 되어서 성공적인 산행을 마칠 수 있을까요? 그 산행을 마치고 다음 산행에도 함께 하려 할까요?
3. 그대 안에 있는 보석
결론적으로 말하면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롬 16:21에서 “나와 함께 수고하는 자”라고 했고, 고전 4:17에서 “내 귀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했고, 딤전 1:2에서 “믿음의 참 아들”이라햇고, 딤후 1:2에서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신서 곳곳에서 디모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표현합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좋은 파트너가 되어서 오늘날 같이 평범한 교회 환경이 아닌, 목숨을 걸고 선교해야 하고 감옥에 가서 전도해야 하며 결국 그곳에서 삶을 마쳐야 하는 거칠고 험한 신앙의 산행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열쇠가 숨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이 열쇠를 발견하고 서로에 대해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봅시다.
조금 전에 소개한 바과 같이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 부릅니다. 디모데가 부족함이 없고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연약하고 소심했으며 그리 목회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디모데의 삶의 결과를 놓고 그를 사랑한다 말하지 않습니다. 디모데는 그 자체로 하나님과 바울에게 사랑받는 한 사람인 것입니다. 만일 능력이나 삶의 결과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고 사랑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있으십니까?
어쩌면 디모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혹은 유대인이면서 헬라인과 결혼한 어머니 때문에 조롱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점점 더 소심한 성격으로 변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만난 사람, 초대교회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전도자신 바울이 그를 ‘사랑하는 아들’로 불러줍니다. 그가 바울과의 전도 여행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를 축복하기를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참 복받은 사람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바울은 사실 디모데의 연약한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목회가 뻗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의 성품 때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3절과 4절에서 그의 성품을 표현하는 말을 찾아보십시오. ‘눈물’입니다. 남자를 표현할 때 이런 말을 쓸까요? 아닙니다. 그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정서적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그것을 비난하거나 꾸짖지 않습니다.
그는 그의 눈물이 아닌 ‘거짓없는 믿음’(5절)에 집주유합니다. 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의 연약함 속에 묻혀 있는 보석 하나를 캐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연약함을 보지만 바울은 그 속에 숨어 있던 보석을 봤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비난했지만 바울은 보석을 찾아내고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그에게 잘못된 것을 심어줬다고, 너무 여성적으로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순수한 믿음’을 이어받았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신앙의 유산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가 잊고 있었던 것 하나를 일깨워줍니다. 아마도 디모데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두려움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7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자기 안에 있는 아름다운 보화를 바울이 지금 캐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두려워하고 있냐고, 믿음이 없냐고 꾸짖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격려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함께 정상에 서다.
성도 여러분! 나약하고 두려움이 많던 디모데가 왜, 어떻게 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3차를 함께 하고, 예루살렘과 로마까지 목숨을 걸고 동행하고,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을 대신하여 초대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세움을 받게 되는지 보이십니까? 아니 왜 겁많고 우유부단한 성품을 가진 디모데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바울과 함께 전도자의 산, 아니세계교회 건설이라는 끝없이 펼쳐진 산맥을 지치지 않고 걷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바울에 의해 우리 주님께서 그 안에 심어주신 보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보석 발견하기 전에는 그저 착한 청년이었습니다. 패기 없고 여성적인 착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전이 있었을까요? 삶의 목표가 있었을까요? 추구하는 가치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그가 바울을 만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을 따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합니다. 목회자로 안수받습니다. 바울과 함께 죽음을 넘어, 사명을 넘어 충성하며 헌신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일은 가능한 일일까요? 예, 가능했습니다. 누구의 삶에서 실현되었습니까? 디모데의 삶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바울이 디모데 안에 있는 보석을 발견하고 그 보석이 빛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입니다. 함께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었고, 격려하고 도왔기 때문에 이제는 스스로 산을 오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인도하고 도울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어느새 바울과 디모데는 초대교회 복음 증거의 산 정상에 함께 올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각자 다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함께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산행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한다구요? 예, 함께 가는 사람들이 좋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동료가 되고 있습니까? 디모데에게 바울과 같은 동료가 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까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것처럼 서로에게 있는 단점과 부족한 점을 집어내고 비난하면 될까요? 내가 가르쳐서 고쳐버리면 될까요? 예수님도 하지 않으셨고, 바울도 하지 않았던 일을 내가 한다고 되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이 제자들에 대해 하셨던 일, 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일을 본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각자에게 허락하시고 심어주신 아름다운 보석이 드러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고 가르치려 하면 우리의 약점만 더 커지지만, 우리 안에 있는 보석에 집중하고 격려하면 어느새 보석같은 사람이 되어 서로를 생명과 복음의 빛으로 비추게 될 것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실까요? 인사합시다. “당신은 우리 교회의 보석입니다.” 크게 세 번씩 해봅시다. 예,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디모데에게 바울을 허락하셔서 그 안에 숨어 있는 보석을 다듬으셨던 것처럼 주님은 오늘 우리들 서로에게 서로를 허락하셔서 보석을 발견하게 하고 다듬게 하고 그리고 함께 세상을 비추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함께 믿음의 산을 오르는 보석같은 동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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