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8.
* 본 문 : 로마서 5장 8절 말씀
* 제 목 : 함께 가는 길 - 7. 사랑하십니까?
저는 지난 목요일 저녁 한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만난 참 귀한 분이었습니다. 10년 가까이 암으로 투병하셨는데, 3일 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이 뉴욕 플러싱이라 좀 멀기는 했지만 함께 슬픔과 위로를 나누고 싶어서 다녀왔습니다.
3남 2녀,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나눴습니다. 자녀들에게 참 따뜻하고 좋은 아버지셨고, 삶에 좋은 본을 보이셨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이런 이야기 하나를 나누었습니다.
약 10년 쯤 전이었습니다. 하루는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오늘 저녁 먹을 사람이 너와 나 둘 뿐이니 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게 어떠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까운 식당에 가서 두 사람은 대구탕을 먹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와 단 둘이서 하는 식사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하껄껄 웃으면서 정답게 대화했고,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씻기 위해 거울 앞에 선 아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앞 이에 그야말로 대문짝만한 고춧가루가 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버지와 식사를 하면서 얼마나 많이 웃어댔는데, 아버지는 자신의 앞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어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고, 자신은 그것도 모른 채 입을 있는 대로 벌려서 웃고 또 웃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났습니다. 그는 쿵쾅거리며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따졌습니다. “아빠, 왜 내 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는 말을 안해줬어요. 사람들이 보면서 얼마나 웃었겠어요. 아빠도 막 비웃으면서 이야기했잖아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세요.” 속사포처럼 따지는 그를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왜 나를 놀렸어요? 왜 나를 부끄럽게 해요?” 너무 분해서 눈물까지 글썽이던 그에게 아버지께서 낮은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나는 그냥 너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단다. 나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는데, 내 눈에는 고춧가루가 안보였다보다. 나는 너만 보였단다. 내가 고춧가루를 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때는 아버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눈에는 정말 대문짝만하게 보이는 고춧가루가 왜 아버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그는 아버지가 변명을 한다고 생각을 했고, 여전히 화가 났고....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그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습니다.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이 생겼습니다.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보면서 그는 얼마 전 그 고춧가루를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비로소 아버지의 말씀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래, 그래.... 그때 아버지는 정말 고춧가루가 보이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버지는 정말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야.... 나와의 대화 시간이 너무 좋았던 거야.... 아니 아버지에게 있어서 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던 거야.... 어떤 결점도, 어떤 잘못도 보이지 않았던 거야....’
아버지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말이 실감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 나쁜 점을 보지 않으시고 늘 칭찬해주시고 사랑해주셨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고춧가루가 아니라 그 어떤 결점도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눈에는 더욱 사랑해야 할 이유이자 대상일 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1. 그들은 왜 갈릴리로 갔을까?
어릴 적부터 많은 성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잘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있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그물을 던지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먼저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바로 꿇어 엎드려서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한 후에 이제는 정말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맹세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비록 그들의 맹세가 많이 좌절하고 실패했었지만 그래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면 무엇인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그물을 던집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왜 예수님도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거룩한 사명으로 그들을 부르셨는데, 그들이 주님을 배신하고 떠났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은 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왜 구차하게 그들에게 다시 찾아가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비겁하고 그렇게 못나고 그렇게 약해빠진 사람들이 무엇이 좋다고 그들을 다시 찾으셨을까요? 마치 제자들의 사랑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제자들은 왜 갈릴리로 갔고, 예수님은 또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여러분이 제자들이라면, 혹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제자들과 다른 선택, 다른 삶을 살았을까요? 예수님처럼 제자들을 찾았을까요? 아니면 그들을 버렸을까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누구와 닮았고 우리들의 선택은 누구의 것과 닮았을까요?
