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6.
* 본 문 : 요한복음 19장 25-27절 말씀
* 제 목 : “아프니까 사랑이다.”
다음 주에 목사 안수를 받는 한 전도사님을 만났습니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신다고 하더군요. 오랜만에 부모님을 뵐 생각을 하나 가슴이 벅차다고 했습니다. 몇 년 사이에 부쩍 연로해지신 것 같다면서 얼굴 뵙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이야기도 덧붙였습니다. 문득 얼마 전에 저희 집에 오셨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뵙기 전에 걱정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가 많이 연로해보인 다는 것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통해서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다보니 제 머리를 점령하기 시작한 흰머리가 은근히 걱정되었습니다. 몇 년 전 어머니를 뵐 때에는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정말 흰머리가 많아졌습니다. 미국에 오래 계실 것도 아니고 한 달 남짓 계시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실텐데, 가셔서 늘 어린 것 같았던 셋째 아들이 흰머리 희끗해지는 중년이 된 모습을 기억하시면 마음 불편해 하실 것 같았습니다. 은근히 ‘염색을 해버릴까?’라는 생각도 실은 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께서 저의 흰머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제 얼굴에 늘어나는 주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고,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덧붙여서 커피 마시지 마라, 잠을 좀 더 많이 자라, 음식은 이런 것 저런 것을 먹어라 건강 보조 식품을 먹어라... 수많은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물론 오랜만에 듣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참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시고 걱정하시는 그 마음을 오랜만에 살갑게 느낄 수 있어서 참 행복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아들의 얼굴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고, 아무리 아들의 머리 색깔이 변해도 여전히 아들을 가슴으로 품고 사랑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모든 아들은 여전히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고, 그 마음에서 어머니는 모든 아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떠나신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벌써 다시 보고 싶습니다.
1. 십자가 곁에 서다.
2000년 전, 로마의 군인들도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인정했나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점점 죽어가는 아들 예수,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곁에 어머니 마리아가 서 있습니다. (마리아 사진) 아들의 머리에 생긴 흰 머리 한 올조차 어머니의 마음에는 아픔으로 남는 것인데, 어떤 아들은 지금 고깃덩이처럼 온 몸의 피를 다 쏟으며 하늘을 등지고 나무에 걸려 있습니다. 아들처럼 살지 못해서 아들처럼 죽지 못하고, 아들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해서 아들처럼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어머니입니다. 다만 그렇게 아들의 피가 고인 땅을 딛고 아들의 피가 흐르고 있는 십자가를 만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좀 뜸합니다만, 이전에 저는 가끔 병원 통역을 하러 간 일이 있습니다. 동포들 가운데 영어로 소통이 안되는 분들이 있어서 병원에서 요청이 오기도 하고, 직접 연락을 받고 도우러 가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몇 분 잊을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모두다 너무 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본 경우입니다. 손목이 부러져서 발목보다 크게 부은 분도 있었고, 젊은 분인데 관절에 류마티즘이 와서 관절 사이에 주사를 맞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얼마나 아픈지, 어디가 아픈지를 일일이 물어보고 의사에게 설명하면서 언어라는 것이 참 한계가 많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저는 실은 오늘 새벽에 개혁 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가면서 제 바로 앞에서 차가 충돌하는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 양보하지 않고 서로 가려고 하다가 거의 정면으로 충돌을 했습니다. 차들이 줄 지어 서고, 금방 경찰이 달려오고.... 야단이 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혹시 예배에 늦을까 마음이 바빴습니다. ‘아... 좀 다쳤겠는데.... 큰 일 났군....’하고 생각을 하고 저는 다시 제 갈 길로 갔습니다.
2. “아프냐? 나도 아프다.”
저는 조금 전에 제가 지켜보았던 다른 사람의 고통 두 가지와 저의 감정적인 경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함께 병원에 가서 통역을 하면서 고통을 지켜봤던 분들, 그 분의 고통은 참 안타까웠습니다. 오늘 새벽에 눈 앞에서 목격한 교통사고는 ‘야.... 좀 다쳤겠는데... 큰 일 났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안타까울 수 있고, 뭐... 좀 걱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제게 고통의 단계까지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 저와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잘 모르는 분들을 보편적인 사랑으로 도와드리기 위해서 병원에 함께 간 것이고, 길을 지나다가 사고를 목격한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관계가 달라지면 우리의 반응도 달라집니다. 몇 년 전 ‘다모 폐인’이라는 말을 만들어내면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서진이라는 멋진 배우와 하지원이라는 예쁜 배우가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대사가 있습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대사입니다. 남자 주인공 윤(사진 1)은 양반이자 출세 가도를 달리는 사람이고, 여자 주인공 채옥(사진2)은 그를 보필하는 경호원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상황과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합니다. 윤을 위해서 채옥이 팔을 다치게 되고, 자신을 위해 다친 채옥의 팔을 치료하면서 윤이 말합니다.(사진 3) “아프냐...” “예... 아픕니다.” “나도 아프다.... 아프지 마라.... 너는 내 수하이기 전에 내 누이나 다름 없다... 너를 희생하면서까지 내 꿈을 이루고 싶지는 않다...”
