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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6. 함께 가는 길 - 5. 예수의 마음으로 보다. 이응도 목사 201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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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26.

* 본 문 : 요한복음 9장 1-3절 말씀

* 제 목 : 함께 가는 길 - 5. 예수의 마음으로 보다.


유대인 랍비 학교를 다니던 두 청년이 담배와 기도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어떻게 담배를 피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우리가 절대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네.” 다른 청년이 말합니다. “왜 안된다는 건가? 나는 내가 담배를 필 수 있다고 생각하네.” 서로 옥신각신하던 두 청년은 랍비에게로 찾아갔습니다. 한 청년이 먼저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기도하면서 담배를 필 수 있을까요?” 랍비는 당장 노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어떻게 담배를 핀단 말인가? 안되지!” 그러자 다른 청년이 묻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담배를 피면서 기도할 수는 있을까요?” 랍비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기도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입니다. “그래.... 할 수도 있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이시니까 말이야.”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 알려진 단순한 서양 농담 중 하나이지만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고민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질문의 힘’입니다. 어떻게 질문하는가? 즉 어떤 프레임을 먼저 놓고 생각하고 판단하는가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청년의 질문 속에는 단순히 사실 관계를 말하는 것 외에도 참으로 많은 기본적인 전제들이 숨어 있습니다.

먼저 처음 질문을 한 청년의 질문에 숨겨진 논리는 무엇입니까? 그는 경건과 불경건의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는 경건한 행위, 담배를 피는 것을 불경건한 행위입니다. 또한 그에게는 분명한 신학적인 입장 또한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경건한 행동을 담배를 피는 불경건한 행동과 함께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행위 즉, 기도를 선택하고 담배를 선택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경건함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편’으로 묶어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 청년의 질문에도 숨은 논리가 있습니다. 그는 먼저 경건과 불경건의 경계가 없습니다. 담배를 피는 것은 기도를 가로 막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담배를 피워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저는 여러분 모두가 담배를 피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연기를 사랑하시는 분들의 건강과 위생을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그것으로 그분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려는 것은 정말 아닙니다. 아마도 우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담배에 대한 언급을 공식적으로 하는 것 같은데요, 담배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정리할 때도 과연 우리가 어떤 질문을 먼저 던지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라는 질문과 “담배를 피는 사람이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중에서 택하라면 저는 후자를 택하고 싶은 목회자입니다. 다만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의 건강과 가정의 건강, 그리고 가정과 개인의 위생을 위해서 담배를 빨리 정리하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1. 질투하는 사람들


저는 오늘 말씀의 서론으로 ‘질문의 힘’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어떤 질문을 먼저 던지는가?”하는 것은 결국 어떤 시선으로, 어떤 눈으로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 믿는 우리들이 너무 쉽게 빠지는 몇 가지 오류와 그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그 오류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회에는 두 종류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한 반응은 사도 바울을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연로한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고난에 대해 함께 슬퍼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에 바울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빌립보서 1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 1:14)


그런데 다른 한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바울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떤성도들이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빌 1:17)


왜 한 교회의 성도들이 같은 사건을 대하면서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왜 같은 복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다른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이들은 두 개의 질문을 다른 순서로 던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두 개의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전하는가?”와 “무엇을 전하는가?”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선되는 질문은 무엇일까요? 예, “무엇을 전하는가?”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전파되기 때문에 내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고, 내가 고난 받는 것을 고소해하는 사람이 있어도 기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중심과 목표가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자신은 갇혀도 그리스도가 드러나면 즐거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질문은 “누가 전하는가?”에 있었습니다. 왜 바울만 사도가 될 수 있는가? 그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고, 나도 아니었는데... 그도 늦게 예수를 만났고, 나도 그런데.... 그도 복음을 전하고 나도 전하는데.... 왜 교회는 바울만 인정하고 나는 인정하지 않는가? 왜 바울만 세계를 다니며 사랑과 인정을 받는가? 그들은 바울에 대해 질투했고 시기했습니다. “무엇이 아닌 누가”에 집중했던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비복음적인 방식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슷한 경험을 하신 적이 없습니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주체가 된 적은 없습니까? 교회는 성령이 일하시고 우리는 순종하는 곳입니다. 복음이 증거되고 복음으로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그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생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누가’에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두기를 좋아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누가’가 바로 내가 되기를 원하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일을 감당할 때 비복음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초대교회의 초점이 분명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초점, 우리의 마음과 관심의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에게 우선되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누가 그 일을 하는가?”에 있습니까? 아니면 “무슨 일을 하는가?”에 있습니까? 누가 그 일을 하더라도 복음이 증거되고 성도가 성장하고 성령의 움직임이 보인다면 그 일은 환영받아야 합니다. 누가 일하더라도 복음 아닌 것이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고 예수의 이름이 아닌 것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일을 멈추고 다시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2. 정죄하는 사람들


