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4.
* 본 문 : 누가복음 6장 12-17절 말씀
* 제 목 : 함께 가는 길 - 6.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지금 책나무에서 읽고 있는 책은 래리 크랩이라는 기독교 상담자가 쓴 ‘Real Church'(교회를 교회되게)입니다. 신학자가 아닌 상담자의 눈과 마음으로 쓴 교회에 관한 책이어서 그런지 사람과 관계에 대한 이해가 탁월한 책이면서 감동이 있는 좋은 책입니다. 책나무에서는 지난 주에 이 책을 발췌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마쳤고, 내일 월요일에는 전체적인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한 번 더 가지기로 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여러분 모두에게 읽혀 드리고 싶은 좋은 책이구요, 여러분 모두 책나무에 참석하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가식이 없는 사람들, 아플 만큼 솔직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인 그룹에 속하고 싶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안 자기 안에 벌어지는 모든 일을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진정하게 털어놓는다. 그런 그룹은 영성 계발이 평생 걸리는 일임을 안다. 그들은 죽은 성도들이나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가지고 화려한 간증을 늘어놓지 않는다.”
이 책을 읽지 않고 이 부분만 발췌해서 읽으면 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래리 크랩은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 상담자의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신앙을 통해서 바라본 교회는 ‘realistic’하지가 않습니다. 그가 책 제목을 ‘Real Church'라고 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늘 천국에 대한 이야기, 현실적이지 않는 신앙에 대한 이야기, 소위 영적이라는 케터고리 속에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처절한 삶의 모습을 서로 나누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뿌리 깊은 죄와 싸우고 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질투가 많고 시기가 많은지도 고백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비겁하고 나약한지도 고백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가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교제하면서 좋은 모습, 거룩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그는 ’가식 없는‘, ’아플 만큼 솔직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만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Non Christian적인 삶의 처절한 모습을 적어도 공동체 가운데 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정죄에 대한 두려움 없이 털어놓고 마음껏 울음 울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성장, 즉 영성 계발은 평생 걸리는 일이요, 지금 내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럽거나 수치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드러낼 수 있는 공동체, 서로를
격려하여 성장시킬 수 있는 공동체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교회에는 그런 한 사람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눈물과 한숨과 아픔과 상처를, 아니 죄와 허물까지 그저 아무런 판단이나 비판 없이 깊은 가슴, 눈물 젖은 마음으로 들어주고 안아주며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그런 한 사람이 당신의 교회에는 있습니까? 그리고 또 묻습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에게는 당신의 모든 눈물과 허물을 가슴으로 받아주는 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어떤 사람에게 바로 그 한 사람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가슴에 형제의 눈물이 고여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에 자매에게 있는 상처로 함께 멍들었습니까? 당신의 삶에 그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허물과 죄의 아픔이 함께 멍울져 있습니까?
1. ‘나도 엉망이고 너도 엉망이다.’
제가 이 책을 좋아하고 또 책나무에 권했던 이유는 래리 크랩의 사람에 대한 이해와 교회에 대한 소망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도 그와 비슷합니다. 그는 자신이 속하고 싶은 교회를 서술하면서 ‘깨어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는 말을 합니다. 그는 자신이 혹시 책을 쓴다면 ‘나도 엉망이고 너도 엉망이다.’라는 제목으로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그런 우리들을 받아주시고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아는 교회를 만들기를 소망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몇 가지 서로 인사시킬 것이 있습니다. 두 분 씩 짝을 지어보십시오. 옆으로 안되는 분은 앞으로, 뒤로 짝을 지어 서로 마주보십시오. 이렇게 인사해 보십시오.
“나도 엉망, 당신도 엉망!”
여러분은 래리 크랩의 엉망인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대한 소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택되는 장면입니다. 열 두 사도.... 어쩌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보다 더 위대한 의미가 있는 열 두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장면에는 빵빠레도 좀 울려 퍼지고, 꽃가루도 좀 뿌려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상황이 그리 재미있지가 않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어디 누구하나 제대로 역할을 할만 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대립하게 된 사건도 보십시오. 눅 6장 1절에서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게 뭡니까?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말이지요.... 명색이 메시야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더니는 사람들인데, 배가 고프다고 남의 밀밭에 있는 이삭을 잘라서 생것을 손으로 비벼 먹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한숨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들 중에서 어디 예수님께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보입니까? 누구 하나 제대로 예수님을 도와서 제대로 십자가를 지고 갈 만한 사람이보이십니까? 이런 사람들 중에 12명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 밖에 없도록 예수님의 제자들이 돕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쩌면 래리 크랩의 자기 고백처럼 제자들도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엉망이고, 우리 모두는 진창이다.” 합치면 엉망진창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하나님 나리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누구 하나 얼굴 반반한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 하나 제대로 쓸 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 하나 예수님의 사역에 도움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2. 희망은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 희망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그렇게 엉망인 사람들과 함께 일을 시작하셨고, 그렇게 시작한 일이 오늘날의 세계 교회를 건설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할 때까지 그 나라를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엉망이었던 그들을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셨고, 열두명의 사도로 만드셨고, 더 기가 막히게도 그들의 손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훈련되고 성장해서 오늘날의 세계 교회가 되었다면 우리도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희망이 있는 것이지요.