왜 이 대사가 한국인들의 마음을 울렸을까요? 이런 사랑이 그립기 때문이지요. 나와 함께 눈물 흘려주고 나와 함께 아파해주고 나의 고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에 목말랐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사랑을 보면서 이런 사랑을 꿈꾸고 마치 자신이 그런 사랑에 빠진 듯한 환상에 빠지기 때문이지요.
3. 아프니까 사랑이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셨을까요? 예, 그렇지요. 아마도 더욱 사랑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어머니를 사랑하셨을까요? 예, 당연하지요.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여러 사역지에서 함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좋은 아들이었고, 사랑 많은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사랑하는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지금 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들로 인한 큰 즐거움입니까? 아들로 인한 자랑거리입니까? 아들로 인해 영광을 얻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아들을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는 한 어머니가 아들의 발 아래 서 있습니다. 그 아들은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천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수없이 매질을 당해서 서 있을 수도 조차 없는 아들인데, 다시 그 아들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이 죽는 죽음, 땅이 그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죽음.... 나무에 매달려서 천천히 뜨거운 팔라데타인의 태양 아래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요?
저는 아직도 2년 전, 승하가 채 100일이 되지 않았을 때 애빙턴 병원 응급실에 있었던 일을 잊지 못합니다. 그 때 한참 조류 독감이 유행해서 유아 및 어린이 사망자가 많이 나올 때였습니다. 마침 승하가 감기 증세를 보여서 응급실에 들어갔습니다. 감염 여부를 알기 위해서 척추에서 물을 빼서 확인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린 것이 거부하지도 못하고 얼마나 아팠을까요? 주먹 만한 녀석을 아내와 함께 응급실에 두고 저는 그때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Susquehana Rd를 타고 교회로 왔습니다. 그때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차라리 내가 아플 수 있다면.... 내가 고통을 당할 수 있다면.....
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의 피가 십자가를 타고 내려와 자신의 발등을 적십니다.(마리아 사진2) 아마도 몇 번 기절을 했을 수고 있습니다. 마친 그 자리에 이모가 함께 있고, 다른 몇 명의 여인들이 함께 울어줬기 때문에 그래도 서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어머니가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 마지막 순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 깊은 고통,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는 아픔으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한다면, 어머니를 정말 사랑한다면 적어도 이런 고통은 주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사랑한다면 어머니에게 이런 아픔을 안겨주는 아들은 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사랑한다면 좀 다른 방법으로 그 뜻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랑하면서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랑하면서 왜 이런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부등켜안고 고통 당하고 또 아파해야 하는 것일까요?
4. 십자가, 사랑의 통로
저는 월요일 새벽에 여러분과 함께 나눈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 이삭의 등에 제단으로 사용할 나무 짐을 지우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아브라함의 고통스러운 마음에 관한 묵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또한 그 아들의 등에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마지막에 구원을 얻었지만,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결국 십자가 위에서 제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또 한 사람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비의 마음을 가르치신다면, 마리아를 통해서 어미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어보십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너희 성도들아! 아프냐? 나는 정말 너무 아프다..... 너무 아프다....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 아들을 이렇게 십자가 위에 걸어두었다. 내 아들을 죄인들의 손에 죽게 했다. 아프다... 정말...너무 아프다. 너희는 어떠냐? 너희도 나와 같이 아프냐?”
하나님이 이 질문에 대해서 가장 먼저 온 몸으로 대답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아들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예, 하나님... 정말 아픕니다. 차라리 내가 십자가 위에 올라가면 좋겠습니다. 할 수 있다면 내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너무 아픕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죽어 가는데 왜 네가 아프니? 왜 예수보다 네가 더 큰 고통을 느끼고 있니?”
마리아가 말합니다. “제 아들이니까요... 내가 사랑하니까요....”
하나님이 눈물 속에 말씀하십니다. “그래,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지. 아프니까 사랑인 것이지. 사랑하는 만큼 아프고, 아픈 만큼 더 사랑하는 것이지..... 나도 지금 너무 아프단다. 너누 사랑한단다.”
다시 마리아가 묻습니다. “하나님, 사랑한다면 왜 이런 아픔을 주시나요? 이렇게 아파야 사랑을 하는 것인가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은 회복하는 사랑이기 때문이지. 나를 떠난 사람들, 약속을 깨뜨린 사람들, 죄를 선택하고 사랑을 떠난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사랑이기 때문이지. 세상을 돌이켜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내가 고통을 책임지는 사랑이기 때문이지. 마리아야.... 이 세상을 사랑하기가 참 힘들고 아프구나.... 이렇게 나의 자녀들이 십자가를 통해 함께 고통을 느끼며 십자가를 통해 아픔을 나누어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되는구나....”
아들 예수가 어머니를 부릅니다. 스승 예수가 요한을 부릅니다.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입니다. 요한아, 보아라. 너의 어머니다.” 요한과 마리아가 십자가를 통해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개가 떨구어졌습니다. 병정들이 허리에 창을 찔러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합니다. 병정들이 함께 죽은 강도들이 시신과 예수님의 시신을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요한은 마리아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경험한 그들,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의 마음을 함께 경험한 사람들.... 그 고통 가운데 깨달은 사랑, 아픈만큼 더욱 사랑하는 사랑, 사랑함으로 함께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세상은 그들을 ‘교회’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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