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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 함께 가는 길 - 9. 십자가를 함께 지다. 이응도 목사 201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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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1. 종려주일

* 본 문 : 막 15:16-23

* 제 목 : 함께 가는 길 - 9. 십자가를 함께 지다.



2012년 3월 31일 한국일보의 한 칼럼에 영국에서 실시된 이색적인 설문 조사가 소개되었습니다. 질문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 10가지는 무엇인가?”였습니다.

10위는 결혼을 빨리한 것이었습니다. 9위는 추억이 많은데 제대로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 8위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제대로 효도하지 못한 것, 7위는 젊은 시절 건강을 챙기지 않은 것, 6위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었고, 5위는 담배를 배운 것이었습니다. 4위는 세계 여행을 하면서 견문을 넓히지 못한 것이었고, 3위는 좀 더 운동하지 못한 것이었고, 2위는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1위는 저축을 충분히 해 놓지 않은 것
이었습니다.


대부분 공감이 되더군요. 우리는 그런 걱정과 후회를 적당히 섞어가며 사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떻까요? “죽음 직전에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일까요?” 김정운 교수라고 요즘 한국에서 인기 있는 강사는 말하기를 사람이 죽기 전에 세 가지 ‘껄껄껄’하며 죽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좀 더 베풀면서 살 껄, 좀 더 용서하며 살 껄, 좀 더 재미있게 살 껄”입니다. 역시 그럴 듯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가장 미안한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물론 먼저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겠지요.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무엇인가 남아 있는 미안한 마음, 사랑하고 감사하지만 숨길 수 없는 미안한 마음도 있지 않을까요?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큰 고통을 당하셨고, 나는 그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는데.... 그래서 정말 기쁘고 감사하기는 하지만,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제자들이 도망치고 숨었던 것과 같은 감정이 우리들의 마음에 남아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 마음이 십자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의 상징, 우리 모두에게 함께 지고 가자고 말씀하셨던 그 십자가, 저는 그 십자가에 대해 참 미안한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왜냐구요? 너무 사느라 바빠서요.... 사는 게 힘들고 정신 없어서요.... 구원의 은혜, 주님의 사랑은 간절히 사모했지만 우리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고, 외면했고, 때로 내려놓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1. 십자가, 예수님의 길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유월절 어린 양에 대한 출애굽기의 말씀을 읽으셨을 겁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매주 중요한 상징을 구약과 신약에 배치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을 예표하는 가장 강력한 사건이 있다면 유월절의 어린 양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된 흠 없는 어린 수양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바로와 애굽의 모든 백성에게 임할 때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어린 양의 피를 발랐던 가정들은 장자의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양의 희생과 보혈의 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건이었고, 요한 계시록 13장 8절에서는 ‘죽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어린 양의 피를 사용하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우리가 그 피에 힘 입어서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죽임 당하신 그 어린 양이 보좌에 앉아서 온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바로 그 때 마치 출애굽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온 성도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라고 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피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좋아서가 아니라, 떠밀려서가 아니라,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곳이 고통인 줄 알았고 치욕인 알았지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길을 올라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우리 주님의 길이었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스스로 길이 되셨습니다.



2. 함께 십자가를 지다.