다시 아까 손을 잡았던 성도들의 손을 다시 잡아 보십시오. 이렇게 인사해 보십시오. “엉망인 당신, 희망은 있다!”
도대체 이 근거 없는 희망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정말 12명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제자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일까요? 아니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희망의 증거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괜히 쓸데없는 인사를 한 것일까요? 그들에게 희망이 없다면 우리에게도 없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그들은 변화되었고, 그들의 손에서 세계 교회가 건설되었습니다. 분명히 우리도 변화될 것이고, 성장할 것이고, 우리의 손에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일들이 불일듯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희망은 어디서 출발합니까?
저는 이미 그 답을 래리 크랩의 글을 통해 여러분께 알려드렸습니다. 그가 소원하는 교회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 엉망인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삶이 무너지고 짓밟힌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무너진 삶을 정죄하거나 손가락질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래서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못나고 엉망이고 절망적인 자신들의 능력이나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저 그리스도의 은헤가 더욱 필요하다고 고백하고, 그저 그 사랑을 더욱 목말라하는 교회, 사람과 비교하고 사람이 가진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간절히 기대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엉망인 우리들, 희망은 있는 것입니다.
3. 돕고 연결하고 결합하라.
그런데 문제는 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교회관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엉망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은혜를 어디서 공급받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여러분께 영상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한 부부의 이야기인데요, 이들은 37세의 정효근, 이승연 씨로 대학 1학년 때 만나서 16년째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두 아들의 부모이기도 한 이들에게 2년 전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성실하게 일하면서 가정을 지켰던 정효근시가 내몽고에 출장을 갔다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입니다.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지금은 인천 산재 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면서 재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건졌지만 몸의 반쪽 기능이 마비되었고, 4-5세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난 지 16년이된 기념 파티를 합니다. 보시겠습니다. (영상)
저는 이들의 영상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드린 질문의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일까요? 만일 이승연씨가 그동안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진실한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아마도 이들 부부는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강하게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주고 받은 사랑의 열매인 것입니다. 누가 더 이익을 보고 손해를 보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를 돕고 있고, 사랑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습니다. 저는 몇 달 전에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분께 ‘돕고 연결되고 결합된 교회’에 대해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소망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서로 돕고 연결되고 결합되어 서로를 지켜주고 세워주고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도울 수도, 연결될 수도, 서로 결합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연약한 부분에 들어가서 내가 그의 힘이 됩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세 번째 서로 인사해 봅시다. “서로 돕고 연결되고 결합합시다.” (사진)
4. 두 번째 사랑, 참된 사랑
여러분! 제가 조금 전에 보여 드린 영상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가끔 영상물을 만드는 사람들의 통찰력에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 분들은 정말 자신들의 만드는 영상에 대해 전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영상물의 제목은 ‘두 번째 사랑’입니다. 왜 이 영상을 만든 사람은 그들의 간절한 사랑을 두 번째 사랑이라고 이름 붙였을까요?
우리가 가진 사랑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내재된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고 내가 눈물 흘리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 사랑에도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고 소망하는 사랑은 대부분 이사랑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깊고 참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되고 가치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하늘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에게서 시작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때로 고통이 따릅니다. 때로 눈물이 젖어 있습니다. 때로 무거운 십자가가 되어 삶을 짓누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배워야 하는 사랑입니다. 나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아니므로, 나를 찾아서 내게 들어온 사랑이므로 우리는 이 사랑을 배우고 익히고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배우고 눈물을 통해서 얻는 사랑입니다. 내 안에서 눈물과 땀으로 시작되는 사랑, 바로 두 번째 사랑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어 예수님과 함께 내게 들어와 비로소 나의 사랑이 됩니다. 비로소 우리가 참된 사랑을 연습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 참된 사랑이 있어야 참된 교회가 됩니다.
제가 오늘 설교의 서두에서 소개한 글이 기억나십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비난이나 정죄의 두려움 없이 드러내고 내려놓을 수 있는 최소한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개의 질문을 연달아 드렸습니다. “나에게 그런 한 사람이 있는가?”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한 사람인가?” 여러분이 어떻게 대답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고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모두에게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 질문에 대해 “예, 내가,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용기있게 대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자, 이제 마지막 서로 인사를 하셔야 합니다. 손을 다시 마주 잡으십시오. 그리고 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멀리서 찾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아멘,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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