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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20. 요셉 프로젝트 - 3. '부흥' 이응도 목사 2012-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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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20.

* 본 문 : 사도행전 ·16장 16-34절 말씀
* 제 목 : 요셉 프로젝트 3 - 부흥

사실 지난 주일과 이번 주일, 각각 ‘회복’과 ‘부흥’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는 것은 제게 조금 부담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지만 그 의미의 폭이 굉장히 넓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회복으로 볼 것이며, 무엇을 부흥이라고 볼 것인가?” 라는 아주 중요한 질문에 대한 목회자로서 솔직한 대답을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회복 탄력성’이라는 말 기억나십니까? ‘외상후 장애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말 기억나십니까? 그리고 ‘자라와 솥뚜껑’ 기억나십니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자라들을 극복하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의 회복의 시작과 출발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에게 진정한 회복 탄력성을 주는 능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예, 그렇습니다. 우리의 회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회복의 동기가 되며 능력이 되며 목표가 됩니다.

오늘은 회복의 길을 걷는 성도가 어떻게 참된 부흥을 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도의 삶의 부흥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찾아오는 것일까요?

1. ‘지성에서 영성으로’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다소 교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제목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를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저자는 세계적인 석학 ‘이어령 박사’입니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였습니다. 딱히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저술한 책만 해도 160여권이며, 모든 책에 빛나는 그의 지성과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도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픔은 늘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찾아옵니다. 그에게는 사랑하고 아끼던 딸이 있었습니다. 그의 딸 '이민아'씨는 이화여대를 조기 졸업할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았고, 부모의 기쁨과 자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일생에 단 한번이자 처음으로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결정을 합니다. 한 남자를 선택하고 그 남자와 함께 미국 유학길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녀가 선택한 남자는 '김한길'이라는 가난한 문학 청년이었습니다. 젊은 부부는 부모를 거역하고 떠났었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고, 힘들게 공부와 생활을 하면서 결국 5년 만에 이혼을 하게 됩니다. 부모의 더 큰 아픔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혼 후에도 딸 이민아씨의 삶은 계속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1992년에는 갑상선 암이 찾아왔고, 1996년과 1999년에 두 차례에 걸쳐서 암이 재발했습니다. 재혼에서 얻었던 둘째 아들은 자폐아 판정을 받았습니다. 2006년에 이민아씨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망막 손상으로 실명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여기서 완전히 무너집니다. 딸을 미워하기도 했고, 부정하기도 했지만 그 딸의 삶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 딸의 고통 앞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찬란한 빛과 아름다운 풍경, 생명이 넘쳐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당신이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당신의 딸 민아에게 그 빛을 거두려 하십니까? 기적을 내려 달라고 기도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하늘의 별과 지상의 꽃을 보는 것이, 그리고 사람의 가슴에서 사랑을 보는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아주 작은 힘이지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글을 쓰는 것과 말하는 천한 능력 밖에 없사오니 그것이라도 좋으시다면 당신께서 이루고자 하는 일에 쓰실 수 있도록 바치겠나이다.”

그는 2007년 7월 23일 도쿄 온누리교회에서 하용조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의 회심은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삶의 회복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가 신앙을 고백한 후 쓴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딸의 고통이 회복의 시작이라면 그 책은 부흥의 시작입니다. 그는 책을 통해서, 그리고 강연과 언론을 통해서 자신이 평생을 부정해왔던 기독교 신앙을 그가 가진 모든 지성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바울과 같이 자신의 이성과 지식을 믿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을 세상에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회복과 부흥은 이렇게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가 가장 아끼던 딸의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회복을 경험했고, 자신이 가장 자랑하던 것을 하나님께 바쳐서 부흥을 경험합니다. 이전보다 덜 가졌을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잃었을 수 있고, 그가 평생 가르치고 주장해왔던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참된 가치를 찾았기 때문에 회복된 것이고, 그 가치에 집중하여 열매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 부흥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2. ‘땅 끝의 아이들’

그렇다면 정작 참 힘들고 어려운 삶의 연속이었던 그의 딸, 이민아씨는 어떻게 회복되고 어떻게 부흥의 삶을 살게 될까요?

