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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9. 함께 가는 길 - 4. 본이 되는 사람들 이응도 목사 201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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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19.

* 본 문 : 요한복음 13장 14-15절 말씀

* 제 목 : 함께 가는 길 - 4. 본이 되는 사람들


인류의 21세기를 설명하는 단어들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아마도 ‘스티브 잡스’(Steve Jobs)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여러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에 미친 영향을 여전하고 대단합니다. 생각하는 방식,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을 설득하는 일에 대해 그만큼 탁월함을 보인 사람은 찾기 힘들 것입니다. 그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졸업 연설을 하면서 아주 유명하고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ing agent."

죽음이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삶을 변화시킨다.


당시 그는 췌장암을 앓고 있었고 치료는 이미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도 이루지 못한 큰 성공을 얻었지만 그 모든 성공과 점점 멀어져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는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성공과 성취라는 단어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달려왔는데 죽음이라는 새로운 단어 앞에서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단 한걸음의 후퇴나 방향 전환 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바라봅니다. 어쩌면 대단한 성공도, 놀라운 성취도 그에게 이미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죽음이라는 앵글을 통해 나 자신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죽음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나는 지금 내가 하고자 하고 욕심내는 이 일이 죽음 앞에서도 하고 싶은 일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죽음을 통해 인생의 한계를 보고, 죽음을 통해 인생의 참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죽음은 지금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1. ‘Begin with the end in mind'


스티븐 코비 박사는 그의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두 번째 습관으로 ‘Begin with the end in mind'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마음 속에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끝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업의 목표일 수 있고, 여행의 목적지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분명하고 뚜렷한 그림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고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가치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가?” 이것이 그의 문제제기입니다.


자, 여러분! 그렇다면 조금 전에 소개한 Steve Jobs의 중요한 깨달음을 스티븐 코비 박사가 말했던 지혜를 통해서 생각해 보실까요? 2005년의 이 연설에서 그는 정말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깨달음 하나를 분명히 얻었습니다. 예상되는 분명한 끝,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그가 얻었던 지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연설의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생각대로 살지도 마십시오. 당신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방해받아서도 안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가슴이 뛰는 대로, 직관이 인도하는 대로 용기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미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Steve Jobs의 ‘끝’과 그것으로부터 얻었던 결론은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 소원대로 살아가라’였습니다. 가슴이 뛰는 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사는 것 - 이것이 죽음이라는 끝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준 가잘 큰 지혜요 변화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결론에 만족하십니까? 이렇게 살면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되게 사는 것일까요?


제게 물으시면,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습니다. 그 대답은 꽤 cool~하게 들리지만 제가 찾는 정답은 아닙니다. 그가 발견한 끝은 죽음이지만 제가 발견하고 찾는 끝은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The End'에 관한 그림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어리석어서 자주 잊고 자주 모른 척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약속하셨습니다.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 마지막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 마지막을 우리의 인생의 계획과 과정에 끌어들 수 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가치와 한계를 결정하는 정말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준비하신 우리 인생의 The End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입니다.


2. 다른 시선, 삶의 차이


결국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예, 무엇을 끝으로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하는 것이 삶의 의미와 가치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결론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삶이 있어서 탁월한 통찰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Steve Jobs가 왜 ‘가슴이 뛰는 일에 집중하라!’ 정도의 결론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가? 아니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이름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왜 그가 생각하지도, 깨달을 수도 없었던 가치와 목적에 집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결국 우리와 그가 다른 끝을 보고 있고, 다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 중 하나는 가나안을 정탐한 열두명의 정탐군이 이스라엘 앞에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마음 속에 가나안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을 정탐한 후 희망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땅이요, 그들은 우리들의 밥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요? 예,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곳으로서의 가나안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가나안 족속은 그들이 지나가야 할 과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셨고, 그 믿음으로 나가면 모든 과정은 다 지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열 명의 정탐군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아낙 자손들은 크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노예로 살다가 광야를 헤맸던 자신들과 너무 달라보였습니다. 그들은 거인이요, 그들 앞에 이스라엘은 메뚜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가야하고 보아야 할 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끝으로 생각했고, 절망했고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으로 그들에게 다가옵니까? 그들의 삶은 그들이 보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열두명의 정탐군 중에 결국 가나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열 명은 그들이 본 대로 메뚜기처럼 광야를 헤매다가 죽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들의 이런 엄청난 차이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믿음으로 약속을 바라보는가?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집중하는가? 의 차이입니다.


