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2. 일꾼보다 예배자 - 1. 믿음의 역사 | 이응도 목사 | 2012-09-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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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본 문 : 데살로니가후서 1:11 l 제 목 : 일꾼보다 예배자 ? 1. 믿음의 역사(the work produced by faith)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외줄타기를 잘하는 광대가 있었습니다.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아주 높은 곳에서 줄을 타는 공연을 한 다음 관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이 줄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관객들은 “예~”을 외치며 환호했습니다. 그러자 광대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 사람을 업고도 이 줄을 무사히 건널 수도 있다고 믿으십니까?” 관객들은 다시 “예…” 환호했습니다.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누군가가 나와서 광대의 등에 업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광대가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제게 환호해주신 분 중에서 한 분만 무대 위로 올라와주십시오. 제가 그 분을 등에 업고 외줄을 건너가겠습니다.” 그러자 객석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다시 광대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한 사람을 등에 업고 이 줄을 무사히 건널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아무나 나서십시오. 내가 그 믿음을 증명해보이겠습니다.” 광대는 결국 관객들의 믿음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만들어낸 예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있는 ‘믿음’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와 비슷한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윌리엄 텔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와 아들에 얽힌 이야기 또한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오스트리아가 스위스를 지배하던 시기에 스위스에는 윌리엄 텔이라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들과 함께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평소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광장에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대신 광장 한 가운데 높은 나무 막대기가 하나 세워져 있고, 그 위에는 모자가 하나 꽂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무 막대기 앞에는 안내판이 하나 있었는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이 모자는 성주 헤르만 게슬러님의 모자이니 광장을 지날 때에는 경례를 하고 지나가시오.” 윌리엄 텔은 무심코 경레를 하지 않고 광장을 지나갔고, 성주의 호위병들에게 붙들려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이 성주에게 찾아가 아직 어린 아들이 있고 평소에 착한 사람이므로 선처해줄 것을 부탁하자 악한 성주였던 게슬러는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바로 윌리엄 텔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머리에 사과를 놓고 그것을 맞히면 풀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심지어 윌리엄 텔 자신조차도 망설이고 있을 때 아직 어렸던 아들이 성큼성큼 나무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사과를 머리에 올려놓았습니다. “난 아버지를 믿어요!” 아들은 당당하게 모든 사람들과 악한 성주 게슬러 앞에 선언했습니다. 윌리엄 텔은 화살을 쏘았고, 아들의 머리에 있는 사과를 명중시켰습니다. 그 뒷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알고 보니 윌리엄 텔은 화살을 두 개 준비했었습니다. 만일 사과를 맞히지 못하고 자신이 아들을 쏘게 된다면 남은 하나의 화살로 성주 게슬러를 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성주는 이것을 알고 윌리엄 텔을 더 깊은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우여곡절 끝이 탈출한 윌리엄 텔은 성주를 활로 암살하고 그 지역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제가 소개한 이 두 개의 이야기에서 ‘믿음’에 성공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유일한 한 사람 윌리엄 텔의 아들입니다. 그가 보여주는 믿음은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입니다. 저는 이번 주일부터 우리에게 있는 믿음과 믿음의 가장 중요한 증거로서의 예배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먼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격려하면서 사용했던 예배의 기초로서의 ‘믿음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하려 합니다. 1. 신조(信條)의 의미 여러분은 혹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순서에 대해 고민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요즘 교회에 비해 예배 순서가 조금 많은 편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우리 교회의 예배 순서의 의미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항상 예배를 시작할 때 ‘신앙고백’을 합니다. 우리 교회가 드리는 대부분의 예배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신앙의 고백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하고 고민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교회는 오랫동안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으며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항상 고백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도들이 고백한 신앙의 핵심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양한 이견이 있습니다만 일반적인 의미로 옳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난 2000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신앙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인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고, 그것은 다양한 신앙 고백서 및 소위 신조로 표현되었습니다.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하이델배르그 신앙 고백 등등이 그것입니다. 이 고백서와 신조들은 물론 성경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을 토대로 건강한 교회와 성도들이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가장 기본적으로 어떻게 고백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한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자, 그리면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 신경을 다시 한번 다 같이 천천히 읽어볼까요?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고백하는지 아시겠습니까? 2.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러한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믿음을 가르치신 예수님은 재미있기도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예수님은 부정적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설교의 서두에서 광대의 이야기와 윌리엄 텔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믿는 것과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믿음대로 사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믿음대로, 믿는 대로 사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위험하기도 합니다.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아는가? 무엇을 믿는다고 고백하는가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광대의 서커스를 보는 모든 관객에게는 광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만들어내는 것은 박수까지입니다. 환호까지입니다. 자신의 삶을 움직여서 광대의 등에 올라타지 않습니다. 