그녀는 1989년에 미국인과 재혼을 했고, 1992년 갑상선 암을 앓으면서 세례를 받습니다. 이후에 암이 두 번씩이나 재발합니다. 그런 와중에 낳은 둘째 아들이 자폐아로 판정이 되고, 그 아들의 교육을 위해 하와이로 이주합니다. 연속되는 고단한 삶에 지친 그녀는 10년 동안 그저 몸만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교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2002년 2월 20일, 그녀는 우연히 한 미국교회를 들러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자신의 믿음에 대한 큰 도전을 받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중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삶은 지난 10년간 예수를 믿는다고는 했지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삶을 돌이키기로 결정합니다. 이제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고백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그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삶의 회복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2006년 망막 손상으로 인해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굳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아버지 이어령 교수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아버지가 드디어 사랑하는 딸의 고통 앞에서 무너집니다. 2007년 아버지가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삶에 참된 부흥이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어령 교수가 세례를 받은 지 세 달만에 김한길씨와의 첫 번째 결혼에서 얻었던 아들 ‘유진’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19일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 아들은 명문 버클리대학을 나왔고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장래가 촉망되는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그녀가 슬픔에 빠져서 무엇을 어찌 할 줄을 모를 때 하나님이 그녀의 꿈에 나타납니다. “이 아이는 지금 내 품에서 편히 쉬고 있다. 기쁨과 평안 가운데 있으니 너도 슬퍼하지 말아라.” 그녀는 이 꿈을 하나님의 위로로 받았습니다. 아들의 묘비에 “Resting in his Father's house" 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저 누구나 하는 말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2009년, 그녀는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빈민가를 떠돌며 청소년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유진이 10대일 때 부모와 갈등이 있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았던 일을 기억하고 청소년들에게서 아들 유진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청소년들을 돕는 사역은 미국의 각 주와 푸에르토리코, 호주, 중국, 아프리카 등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그녀가 청소년들을 만나고 도왔던 것을 기록한 것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그 책의 이름이 ‘땅 끝의 아이들’입니다.

그 책에서 그녀는 이 세상에 안식처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자기만이 세계에 갇혀버린 사람들, 아직 사랑을 모르고 자신의 참된 가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땅 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들 유진과 함께 땅 끝의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녀의 삶에 참된 부흥이 찾아온 것입니다.

어쩌면 부와 명예를 얻는 일에 있어서는 한국인으로 미국 사회에 공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더 성공하는 길이었을 수 있습니다. 거듭되는 불행에 부숴지고 무너져서 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통해서 회복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땅 끝에 그녀를 세우시고 더 이상 아파할 힘도 없고, 더 이상의 절망할 힘도 없는 곳에서 그녀의 삶을 부흥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녀의 부흥은 가장 아픈 곳에 하나님의 복음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모든 것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채울 때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3. 감옥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저는 바울의 삶에서 오늘의 본문이 차지하는 의미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마도 바울은 본문이 설명하는 고난을 당하면서 연상되는 장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1차전도여행을 다녀온 지 1년여 지난 후, 복음을 전했던 곳으로 다시 가서 회심한 신자들을 돌아보기 원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2차 여행을 떠나기 전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의 동행 문제로 크게 다투어 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15장 마지막 부분의 상황입니다. 16장에 들어서면 상황이 긴박하게 진행됩니다. 5절에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6절과 7절에서 그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의 전도 일정을 가로 막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떻게 할지를 몰라 고민하는 중에 바울이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 사람들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손짓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합니다.

마게도냐 지방에서 바울은 크게 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입니다. 첫 전도지역인 빌립보는 바울의 선교에 아주 중요한 한 사람과 한 사건을 만나게 합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자주 장사 루디아입니다. 자주 장사라는 것은 옷에 물감을 들이는 염색약품을 파는 사람을 말합니다. 루디아는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고 루디아의 집은 곧 빌립보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곳에서 한 가지 일을 경험합니다. 그곳에는 귀신이 들려서 점을 치는 여종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 여종에게 있던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여종이 더 이상 점을 치지 않게 되자 돈을 벌 수 없게 된 여종의 주인이 분노한 것입니다.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관원들에게로 끌고 갑니다. 그들을 이상한 종교를 전하는 자들로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매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절에서 23절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깊은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25절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바울과 실라는 심하게 매를 맞았고 걸레처럼 늘어져서 감옥 깊은 곳에 던져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던져지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기도하고 찬양을 했을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에도 '밤중 쯤 되어....'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무엇을 했을까요?