3. 본을 보이시는 예수님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 극명한 시선의 차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을 만납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가 하는 것과 제자들은 왜 주님의 발을 씻기지 못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지금 분명한 시선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있고, 제자들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요 13장 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는 그 뜻에 적합한 삶이 요구됩니다. 즉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은 그 때에 합당한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때’는 예수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그 나라와 의’와 같은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 뜻을 따라 오늘의 삶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늘의 선택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이요, 내일의 선택은 채찍질당하고 매를 맞으며 수치와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고, 그 다음 날의 선택은 십자가에서 외롭게 죽어가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시선이 하나님의 나라에,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초점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과 같은 곳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욕심이 있고, 세상의 성공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시선을 가지고 같은 곳을 보며 같은 선택을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망설이고 어리석은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당황해하는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류 가운데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던 삶을 선택했습니다. 주와 선생인데, 종이요 제자인 사람들의 발 앞에 엎드려 그들의 발을 씻깁니다. 하나님인데 피조물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메시야인데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십니다. 왕인데 백성들을 위해 죽임 당하십니다. 대제사장인데 범죄자들을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십니다. 지금 발아래 엎드려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에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잔을 피하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본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4. 본, 새로운 삶의 지경을 넓히다.


제자들이 본을 받게 한다....는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의 무엇을 본 받아야 그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될 수 있을까요? 서로 발을 씻기면 될까요? 천만에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저 발을 씻기를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발은 자신이 씻어도 되고, 일반적으로 집에 있는 종들이 손님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떤 본을 보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을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제자들의 마음과 시선은 여전히 세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 우리의 모든 죄와 악을 지고 죽임 당하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러한 고통의 때를 스스로 선택하시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시선과 가슴에 답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죽어가는 심령들에 대한 사랑을 품고 시선은 하나님의 나라에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시선이 고정된 예수님, 그 삶의 선택은 분명하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와 같은 곳으로 보고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나와 같은 선택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나는 주와 선생이요, 하나님이자 왕인데 너희들을 위해 이런 선택을 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삶의 본이 되어 교회를 세우고 믿음의 후손들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그들이 변화시켜야할 것은 발을 씻기는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이자 시선입니다. 무엇을 보고 살고 어떻게 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바라보며 교회를 위해 그 삶을 헌신할 것인가? 자신의 걱정과 염려, 욕심과 필요를 따라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끝을 생각하고 오늘을 살아간다고 할 때 그 끝을 우리 주님과 함께 하겠다는 아름다운 결심을 하고, 오늘을 그 끝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발을 내밀고 있는 제자들이 그러하고 오늘 여러분과 제가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슴이 바뀌고 우리의 시선이 바뀌어야 합니다. 저기 저 멀리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곳,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따라 우리 인생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본을 보인다는 것,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지난 주 말씀을 묵상하고 준비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마음을 두고, 주님과의 만남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고 살아가는 성도는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참으로 다양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각각 살아가는 삶의 정황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선택에 우리 주님과 함께 하는 ‘끝’이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과의 만남을 생각하는 목사는 목회를 어떻게 할까요? 끝을 생각하며 오늘을 사는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대할까요? 끝을 생각하며 봉사하는 사람은 어떻게 섬길까요? 끝에 시선을 두고 오늘을 사는 사람은 어떻게 일하면서 살까요? 저는 그 모든 일과 선택에 우리가 서로 본이 되는 삶을 생각했습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제가 섬기고 헌신하는 일에 본이 되고, 사업을 하는 김집사님은 사업에서 끝을 생각하고 사업을 하는 본이 되고, 직장에 다니는 이집사님은 직장인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의 본이 되고, 전업주부인 박집사님은 가정에서 좋은 어머니와 아내로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삶의 본이 되고.... 이렇게 각각의 삶의 현장에서 참 좋은 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모일 때, 그리하여 서로 섬기고 교제할 때, 그렇게 함께 모여 섬기고 사역을 한다면 정말 그 사역의 지경이 넓어지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깊이 있는 섬김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고 있는 본이 되는 성도들이 사소한 성도들과의 마찰에 마음 상할 리 없습니다. 쉽게 상처받고 왜 상처를 주냐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존심 상해 할 일도, 시간도 없습니다. 높은 곳에 마음을 두고 먼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기 때문에 작고 사소한 일에 시험들 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엎드리신 주님이 보이십니까?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오늘 서로에게 섬김과 헌신의 본이 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 사랑을 가슴에 품고 서로에게 아름다운 본이 되는 성도와 교회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름다운 본이 되어 우리의 자녀들과 세상이 끝을 생각하고 오늘을 사는 삶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들의 삶을 통해 발견할 수 있도록 살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들을 본이 되는 삶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그 삶에서 서로를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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