2.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요한을 우리는 사랑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1,2,3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이 있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예 대놓고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1 4:8,16)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증거를 우리 안에 남기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닮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두셨는데, 그 형상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교통함, 즉 하나님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을 가장 닮은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우리 안에 심겨진 창조적 본성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조금 전에 드린 말씀에 동의하실 수 있습니까? 사랑은 우리들의 본성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슬프게도 인류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말씀이 성경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실까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죄인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까? 그 관계를 떠났다는 것입니까? 예,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약을 깨뜨렸고 그 사랑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 안에 있을 때 가장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 수 있고, 그 사랑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의미있게 살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사랑을 잃고 말았습니다. 사랑의 능력을 잃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 그것을 로마서 5:8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현재 아직 죄인의 상태입니까? 아니면 구원받은 성도로 살고 있습니까? 만일 구원받은 성도로 살고 계신다면 그 증거는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예, 여러분과 제게 사랑의 능력이 회복되었는지,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디모데후서 3:5에서 바울은 이런 성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런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 말씀을 로마서 5:8과 연결하면 ‘사랑의 모양은 있는 것 같은데, 사랑의 능력은 없는...’ ‘사랑한다고 믿고 말하는데 삶으로 살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라고 말합니다. 형제가 헐벗고 굶고 있는데 말로만 평안히 가라, 배불리 먹으라고 말하는 것은 죽은 믿음이며, 능력을 상실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3. 사랑을 실패하게 하는 것들
제자들은 왜 갈릴리 바다로 갔을까요? 아니 좀 더 세밀하게 질문을 만들어 본다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왜 근심하면서 대답하는 것일까요? 사랑이라는 주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주제로 사랑하는 스승과 대화하고 있는데 왜 그는 근심할 수밖에 없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가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참 자신들이 밉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못나고 비겁했던 자신들을 돌아보며 숨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들이 예상하는 것은 아마도 엄청난 꾸중이었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비겁하게, 얼마나 매몰차게, 얼마나 두려움에 가득 차서 주님을 버렸는지 불같은 진노를 예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징계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난 주님은 오히려 그들에 대해 연민을 보이십니다. “너희들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믿음이 연약한 자들아.....”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연약함을 알지 못해서 그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든 연약함과 비겁함을 아셨지만 그것보다 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계획이 더 컸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진 연약함은 우리 주님의 사랑의 걸림돌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그것들이 자신들에게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수치스럽습니다. 원망스럽습니다. 자꾸만 죄책감이 듭니다. 차라리...차라리... 그래서 그들은 결국 자신들에게 가장 편하고 익숙했던 환경으로 돌아갑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들이 다시 바다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비전으로 갈릴리 바다를 떠났는데, 다시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다에 던진 것은 그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 대한 절망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그리고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아들의 이에 낀 고춧가루는 과연 얼마만큼 컸을까요? 손바닥만 했을까요? 손톱 정도 되었을까요? 아니면 정말 대문짝만 했을까요? 아무리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다한들 아버지의 눈에 보이지 않았을 정도라면 사실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젊은 아들의 눈에 그것은 너무나 크게 보였습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그 고춧가루에 막혀 아버지의 사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춧가루에 마음이 가로막혀 아버지의 사랑을 보지 못했다는 이 어리석음 - 혹시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없습니까? 사랑을 받는 능력, 사랑을 하는 능력 -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이 창조적인 사랑의 능력을 우리의 마음과 삶에 발생한 문제들 때문에 외면하거나 잃어버리신 적은 없습니까?
우리들은 우리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이 고춧가루들을 상처라고 부르기도 하고, 수치심이라 부르기도 하고, 자존심이라 부르기도 하고, 교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를 비교하는 마음이고, 질투하는 마음이고, 자랑하는 마음이면서,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 마음과 삶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드러나 있기도 하고,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숨어 있기도 합니다. 바로 그것들 때문에 사람을 낚는 어부의 비전을 가진 제자들은 다시 갈릴리로 돌아갔고,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이요 교회요 자녀인 우리들이 사랑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을 잃어버린 빈껍대기 같은 신앙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사랑에 엎드리다.
주님은 다시 그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아, 나를 사랑하느냐....? 나도 너희를 사랑한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라.... 나의 사랑으로 들어오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여전히 나의 사랑, 나의 제자들이니까.... 너희의 어떤 연약함도 너희에 대한 나의 사랑을 막지 못하니까.... 너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내가 너희를 사랑했고, 그 사랑은 영원히 확증되었으니까...”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내 눈에는 너의 결점이 잘 보이지 않는구나. 너는 그저 그대로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구나.”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는 사랑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랑을 할 줄 몰랐고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인 그대로, 우리가 연약한 그대로, 우리에게 수치가 있고 부족함이 있고 더러움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모습 이대로, 우리의 연약함 그대로 우리를 받으시고 안아주십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읽읍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말씀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신 우리 주님의 마음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우리를 사랑하고 품으시고 변치 않으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이요, 우리가 닮아야 하고 회복해야 하고, 서로 나누어야 하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어떤 연약함도, 우리의 어떤 수치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고, 그 사랑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더욱 큰 사랑, 더욱 깊은 사랑 - 그 사랑에 의지해서 오늘도 주님 앞에 섭니다. 그 발 앞에 엎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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