바울이 예수를 믿지 않을 때 복음을 전하는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스데반입니다. 그는 당시 바울이 믿는 것과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고 그를 죽인 것이 유대인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부활했고, 우리 모든 인류의 구원의 주가 되신다 했습니다. 바울은 그 복음을 듣고 이를 갈았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스데반을 모함하여 재판 없이 돌로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상황이 참 비슷하지 않습니까? 바울을 여종의 주인이 모함을 했고, 주변 사람들을 선동했고, 어리석은 관원들의 동의하여 심하게 매질했고, 감옥에 던졌습니다. 차가운 감옥에서 바울은 무엇을 했을까요? 만일 제가 바울이라면 몸이 아프기보다 마음이 참으로 아팠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기억나는 사건, 기억나는 얼굴, 기억나는 장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저 기억나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영화처럼 선명하게 떠올랐을 것입니다. 바로 자신에게 모함을 당하고 무고하게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바울에게 있어서 스데반은 극복할 수 없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내가 이렇게 스데반을 죽였지... 스데반도 나처럼 무고를 당했지.... 스데반도 나처럼 재판도 없이 처형을 당했지.... 내가 지금 스데반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그는 먼저 빌립보의 감옥을 눈물로 적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깊은 묵상,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대한 감사가 절로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의 삶에서 언제를 부흥의 시기로 잡아야 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가에서 시작된 그의 회복이 선교 여행을 통해 놀라운 부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부흥의 증거가 오늘 말씀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찬양했더니 사슬이 풀리고 옥문이 열립니다. 하지만 아무도 탈옥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츱츱한 감옥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옥문이 열린 것을 발견한 간수가 죄수들이 탈옥한 줄로 알고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해치지 말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과 대답이 등장합니다. 행 16:30-31을 봅시다.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성도 여러분! 바울의 현재의 삶은 고난입니까? 부흥입니까? 예,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습니다. 어떤 고난도, 억압도 그의 삶에 임하신 성령의 부흥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 사실을 본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심지어 간수는 그들을 모시고 집으로 갑니다. 온 가족과 친척들이 함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바울의 삶은 고난입니까? 부흥입니까? 그 뿐 아닙니다. 35-40절은 더 재미있습니다. 날이 완전히 밝아지자 간수의 상전이 바울과 실라의 죄를 밝히지 못하자 석방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오히려 나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시민에게 적용되어야 할 합법적인 심문절차를 거치지 않고 때리고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과 실라에 대한 무고한 모함을 받아들여서 매질을 했던 관리들이 오히려 바울과 실라에게 용서를 빕니다. 바울과 실라는 당당하게 용서하면서 감옥에서 나와 선교를 계속합니다.

여러분!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바울의 삶에 연속적인 부흥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보십시오. 그는 지금 돈을 벌었습니까?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람들로부터 대접받고 존경을 받고 있습니까? 그의 삶의 부흥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를 통해 복음이 증거되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부흥이 가능할까요? 그가 자신의 모든 자랑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뜻과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자신이 자랑하던 모든 것을 마치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 모든 것을 사용하고 헌신하여 오직 자신을 회복하게 하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의 삶이 참된 부흥의 열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4. 부흥의 삶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세 사람의 인생과 부흥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저의 의도를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들 중에서 부흥이 임하기 전보다 더 성공하거나 더 화려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고난이 찾아왔고 그들의 인생의 목표가 되었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했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와 교회의 부흥은 성장 혹은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로 인해 막혀 있을 때, 나의 성품과 욕망과 기질과 상처와 분노에 가로 막혀 흐르지 못할 때 아무리 내가 성공하고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나는 회복과 부흥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의 회복과 부흥이 그가 젊은 왕자로 있을 때가 아니라 늙은 목자로 있을 때 찾아왔고, 아브라함의 회복과 부흥은 그가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 때 찾아왔으며, 요셉의 회복과 부흥은 그가 고난 가운데 얻은 아름다운 보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민아 목사는 지난 3월 15일, 위암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보다 먼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불효한 딸입니다. 하지만 이민아 목사도, 이어령 교수도 서로 눈물과 원망으로 이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 인한 회복과 하나님이 주신 삶의 참된 부흥을 경험하였고, 부흥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때로 성공하고 때로 실패합니다. 때로 건강하고 때로 병이 듭니다. 때로 분노할 일이 있고, 때로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때로 슬프고 때로 기쁩니다. 우리 인생의 가치가 이러한 우리의 삶의 수많은 변화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끝에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그것들이 우리의 가치의 근거가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가치있게 하시는 분, 우리에게 새생명과 삶의 의미를 허락하시는 분 -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회복의 출발이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삶에 우리의 부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강물처럼 흐르는 부흥의 삶의 사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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