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29. 신약1독 40일 - 2. 말씀은 변화의 시작입니다. | 이응도 목사 | 2012-07-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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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본 문 : 사도행전 2장 37절 말씀 l 제 목 : 말씀은 변화의 시작입니다. 안철수씨가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대담을 하는 중에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가 창업을 하고 성공적으로 기업을 이끈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 함께 일을 하는지, 어떤 사람을 뽑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외국인 친구가 한 말을 예로 들었습니다. 기업을 하는 자신의 외국인 친구는 “I may be wrong.”이라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뽑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대화나 논쟁을 하는 중에 “내가 틀릴 수도 있어요.”라는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신감이예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에 자신이 없으면 고집을 피워요. 그런데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말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일단은 자신에 대해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나아가서 자신이 틀렸음이 확인될 때 수정이 가능한 사람이예요.” 사실 우리는 자주, 많이 이 부분이 부딪힙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나를 변화시키기보다 틀린 것을 숨기거나 부정하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수정과 변화의 요구가 지속되면 상대를 공격하거나 관계를 끊는 일도 많습니다. 내가 아는 것과 믿는 것, 내가 결론 내린 것과 신념이 틀릴 수도 있다는 ‘변화되고 발전하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곧 나온 이야기가 독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안철수씨의 친구 중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책을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내용을 수첩에 기록했습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다른 친구와 어떤 문제에 대해 논쟁을 했는데, 무시를 당했고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쟁에서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서 스트레스가 너무 많았는데, 책을 읽다가 그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너무 좋은 말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수첩에 적어두고 그 친구를 만나면 그 말을 꼭 해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안철수씨는 그 친구에게 “너 이제 책 읽지 마라.”고 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속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고 성장과 변화의 계기를 발견하기 위한 것인데,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것만 선택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1. 은혜 받았습니다? 지난 주 세계 한인 선교 대회에 참석하면서 많은 강의를 들었습니다. 참 좋은 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 역시 강의를 했는데요, 강의를 마쳤더니 여러분들이 와서 질문도 하고, 짧은 상담도 하고, 강의에 대한 소감도 말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어쩌면 저랑 생각이 그렇게 같으세요? 제가 평소에 하던 생각과 꼭 같은 생각을 강의를 통해서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은혜가 되었어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그 분이 받은 은혜는 무엇이고, 그분이 강의를 통해서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이나 설교, 강의나 책을 통해서 내 생각과 믿음을 확인하는 것은 신앙 생활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한편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씀은 우리를 지금 살던 대로, 지금 생각하는 대로, 지금 내 삶에 존재하는 문제와 갈등으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모습에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인생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독서를 하는 사람은 책 안에서 자기 생각을 발견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는 책을 통해서 배우지도, 도전 받지도 못할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신앙인은 말씀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에 맞는 말씀에서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다. 좋다…좋다… 그래 내가 옳지…라고 생각하고 그친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를 칭찬하고 나를 인정하고 나를 동의해주는 말씀 ? 하나님의 말씀은 나보다 어리석은 것일까요? 저는 이번 말씀을 모든 성도들이 집중해서 읽는 이 40일의 시간 동안 말씀을 통해서 내 인생의 중요한 변화의 포인트를 발견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게 동의하는 말씀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위엄이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을 조명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제가 은혜 받았다는 말씀을 하는 분들을 잘못되었다거나 공격하려는 것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생각을 좀 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만일 이걸 영어로 한다면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말, “은혜를 받는다.”는 말에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 문화가 반영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요컨대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감동이 되었다.” “동의가 되었다.” “참 좋았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혜를 받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무엇을 받는가? 하는 것은 이미 성숙한 교회와 성도의 관심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렸는가?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깨달았는가? 그래서 어떤 결단과 헌신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너무 쉽게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로 우리가 드린 예배와 말씀을 정리하는 것은 참 아쉽습니다. 예배의 목적은 우리가 은혜를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내가 좋았다….고 느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잘 하셨어요… 그 말이 맞아요….라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마음과 삶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의 시대에 예루살렘 성에 있던 유대인들이 소위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이 교회에 임했습니다. 두려워서 도망쳤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힘 입어서 거리로 나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난 다음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보였던 반응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유대인들의 방식대로 받은 은혜를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에 마음이 찔려요.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마음이 너무 아파요.” 왜 그들의 마음이 찔렸을까요? 예, 복음이 그들의 잘못된 삶에 대해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거짓과 허위에 대해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범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찔립니다. 예루살렘 성, 그들이 예수님을 못 박았던 그들의 삶의 중심에서 그들은 말씀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을 칭찬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에게 찔림이 되는 복음을 만난 것입니다. 3. “우리가 어찌할꼬?” 그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안철수씨는 책을 읽고 자신과 같은 생각,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는 이론만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마치 자기 주변에 높은 담벼락을 쌓는 것과 같다고 하더군요.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상과 논리를 만들려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변화시키기십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변화된 우리를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즉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2000년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리고 오늘날 여러분과 저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하고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를 닮고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늘 우리들의 성장과 변화의 필요를 따라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들의 귀와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필터가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예배를 평생 드려도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나만의 필터로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다 걸러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필요하고 내가 듣고 새기고 순종해야 할 말씀을 다 걸러 버립니다. 내 마음과 삶에 심지를 않습니다. 내 마음이 예루살렘 성의 유대인들처럼 ‘찔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위로하고 인정하고 격려하고 내 생각과 맞는 말씀에 대해 정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삶의 변화를 요청합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기를 사모해야 하고, 묵상해야 하고, 마음에 찔림이 있어야 하고, 말씀 앞에 나를 내려 놓고 “내가 어떻게 할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를 묻고 또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4. 말씀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나는 읽는 대로 만들어진다.”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부터가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 고 있지요. 독일의 문호 마르틴 발저(Martin Walser)의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으로 만들어진다.”라는 말을 패러디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독서는 참 중요하고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의 서재에서 결정된다는 말이 보편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왜 우리는 이렇게 오랫동안 성경을 읽어오고 이렇게 오랫동안 매일, 매부 여러 번 모이고 예배하면서 말씀을 나누어도 왜 변화되지 못하고 성장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10년 전의 문제는 여전히 오늘의 문제가 되고, 10년 전의 갈등은 여전히 오늘도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읽고 보는 것이 나를 결정한다면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교회이고, 나는 교회와 말씀을 통해서 벌써 변화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고민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이 예루살렘 저자 거리에서 사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입술을 통해서 증거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만났습니다. 그 말씀은 그들의 죄와 악과 무지와 어두움을 꾸짖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씀을 외면하거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말씀이 그들의 마음과 삶을 자극합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이 두 가지 단계가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은혜를 받았다”는 말에 담긴 자기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배는 내가 은혜를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으로 나를 드리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는 것은 내가 만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며 어떤 변화와 성장을 원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내가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받으셔야 합니다. 말씀을 읽으며 내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에 우리의 성장과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앞에 나를 내려놓고,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며, 어떻게 성장할까를 고민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할까요? 어떤 삶을 살까요? 어떤 결단이 필요할까요? 내가 예배와 말씀 앞에서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하고,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서 그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찔림을 얻고, 변화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허락하신 것 ?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조명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은 참으로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놀라운 사건이 예수님 한 분의 삶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계속 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의 능력에 우리의 삶을 맡기는 40일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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