로마 시대, 반역자들을 처형하던 십자가는 약 150파운드 정도 되는 큰 형틀이었습니다. 남자 성인 한 사람 정도의 무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는 죄수들이 그 십자가를 끌고 도시의 번화가를 지나서 사형장으로 가도록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로마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잔혹한 처형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사형수들은 먼저 고문을 당하거나 절망에 빠져서 자신이 죽을 형틀을 지고 가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가족이나 친척들은 마지막 가는 길에 힘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갈 사람을 사서 사형수들과의 이별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혹 반역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싫어서 사형수의 가족들이 나서지 않으면 로마의 병정들이 길가에서 구경을 하거나 지나가는 사람 아무에게나 어깨에 창을 댑니다. 그러면 그는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자들의 배신을 보면서 마음은 더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미 혼자 걸을 수도 없을 만큼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드디어 시간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못가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군사들은 성문 가까운 곳에서 아프리카의 한 해안도시인 구레네라는 곳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시몬이라는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사형수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형틀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예수님과 함께 올랐습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올랐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성경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가는 그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아들들의 이름과 함께 다른 복음서보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마가는 일반적으로 초대교회가 처음 모임을 시작했던 ‘마가 요한의 다락방’의 마가와 동일한 인물로 간주됩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했던 집도 마가의 집이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바나바의 조카였으며, 사도 베드로의 통역 비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바울을 도와 전도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그는 스승인 베드로의 영향을 받아서 시간 순서대로 객관적인 사실만을 마가복음에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가미되어 있지만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스승 예수님에 대한 기억에 많이 의존하여 있었던 사실을 시간순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스승에 대한 가장 아픈 기억은 무엇일까요?
왜 마가복음은 다른 성경과는 달리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잠시 영상 하나를 보겠습니다. 이 영상에 그 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보신 Passion of Christ 라는 영화의 일부입니다. 누가 저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야 합니까? 베드로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당해야 합니까?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누가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갔습니까? 구레네 시몬입니다.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도와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던 베드로는 숨어서 울고 있었습니다. 두고두고 생각해도 부끄럽고 후회스럽습니다. 미안하고 죄스럽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예수님의 면전에서 부인하고 돌아서고 배신했습니다. 가장 아프게 했습니다. 가장 큰 모욕과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서 지금 한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갑니다. 베드로는 그 십자가에 대한 기억이 죽음보다 아팠을 것입니다. 그는 구레네 시몬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 장면은 베드로의 기억 속에서도 정지장면이었을 것입니다.



3. 알렉산더와 루포


베드로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또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십자가를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 베드로는 그와 그의 아들들을 기억합니다. 여러분! 왜 마가는 시몬을 ‘알렉산도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기록할까요? 알렉산더와 루포는 당시에 초대교회에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루포에게 문안하라"고 부탁한 일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롬 16:13). 아마도 구레네 시몬과 그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경험한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참으로 영광된 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택하셔서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가족은 이후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로마 교회에 잘 알려진 성도가 된 것입니다.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사도 바울이 특별히 기억해서 인사를 해야 하는 성도로 성장한 것입니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진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요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마가복음 15:20-22를 봅시다.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이 부분을 읽을 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들은 모두 엘렉산더와 루포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가정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이, 구원과 사랑이 임했는지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계획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앞에 놓여졌습니다. 그것을 지고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언덕,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구원이 그 가정에 임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구레네 시몬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까지 은혜와 사랑을 힘입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래... 그래서 여기 알렉산더와 루포, 교회의 참 훌륭한 일군들이 있는 거야.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 가정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것이지.”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우리가 함께 십자가를 지다.


저는 베드로를 보면서 저와 참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급한 성품이 그렇고, 부족한 생각이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많은 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에게 가장 아프고 부끄러운 기록 하나를 우리들에게 남깁니다.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던 한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함께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여러분은 나처럼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자기처럼 연약한 사람들에게 자기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고, 그래서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삶을 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졌던 시몬의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합니다. 엘렉산더와 루포,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이 알고 있는 이 신앙의 일군들을 그의 아버지가 감당했던 일과 관련시킴으로써 십자가를 지는 일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일, 그것이 고난이요 시련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은혜요 복이라는 사실을 그 아들들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짧은 마가복음, 하지만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 그 사이에 사도 베드로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무리 주님이 그를 용서하셨다 해도, 아무리 남은 인생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헌신했다 해도 베드로는 그 기억을 씻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그 십자가가 바로 내가 함께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데, 그 은혜와 그 사랑의 자리에 내가 있었어야 하는데.... 내가 연약하고 내가 비겁하여 주님을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 억지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갔구나.... 그것이 고난이 아니라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 큰 은혜임을 깨달은 사도 베드로의 안타까움이 마가복음을 통해 묻어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의 주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에 대해 담대할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 고난 당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셔서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자 말씀하셨습니다. 예! 하고 씩씩하게 대답하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과 함께 믿음의 언덕, 고난의 언덕을 올라갑시다. 베드로처럼 후회하고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는 성도가 아니라 더 기뻐하고 더 감사하고 더 반갑게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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