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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23. 일꾼보다 예배자 - 3. 예배할 수 있을까? 이응도 목사 2012-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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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본 문 ; 누가복음 10 38-42절 말씀

l  제 목 : 일꾼보다 예배자 ? 3. 예배할 수 있을까?

 

저는 지난 주 수요일에 필라 근교에 있는 한 한인 교회의 헌신 예배에 설교로 섬겼습니다.  그 교회는 한 때 필라 지역 한인 교회의 모범이 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형 한인 교회들 틈에서 이렇게 성장할 수 있다는 좋은 예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좋은 예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는 너무 쉽게 분열했고, 열심을 냈던 목회자는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렸습니다.  교회는 사분오열되었습니다.  그 교회가 개척될 때부터 섬겼던 소위 family들의 분열은 심각한 교회의 위기를 불러왔고, 지금은 가장 성장했던 시기의 약 1/4만 남아서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알면서도 극복되지 않는 이민 교회의 병폐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늘 그 교회를 가장 열심히 섬기던 핵심 멤버들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분열로 끝맺습니다.  타협도 없고 해결도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결국 자신의 삶과 가정을 바쳐서 교회를 일으켰던 그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모두가 바로 그것이 이민 교회의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내가 그 문제의 트랩 속에 빠지면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1.     매개의 변증법

 

제가 한국 있을 때 친근히 지냈고, 지금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조언을 구하는 한 분이 있습니다.  경상대학교에서 국제 관계학을 가르치고 있는 백종국 교수라는 분입니다.  이 분은 손봉호 교수의 제자이면서 지금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해 평신도 입장에서 노력하고 있는 귀한 분입니다.  이분의 강의 중에 민주 시민의 교양이라는 기초 과목이 있습니다.  그 강의를 요약하면 일법이칙삼교사의(一法二則三敎四義)’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하면 일법(一法)매개(媒介)의 변증법(辨證法)’입니다.  이칙(二則)은 두 가지 황금의 법칙을 말하는데, 하나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강자가 자르고 약자가 선택하기입니다.  삼교(三敎)무죄추정의 원칙이익의 충돌’(공적인 정책의 결정과정에서 해당 정책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 그 과정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차선의 선택(건강하고 정당한 차선의 유익)입니다.  사의(四義) 4대주의, 즉 지켜야 할 네 가지 이념을 말하는 것인데,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와 복지주의입니다.   

 

좀 어렵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일법(一法), 매개(媒介)의 변증법(辨證法)’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매개의 변증법이란 매개의 관계에 있어서 매개자의 존재가 매개물의 본질보다 선행하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매개라는 말이 좀 어렵지요.  쉽게 설명하자면 수단같은 개념입니다.  어떤 목표를 얻기 위해 수단을 사용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발전하다 보니 수단의 가치가 목표의 가치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연약한 성도들이 서로를 도와서 하나님 나라의 교제와 삶을 연습하고 실천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목표일까요?  하나님 나라가 목표일까요?  ,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목표가 되다 보면 이 땅에서의 교회의 성장과 부흥이 마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양 생각하게 됩니다.  , 다른 예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목회자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를 돕고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이 때 하나님의 목표가 됩니다.  목회자는 목표를 위해 허락된 직분입니다.  그런데 때로 교회라는 가치보다 목회자가 중요시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교회에서의 직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은 목표일까요?  수단일까요?  우리가 하는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사하는 것 자체가 목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교제를 경험하는 수단입니까?  매개의 변증법이란 말은 어렵지만 그 개념은 우리가 늘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의 가치가 역전되는 것을 말합니다.  수단이었던 것이 더 중요시되고, 그것을 위해 일하다 보니 목적을 상실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예배를 잃다.

