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30. 일꾼보다 예배자 – 4. 동네 잔치 열렸네! | 이응도 목사 | 2012-10-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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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본 문 : 누가복음 15장 1-7절 l 제 목 : 일꾼보다 예배자 ? 4. 동네 잔치 열렸네!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세가지 비유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일백 마리 양 비유입니다. 그 중 한 마리를 잃으면 선한 목자는 아흔 아홉을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아서 들판을 헤매고 다닙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서 함께 기쁨을 나눕니다.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눅 15:5-6) 두 번째 비유는 열 드라크마 비유입니다. 열 개의 드라크마는 유대인의 결혼 풍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총각은 열개의 드라크마를 엮어서 목걸이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변하지 않는 완전한 사랑의 증표로 사랑하는 한 처녀에게 주는 것입니다. 말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랑을 약속하는 상징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대에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남편들이 원하지 않는 전쟁터에 군사로 혹은 부역을 하기 위해 떠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혼자 남은 아내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열 개의 드라크마로 만든 목걸이를 만지고 또 만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드라크마를 엮은 끈이 약해서 끊어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럴 때 아내들은 어떻게 할까요? 드라크마가 얼마나 큰 액수인가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남편에게서 받은 사랑의 증표가 끊어진 것입니다. 아내는 그것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샅샅이 쓸고 뒤집니다. 드디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눅 15:9) 세번째 비유는 두 아들 비유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탕자 비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청하여 자신이 상속받을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떠납니다. 아들은 먼 곳으로 가서 허랑방탕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한글 성경이 참 간략하면서도 의미 있게 번역을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방탕한 삶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것이지요.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고생을 하다가 아버지의 집을 기억합니다.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늘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달려나가 아들을 맞이합니다. 아들은 눈물로 아버지 앞에 엎드려 회개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 대하여 이렇게 반응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22-24) 여러분은 이 세가지 비유에서 공통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왜 비슷하게 보이는 이 세 비유를 연달아서 주셨을까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1-2)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세가지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주인공들과 그 역할입니다. 목자와 여인과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주인이고 아버지면서 찾고 기다리고 영접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음으로 양과 동전과 아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헤매고 잃어버리고 떠나는 역할을 합니다. 어린 양처럼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목자를 떠나기도 하고, 자기 의지와 관계 없이 이미 언약으로부터 멀어져 있기도 하고, 욕심에 마음을 빼앗겨서 스스로 아버지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들에서 또 하나 발견해야 하는 공통점은 각 비유는 같은 세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잃어버림이요, 두 번째 단계는 되찾음이요, 세 번째 단계는 기쁨의 잔치입니다. 자, 이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했던 질문에 대해 답을 찾아볼까요? 왜 메시야가 죄인과 세리들과 먹고 마시는 것일까요? 예, 죽을 것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나간 것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살렸고, 찾았고, 돌아온 것들과 함께 기쁨의 잔치를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단계 중에서 어느 단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 이미 예수님은 세 번째 단계, 즉 기쁨의 잔치의 단계를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되찾았고, 기쁨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영접하시는 예수님 그런데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한 구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을 ‘영접한다’(눅 15:2)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다시 찾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누가복음이 숨겨 놓은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역할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첫 번째 비유에서 누구의 모습으로 등장합니까? 예, 목자입니다. 잃어버린 양, 아니 엄밀히 말하면 자기 발로 죽음의 광야로 떠나버린 한 마리 양 ? 그 양을 찾아서 광야를 헤매는 선하고 진실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놓아두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양을 찾아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광야를 헤매는 선한 목자, 그의 사랑의 발걸음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을 영접한다’고 했습니다. 죄인들을 품고 그들에게 사랑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 우리는 예수님은 어떻게 만날까요? 예수님은 지금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있습니다. 언약이 간절히 회복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사랑이 회복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희미한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땀 흘리며, 눈물 흘리며 뒤지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역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을 영접하려고 애쓴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선언하고, “내 인생에 아버지는 더 이상 없습니다. 아버지는 나에 대해 죽었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집을 떠난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아들의 죄를 보지 않습니다. 아들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보지 않습니다. 오직 그 아들이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아버지의 모습을 ‘죄인을 영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그들의 말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죄인들을 자신의 사랑의 품에 영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죄인을 영접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먼저 영접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품으시고 다시 찾으시고 회복시키시고 새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말은 ‘초대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또 이 말은 죄와 악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품을 떠난 우리들을 ‘전도한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가슴을 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시기하고 질투하여 “자기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영접한다.”라고 표현했고, 우리는 주님의 초청 즉, 전도의 결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3. 성도의 과거, 그리고 현재 그리고 여러분, 이 비유들에서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까요? 각 비유에서는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나타납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이었습니다.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였습니다. 생명의 언약이 파기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할 때 주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영접하시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생명을 전해주셨습니다. 우리를 품으시고 안으시고 영접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다시 찾으셨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과거입니까? 현재입니까? 세 비유에서 길을 잃었던 것은 이미 오랜 과거입니다. 회복된 것도 벌써 과거입니다. 죄와 악에, 어리석음과 연약함이 취해 살 던 일은 벌써 과거의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우리를 영접하셨고, 회복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는 이 비유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세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우리의 현재는 바로 ‘잔치’입니다. “잔치, 잔치 열렸네! 천국 잔치 열렸네”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현실이요 삶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천국의 잔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함께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동네 잔치 열렸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래 전에 불렀던 노래가 자꾸 기억났습니다.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잔치 잔치 열렸네 동네 잔치 열렸네….” 기억나십니까? 밑도 끝도 없이 잔치가 열렸다고 노래하는 것이었는데요, 저는 오늘 천국 잔치에 대해서 이 노래가 보여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비유에서 발견되는 마지막 공통점은 모든 잔치에 ‘초청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잔치는 되찾은 양과 드라크마와 아들만의 잔치가 아니었습니다. 목자와 주인과 아버지는 온 동네 사람들을 다 초청합니다. 함께 즐거워합니다. 함께 기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눅 15:6, 9)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3)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기를 소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핵심은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기쁨과 우리의 삶이 만날 때 가장 영광스럽게 드려집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에서 하나님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돌아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고, 함께 나누는 잔치에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를 영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주님께로 영접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 나라의 축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회복의 기쁨과 감사가 있는 삶의 예배, 이웃들과 함께 즐기는 잔치의 삶이 있는 초대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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