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9. 일꾼보다 예배자 - 2. 영적 예배 | 이응도 목사 | 2012-09-12 | |||
|
|||||
l 본 문 : 로마서 12:1-2 l 제 목 : 일꾼보다 예배자 ? 2. 영적 예배 지난 주 월요일, 노동절에 필라델피아 기독교 방송국 주최로 7개 교회와 필라 기독교 방송국팀, 총 8팀이 참석하는 축구 대회가 열렸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라 우리 교회도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했습니다. 사실 이번 축구대회를 준비하면서 걱정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축구라는 것이 남성적인 운동이면서 이기고 지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쉽게 과열될 수 있고, 교회 간에 감정적인 대립이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려했었습니다. 하지만 개 교회가 서로 조심하고 존중하면 그 정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축구 대회를 하던 날, 비가 참 많이 왔습니다. 비 맞으며 축구를 하는 것이 나름 추억이 되는 일이라 모두들 열심히 뛰었습니다. 우리 초대교회는 첫 경기에 지고, 두 번째 경기는 이겼습니다. 두 번째 경기를 마친 다음 아직 대회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만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뭔가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경기라는 것이 이기면 좋은 것이고, 또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지고도 서로를 축하하며 즐거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 날 경기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남성들로 이뤄진 축구팀을 구성할 수가 없어서 전도를 목적으로 믿지 않는 이웃들을 시합에 참석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을 꼭 ‘부정선수’라고 탓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합니다. 서로 양해를 구하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서 충분히 선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선수를 뛰게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교회가 연합해서 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목적과 이유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비록 한 경기를 이기기는 했지만 그리 즐거운 마음이 아니었고, 일찍 교회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히려 교회당으로 와서 성도들과 함께 바비큐를 즐기고 다른 운동을 했습니다. 시작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끝은 아주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남은 축구 대회의 일정이 그리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결승에 오른 두 팀이 서로 다른 팀에 부정 선수가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고성이 오가고, 좋지 못한 말들이 오갔습니다. 한 교회가 짐을 싸서 가버렸고, 남은 교회가 자랑스럽게 우승컵을 가져갔습니다. 전체 축구 대회를 도와서 진행하던 필라 축구협회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쯧쯧… 교회가 왜 이래요.” 저는 이번 축구 대회가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7개 교회와 방송국이 모여서 하나님을 내세웠습니다. 준비하는 일과 대회를 진행하는 일에 기도했고 예배했습니다. 같은 지역의 교회가 서로 연합하고 섬기는 대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었습니다. 체육대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예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더 잘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방법으로 경기를 준비했고, 서로를 비난하며 싸웠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가 될 수 있었는데, “쯧쯧… 교회가 왜 이래요…”라는 말을 듣는 비참한 대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1. “Worship = Worth + ship ‘예배하다’는 말의 영어 단어는 ‘worship’입니다. 이 단어는 ‘가치’를 의미하는 ‘worth’와 일반적으로 ‘배’ 혹은 ‘선적하다’, ‘나르다’라는 뜻을 가진 ‘ship’이 결합한 단어입니다. 이렇게 어원을 풀어 보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worship)에 대해 다소 색다르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요소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먼저 예배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통로들을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늘로부터 허락된 아름다운 가치(worth)가 내 삶에 다가왔음(ship)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는 찬양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worth)있는 것을 노래하고 칭찬하며 즐기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 그 아름다운 가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다시 하늘에게로 돌려지는(ship) 것입니다. 예배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 허락된 소통의 방식입니다. 사람은 원해 하나님 나리의 모든 가치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비로소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로부터 허락된 ‘구원이라는 빛나는 가치’ 때문에 우리는 서로 하나님과 교통(ship)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배에는 말씀의 나눔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늘로부터 생명의 말씀(worth)이 교회에 전해지는(ship) 것입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생명의 떡을 나누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나누며 함께 생명을 나눕니다. 예배에는 헌신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헌신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약속의 징표이자 고백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예물을 드리는 것은 우리들의 헌신의 작은 표현일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들을 위해 헌신하신 것은 참으로 비교할 수 없이 크고 허락하신 은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우리는 가장 귀한 것을 구별하여 드림으로 우리의 헌신하는 삶을 약속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없는 이 아름다운 자발적인 헌신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삶(worth)을 나누며 실습하는(ship) 과정입니다. 