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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5. 신약 1독 40일 - 3.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응도 목사 2012-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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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5.
신약 1 40일 셋째 주

 
l  본 문 : 갈라디아서 4 9절 말씀 
l  제 목 : 3.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제가 영문학을 전공한 것이 전혀 표시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그 표시를 좀 내려고 합니다.  영국 소설 중에서 18세기 말에 발표되어 지금까지 사랑 받고 있는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in)이라는 여류 작가가 21세에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이 소설을 썼고, 15년이 지난 후 지금의 제목인 오만과 편견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풀어 쓴 연애 소설이기 때문에 벌써 4차례 영화로 만들어졌고,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두 주인공이 있습니다.  다아시라는 모든 것을 갖춘 한 총각과 엘리자베스라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조건을 가진 한 처녀가 그들입니다.  그들이 만나고 서로 사랑을 이루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연적(戀敵)도 아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조건도 아니고, 집안의 반대도 아니었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모든 것을 가진 남성 다아시의 오만함’(Pride)과 오만한 남자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편견’(Rrejudice)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안에 있는, 서로를 만나기 전에 형성된 오만과 편견이라는 품성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되고 서로를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갑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서로에게 있던 오만함과 편견을 제거합니다.  오만과 편견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게 된 그들은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는 사랑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소설이 오랫동안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설득력 있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서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문화에 민감했습니다.  엄연히 신분의 차이, 즉 귀족과 새로운 신분인 중산층과 평민과 하인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그 모든 차이를 넘어서서 사람과 사람의 참된 만남이 성공할 수 있다는 줄거리는 또 하나의 신데렐라 이야기로 충분히 사랑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 소설은 오늘날 다양한 버전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는데요, 자본주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소유의 차이로부터 오는 오만과 편견을 지적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소통과 만남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
오만과 편견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성도와 하나님과의 만남에도 이런 잘못된 이해와 해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환란이나 핍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핍박이 있는 곳에는 복음이 더욱 왕성하게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있고, 자신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에 대한 오만과 상대방에 대한 편견으로 서로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편견과 자신에 대한 오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큰 장애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사로잡힐 때 빠질 수 있는 오류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이미 하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아신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초등학문에 다시 종노릇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에 대해 갈라디아 교회에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아닌 유대주의적인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교회에 찾아오게 되고 많은 성도들이 미혹 당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타깝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왜 잘못된 가르침에 마음을 빼앗기는가!”

    그렇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 뿐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 놓인 오만과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교만함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로막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2. 하나님에 대한 오해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전형적인 몇 가지 편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욕심이 형상화되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쉬운 오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금송아지로 형상화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다음 광야에 머물게 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쉽게 다가오지 않고, 그들을 이끌었던 모세는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을 올라갑니다.  두려움과 염려에 사로잡힌 그들은 아론을 졸라서 그들을 위해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하나님이라 선포하고 축제를 벌입니다.  왜 그들은 하필이면 금을 선택했고, 하필이면 송아지의 형상을 만들었을까요?  금과 송아지는 당시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노예로 살았던 그들은 빨리 애굽과 가나안 거민들이 가지고 있던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금은 부의 상징입니다.  소는 당시 인류 역사에서 새롭게 시작한 우경, 즉 소를 사용해서 농사를 지었던 민족들이 섬겼던 신입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바알신은 상체를 소의 형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신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오해를 하고 있었을까요?  ,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와 욕심을 이루시는 분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잘되게 하는 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가 기복적인 신앙으로 비판받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오해 때문입니다.  실은 한국 교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미국 교회가 발전시킨 신학 가운데 번영 신학이라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나를 잘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는 미국 교회가 번성할 때 발전시킨 신학이며, 1980년대 한국 교회가 번성할 때 뿌리내린 신학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못되게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이 세상에서 잘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잘되는 것이 좋은 신앙의 결과도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도가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가나안에 속히 들어가서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기쁨을 깨닫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기 때문입니다.

       
2) 자신의 감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다.

    하나님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자신의 감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요나는 분노의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를 괴롭히는 앗수르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 명령하십니다.  요나는 그 분명한 명령을 거절합니다.  그곳에 억지로 복음을 전하러 가서도 온전하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니느웨 성에서 요나가 전하는 말씀의 핵심은 회개와 구원이 아니라 분노와 심판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자신의 판단과 분노에 근거해서 해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뜻을 밝히셔도 요나는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것이 진리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험한 것은 어느새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의 생각과 동일시하게 되고,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어디를 가나 많은 분쟁과 분열이 발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연약한 점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님의 감정과 동일시합니다.  하나님도 틀림없이 자신처럼 분노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결정을 쉽게 하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이 더 하나님스러워지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고,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분노와 염려와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마음에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마음을 배우는 길입니다.

        3)
자신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다.

   
하나님에 대한 세 번째 오해의 가장 좋은 예는 욥기에 등장합니다.   욥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핵심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사람의 이성으로 논리화하려 한 것입니다.  성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결국 실패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논리로 아는 존재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존재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섭리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어떻게 이성이 가진 논리로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이성은 불필요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박국 선지자를 봅시다.  그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이스라엘이 패역한데 그냥 두고 보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라는 강력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준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심판의 도구로 바벨론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박국은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벨론과 같이 악한 민족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두 민족을 비교하면 그래도 바벨론보다는 이스라엘이 낫지 않느냐고 항의합니다.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답을 주십니다.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하나님의 뜻은 바벨론이냐 이스라엘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의 구원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며 모든 것은 과정에 불과함을 알게 하박국 선지자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합니다.   하박국 3:2 함께 읽어보실까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3:2)  그는 지극히 이성적인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찬양을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받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3:17-19)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이성을 사용하십니까?  믿음을 사용    하십니까?  많은 생각과 판단으로 여러분에게 맞춰진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먼저 순종하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을 믿음에 사용하여 더욱 순종하는 성도들을 기다리십니다.

       
4) 자신이 경험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다.

   
마지막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자신의 경험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사실 경험만큼 강력한 지식도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강력함이 하나님을 아는데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경험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주관적인데 반해서,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입니다.

    좋은 예를 달란트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이 하는 푸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인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인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어서 뿌리지 않아도 거둘 수 있고, 흩지 않아도 모을 수도 있습니다.  나 하나 열심히 일 한 것이 주인에게 무슨 도움이나 되겠습니까?  괜히 일한다고 우왕좌왕하다가 가진 것까지 잃지 말고, 조용히 주인의 집에서 잘 살다가 주인에게 돌려주면 주인이 기뻐할 겁니다.”

   
그는 주인을 알고 있을까요?  , 압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주인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주인을 알았을까요?  아닙니다.  주인은 그의 경험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실패는 그의 주인에 대한 경험적 지식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주인을 판단했고, 불순종했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되 우리의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상식을 근거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을 유교적이고 도덕적인 훈장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는 하나님을 이해하되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도덕적이고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신 자녀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되 심판하시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잘잘못에 대한 경계가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경험했던 다양한 삶의 영역들은 때로는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잘못된 경험의 색안경으로 하나님을 보고 우리의 신앙 생활을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살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의 영역에 머무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3.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소원으로도, 이성으로도, 감성으로도, 그리고 경험으로도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나의 틀 속에 가둬놓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생각을 내려 놓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동행하시며 나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늘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말씀에 은혜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고 교제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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