 

성도 여러분!  매개의 변증법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본질적 가치와 수단적인 가치가 역전되는 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도 발생합니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 교회당을 구입합니다.  그런데 교회당을 만들어가는 중에 예배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헌금이 부담이 되기도 하고, 나눠져야 하는 짐을 생각하면서 예배의 마음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성가대를 운영하면서 시험에 빠집니다.  때로는 찬양이 마음에 들지 않고, 때로는 지휘자가 마음에 들지 않고, 반주자가 싫고, 옆에 앉은 성가대원에 싫습니다.  보다 좋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가대를 하면서 함께 예배하는 대원들 때문에 예배의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 교회당을 꾸밉니다.  악기를 구입합니다.  그런데 교회당을 꾸미는 중에 성도의 교제가 깨어지고 예배의 마음을 상실하게 됩니다.  악기를 구입하고 배치하는 중에 예배의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너무 자주, 흔하게 경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사실에 우리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함께 예배하기 위해 교회로 모인 우리가 서로에 대해 예배에 걸림이 되는 현상, 이것이 매개의 변증법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신앙 생활을 잘 하던 성도가 시험에 빠지고 예배하는데 실패하게 되는 이유가 세상이나 불신자 때문일까요?  함께 신앙 생활을 하고, 함께 예배하기 위해 허락하신 성도와 성도의 교제의 실패가 결국 예배의 실패로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만나는 마르다는 바로 이 트랩에 빠졌습니다.  예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고백으로 시작하고 주기도문으로 마쳐야 예배입니까?  아닙니다.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주님이 그 집에 들어오셨고 그들과 교제하십니다.  바로 그곳에 가장 아름다운 예배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예배의 자리에서 한 사람이 예배의 마음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마르다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던 그녀는 왜 예배의 마음을 잃고 말았을까요?

 

3.     교회와 수많은 마르다들에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남자들만 어울려 다니면서 무엇 제대로 먹기나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가정 나사로가 있는 마을 베다니,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곳으로 가면서 아마도 생각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편히 쉬면서 맛있는 것을 제대로 먹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가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는 들뜬 마음으로 여러 가지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나사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씻고 쉴 곳을 준비한다고 바쁠 것입니다.  언니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온 집에 음식 냄새가 진동할 것입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실 곳을 청소하고 꾸미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마르다의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기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맞이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도대체 마르다의 집에 어떻게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시는지 궁금해합니다.  나사로는 종들과 함께 제자들과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손을 씻을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마르다는 먼 길에 지쳤을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느라 부엌으로 들어가고, 마리아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모시고 거실로 갑니다.  예수님이 자리에 앉습니다.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그 동안 잘 계셨어요.  어디를 다녀오셨어요?  무슨 일을 하셨어요?  저희들이 보고 싶지 않으셨나요?”  예수님은 웃으시면서 천천히 그동안 있었을 일들을 설명하시고, 또 앉은 사람들을 위해 말씀을 강론하시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고, 만남을 위한 준비가 있고, 주님이 임재하고 계시고,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고, 말씀이 있고, 감사가 있고, 헌신이 있고,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마르다가 거실에 나타났습니다.  마르다는 약간 짜증이 났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나는 이렇게 음식을 준비하느라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어요.  불공평해요.  나도 저기 안게 해주시든지, 마리아도 일하게 해주세요.”  알고 보니 그 집에서 유일한 한 사람, 가장 열심히 일했던 사람 마르다가 예배에서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소외시킨 것일까요?  사람들이 소외시켰을까요?  아닙니다.  스스로가 예배에서 소외되었습니다.  마르다는 많은 제물보다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 화려한 말로 드리는 기도보다 순전한 회개를 원하시는 하나님, 일꾼보다 예배자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4.     예배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여러분!  마르다는 예배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이민 교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아니 수많이 예배하고 한없이 헌신하는 교회와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며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는 권면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족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많은 일을 잘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느라 마음과 손이 분주하지만,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이미 먹는 것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은 마르다의 맛깔 난 음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요, 제자들과 이웃을 기쁘게 섬기는 정성입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집에 오셨다는 감격으로 준비하는 그 마음을 예배로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마르다에게 많은 일로 분주하고 염려하는 것보다, 한두 가지 일에 만족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일을 적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분주한 손과 염려하는 마음을 꾸짖으시고, 감사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어릴 적부터 교회를 섬기면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이 일이었습니다.  교회 내에 있는 수많은 마르다들 말입니다.  그들은 결코 주방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들을 결코 사역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봉사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뼈 빠지게 헌신하고 수고하고 일합니다.  그리고 힘들다 말합니다.  나만 일한다 말합니다.  자기처럼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불평합니다.  자기처럼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며, 자신이 얼마나 이 교회에서 중요한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자랑하지만 자신은 이미 충분히 지쳤으며 충분히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쉬지 못합니다.  일하고 봉사하는 성도로서의 역할은 배웠으되, 기쁨으로 예배하고 감사함으로 섬기는 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이것이 한편 계속 그들을 격려해서 일하도록 한 목회자들의 공동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이 트랩에서 자유를 얻어야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초대교회는 교회 규모에 비해 참 할 일이 많은 교회입니다.  저는 때로는 목회자인 저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여러분들이 참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저보다 더 나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깊은 곳에 감사와 기쁨의 샘이 더욱 깊어지고,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맑고 깨끗한 헌신이 계속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만일 수고하고 헌신하되 혹 기쁨이 사라진다면, 누군가가 나처럼 하지 않는 일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면, 잠시 멈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삶으로 예배하는 성도를 원하십니다.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예배는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의 기쁨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함이며,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그 일에 우리의 불평과 불만과 교만과 질투가 섞일 수는 없습니다.  일꾼이 아닌 예배자, 자기 열심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감사로 드리는 삶의 예배가 참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르다에게라는 글을 다시 한번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몇 해 전에 한번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 글로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일꾼이 아닌 예배자로 더욱 깊은 곳에서 울 주님을 만나시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르다에게