윌리엄 텔의 이야기는 믿음의 다양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에게 활을 잡을 것을 요구하는 성주도, 윌리엄 텔과 함께 살고 있던 동네 사람들도, 윌리엄 텔 자신도 모두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활을 잘 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주 게슬러는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윌리엄 텔을 오히려 시험합니다. 믿음이 믿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믿음이 있지만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믿음이 상식을 이기지 못합니다. 윌리엄 텔은 자신에게 허락된 능력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능력에 대한 믿음을 자녀에게 적용시키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한 사람,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그리고 아버지에게 허락된 능력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결과가 다가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까지 있었습니다. 그 믿음에 평안이 있고, 역사함이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어떤 신앙을 고백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를 만들었던 중세시대는 신앙의 암흑기였습니다. 수많은 좋은 신앙 고백서들을 만들었지만 교회는 점점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어떤 삶의 변화의 역사의 변화를 만들어내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쉽지만 그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과 삶을 지키며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음과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은 이 땅의 가치와 그 가치를 따라가는 인간의 탐욕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의 역사(your work produced by faith)” 바울은 재미있게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두 번의 편지에서 모두 ‘믿음의 역사’라는 말을 사용해서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그가 칭찬하고 있는 ‘믿음이 역사’란 무슨 말일까요? 영어 성경이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your work produced by faith”입니다. 직역하면 ‘너의 믿음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믿음은 관념적인 측면을 가지고 잇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가진 관념성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고전 13장에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고전13:2)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란 얼마나 커야 하는 것일까요? 재미있게도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셨습니다. 마 17:20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마 17: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은 그 크기를 재는 것이 무의미한 것입니다. 누가 더 큰 믿음인가를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믿음은 그것이 얼마나 크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즉 관념 속에 존재하는 믿음과 능력으로 나타나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그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면 산을 옮기는 능력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역사’를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그저 관념적인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에 대하여 칭찬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만드는 열매를 함께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연약한 교회였고 어린 교회였지만 그들을 선교했던 예루살렘교회와 사역자들을 도왔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했고, 사랑으로 이웃과 교회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믿음과 말씀이 만나서 삶을 새롭게 만들 줄 아는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된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라는 열매를 만들기 위해 두 가지를 이겨야 했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 밖의 핍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 1:4)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직접적이고 잔혹한 핍박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넉넉하게 그 핍박을 이겨냈습니다. 사실 역사상이 모든 교회는 외적인 핍박에 무너진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가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교회 내부에 있었습니다. 광대의 이야기와 윌리엄 텔의 이야기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 두 이야기의 현장에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는 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믿는 대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싸움입니다.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2-3) 초대교회는 믿음의 역사를 믿고 이루는 성도들과 믿음은 있지만 역사함이 없는, 믿음의 능력과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또한 믿음의 역사를 부정하는 교회 내에 있었던 사람들과 믿음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과감하게 그들에 대해 선언합니다. 참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가 없는 믿음, 믿는다고 생각하되 자신의 욕심과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4. 우리의 믿음, 하나님이 능력 우리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예, 저는 우리들 모두에게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도대체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서 나를 변화시키고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까?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신 말씀처럼 우리의 믿음에는 역사함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지켜보시면 하나님이 숨겨둔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에서 바울은 주어를 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역사함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자격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믿음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믿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바를 열매 맺게 하십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을 생각하면, 내 인간성을 생각하면, 내 욕심과 죄성을 생각하면 참 보잘 것 없고,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함을 기뻐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역사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능력 주셔서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믿음의 열매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어가 내가 아닌 하나님으로 바뀔 때 우리는 믿음의 역사함이 있는 성도요 교회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다시 묻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그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 믿음으로 내가 변화되고 있습니까? 그 믿음으로 내 가정과 삶이 변화되고 있습니까? 나의 욕심과 죄와 오랜 습관이 산이 옮겨지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기를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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