예배에는 결단과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내게 전해졌는데, 내가 아무런 변화도 결단도 없다면 내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내게 전해진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름다운 은혜와 사랑(worth)에 감사하여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ship)이 예배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삭개오, worship의 예 여러분은 제가 worship의 어원으로 드린 예배의 의미에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런 의미들이 실현되고 있는 한 사람의 삶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생명의 말씀 지난 주에 여러분이 읽고 묵상하신 내용 중에서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의 삶의 참된 예배의 길을 생각해 봅시다. 삭개오는 원래 진리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된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께서 그에게로 다가오셨습니다. 참된 가치에 대한 호기심과 열심으로 그가 뽕나무 위에 올라갔을 때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삭개오의 초청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 19:5) 삭개오는 아주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눅 19:6) 재미있는 것은 그의 태도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는 지금 아직도 서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에는 귀한 손님이 집에 오면 종들을 시켜서 발을 씻깁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데 시간이 제법 걸리지 않았겠습니까? 마실 물을 주었을 것입니다. 먹을 것도 내놓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덕담도 하셨을 것이고, 말씀도 강론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아직 서 있습니다. 그는 지금 어쩌면 요즘 말로 ‘멘붕’이 왔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내 집에 메시야가 임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다고 침 뱉음을 당한 내 삶에 이 세상에는 찾을 수도 없는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진리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지금 어쩔 줄을 모습니다. 앉지도 못하고 서서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예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재물을 위해 살아왔는데, 이제는 내 삶에 찾아온 참된 가치를 위해 살겠노라고 결단합니다. 그의 삶이 변화되고 그의 집이 변화되었습니다. 삭개오 이야기의 결론은 10절에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아름다운 목적이 삭개오의 삶과 가정을 통해서 선포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손가락질 받던 그 가정이 복음을 증거하는 통로가 되어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누가복음 19장 1-10절에서 소개되는 삭개오의 집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현장입니다. 지금 삭개오의 집에는 예수님이 찾아오셨고, 신앙의 고백이 있고, 찬송이 있고, 말씀이 있고, 기도가 있고, 헌신이 있고, 변화가 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참된 가치가 열심히, 부지런히 shipping 되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 주님이 오셨고, 그를 통해서 복음이 증거됩니다. 예배는 이렇게 드리는 것입니다. 3.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크게 구별하여 보자면 1-8장까지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설명합니다. 9-11장까지는 믿음이 아닌 행함과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자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실패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12장 1절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12장부터는 이신칭의 교리의 적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성도와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에 이를 수 있으므로, 이스라엘은 믿음이 아닌 율법과 행위에 의존하여 실패하였으므로….”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 교회와 성도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4. 영적 예배
혼자서 그런 일을 잘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또 어떻게 할지 잘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두 가지를 허락하십니다. 먼저 성령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을 밝히시고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를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영적 존재인 사람은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지 않으시면 우리는 금방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의 질서를 예배하며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키셔서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 살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교회를 허락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배우고 훈련받고 성장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함께 예배하며 함께 성장합니다. 성령 하나님과 교회는 성도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은혜와 사랑의 증거입니다. 지난 월요일 축구 대회는 여러 교회와 성도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로 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이 오히려 부끄럽고 추한 시간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교회들과 함께 축구를 했던 분들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함께 연약하고 어리석어서 예배의 좋은 기회를 오히려 부끄러운 기억으로 만든 것입니다. 성도의 연합과 교제라는 아름다운 가치를 서로 나누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배가 분쟁의 기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 즉 성도와 교회의 예배의 실패는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가치를 우리가 외면하고, 믿기는 하지만, 구원 받은 성도가 교회로 모였지만, 내가 받은 구원을 의심하지 않지만…. 예배에 철저하게 실패하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지난 월요일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초대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영적 예배가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영적 예배를 매일의 삶 속에서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땅에서 살되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가치를 나누며 증거하며 살아서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