 

마르다야,

나는 이곳 베다니로 오는 길 내내

군침이 돌았단다.

어릴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일찍부터 요리를 배웠던

너의 맛깔난 솜씨가 자꾸만 생각나더구나.

그래,

좀 부끄럽긴 하다만

난 사실 배가 많이 고팠단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얼른 네 솜씨를 보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내 고향 집처럼 편안한 너의 집에 들어가

내 어머니의 손맛과 닮은 네가 만든 음식을 먹고 싶었다.

 

마리아는 여전히 밝고 예쁘구나

부끄럼도 없이 달려와 안기고는

내 손 붙들고 집으로 들어와

발까지 씻겼다.

저절로 입가에 웃음 머물게 하는 마리아의 즐거운 모습에

오랜 광야 길에 찌들었던 피로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마리아는 내 앞에 턱을 괴고 앉아서

이야기를 졸라댔다.

 

네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안을 휘도는 음식 냄새만으로도

네가 무엇을 하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마리아처럼 소리치며 반겨주지 않아도

잔잔한 웃음으로 섬기는 그 마음을

우리는 모두 주린 배로 기대하고 있었다.

하하하...

어쩌면 우리가 베다니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맛난 빵 한 덩이와 따뜻한 국이 한 그릇이

우리들 마음 속에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얼마나 말씀이 그리웠고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말이다.

달려와 안기고 싶었을게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게다.

그동안 있었던 일도 털어놓고 싶었을게다.

하지만 늘 그랬듯

네 마음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선함으로

너는 부엌으로 갔고

집안 가득 맛있는 향기로 채웠구나

너로 인해 우리 모두가 큰 기쁨을 누리고

너로 인해 새 힘을 얻어

오늘 지나 새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겠구나

 

마르다야,

나는 늘 네가 고맙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마음과 손길로

너는 광야에 내릴 만나를 빗는 것이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나누었던 보리떡과 물고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섬김이 많은 사람을 살리고

한 사람의 헌신이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지 않니

그 나라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지 않니

 

너무 많은 것 마음에 담지 않아도 좋다.

너무 많은 일 하지 못해도 좋다.

지금 모두에게 간절한 것을 준비하는 너는

이미 가장 아름다운 사람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다.

 

이제 마르다야!

저기 빵이 익어가는 냄새,

, 보글보글 국이 끓는 소리....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구나

이제 우리들을 사랑의 잔치로 초대해주겠니?

식탁에 둘러 앉아 너의 섬김을 마음껏 즐기게 해주겠니?

참 고마운 사람 마르다

섬길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 마르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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