잘못된 질문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죄하는 사람들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시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1-3) 이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점의 차이는 뚜렷합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보고 있고,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먼저 잘못된 기준을 소경에게 적용합니다. 그들이 가진 잘못된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체적인 질병이 사람의 죄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의 연약함이나 어쩔 수 없이 당하는 불행들, 때로는 잘못 판단하고 잘못 생각해서 만들어내는 삶의 오류들, 그 모든 것을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런 생각은 우리 한국인의 사고 속에도 있습니다. “어이구,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다 내 죄지, 내 죄야...” 이런 말들은 우리가 자주 듣고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불행이 닥치면 먼저 무조건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지난 번 쓰나미로 수십만의 일본인이 죽었을 때도 그렇습니다. 불행을 아파하고 슬퍼하기 보다 강팍한 마음을 정죄하는 말로 쏟아내기도 합니다.


한 소경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처음 보는 소경에 대해 판단과 정죄를 주님께 요청합니다.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은 관점을 달리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받았습니다. 이 땅 가운데 다소 불행하고 연약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그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영광을 돌리 주체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받은 고귀한 인격입니다. 연약함을 보지 않고 잘못을 보려 하는 눈, 그 연약함 가운데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의 부족함을 찾는 눈 - 우리가 버리고 내려놓아야 할 눈입니다.


3. 계산하는 사람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대하면서 사랑과 긍휼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일과 성과의 대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치유를 선포하라 하셨을 때 그들은 많이 놀랍니다. 정말 이적이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 나고, 사람들이 회개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서 예수님께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중요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성과를 드러내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십니다. 그들의 마음과 육신에 쉼이 필요하다도 생각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자랑하지 말고 그 일을 이루시고 인도하신 분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일에 실패합니다. 이 다음 나오는 사건이 바로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는 사건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정말 제자들의 사역에 많이 놀란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정도라면 스승인 예수는 진짜 큰 능력을 보여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루 종일 말씀을 증거하십니다. 이제 저녁이 되고 날이 저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광야에 모인 무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자고 말합니다. 더 이상 그들에게서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자신들의 일의 대상, 성과의 대상으로 판단해서 일과 성과를 결정할 수 없는 일에는 냉정했지만, 예수님은 무리가 방황하며 유리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십니다. 그들이 변화되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신 것이고, 그들에게 밥 한끼먹이고 싶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가진 것으로 저들을 먹이라!” 어쩌면 무리들은 제자들의 사역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싸늘한 마음으로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돈도 없고, 있다하더라고 지금 어떻게 사먹입니까? 보냅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는 효율성과 생산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역 또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보다 효과적인 사역에, 열매가 많은 일에, 많은 사람에게 드러나고 칭찬 받는 일에 사역을 집중하려 합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4. 예수님의 눈으로 보다.


오늘 우리는 잘못된 시선과 질문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과연 그들은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정죄하고 계산합니다. 그들 안에 있던 아픔과 상처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과 시선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아픔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며,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뜻과 사랑에 우리가 순종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서로를 비교하고 질투하며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고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일 -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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