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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28. 일꾼보다 예배자 – 7. 세례 요한의 예배 이응도 목사 201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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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본 문 : 1:1-4

l  제 목 : 일꾼보다 예배자 ? 7. 세례 요한의 예배

 

제가 청소년기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 있다면 단연 삼국지입니다.  아마 10번은 넘

게 읽고 또 읽었을 겁니다.  얼마 전에 삼국지를 배경으로 한 적벽대전이라는 영화가 중국에서 만들어졌는데, 영웅본색 시리즈를 만들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페이스 오프와 미션 임파서블2를 만들었던 오우삼 감독의 작품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에피소드 가운데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에는 제갈량과 주유라는 걸출한 두 명의 영웅이 등장합니다.

 

잠시 적벽대전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위나라의 조조와 오나라의 손권, 그리고 촉나라의 유비는 서로 호각지세를 이룹니다.  그 중에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조조의 위에 대항해서 유비와 손권은 연합 전선을 구축합니다.  손권의 책사였던 주유와 유비의 책사였던 제갈량은 적벽이라는 큰 강과 절벽이 있는 곳에서 해전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주유가 제갈량을 볼 때 지금은 비록 서로 연합하고 있지만, 미래에 참으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조조의 군대를 이기고 나면 나중에 분명 오나라에 큰 위협을 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주유는 여러 가지 계략으로 제갈량을 죽이려 하지만 제갈량은 조자룡의 호위를 받으면서 유유히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갑니다.

 

적벽대전에서 오나라와 촉나라, 즉 주유와 제갈량 연합군은 조조의 위나라 군대를 크게 이깁니다.  유비의 촉나라는 이 전쟁을 통해서 형주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합니다.  주유는 그 땅을 뺏기 위해 여러 번 제갈량과 전쟁을 하지만 번번히 지략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그는 결국 전쟁에서 당한 부상과 화병으로 병들어 눕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한탄합니다.

 

분하다무정하다인생이여, 얄궂은 숙명이여하늘이시여, 이 땅에 주유를 내시고 왜 또 제갈량을 내셨습니까!”

 

그는 이 말을 하고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동양에 주유와 제갈량이 있다면, 서양에는 살리에리와 모짜르트가 있습니다.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살리에리는 당시에 이미 베토벤과 슈베르트, 그리고 리스트의 스승이었고, 비엔나 궁정의 악장으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모짜르트는 그보다 6살 더 젊었고 살리에르보다 15년 늦게 사교계에 등장합니다.  모짜르트는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천재성으로 많은 인기를 얻게 됩니다.  이미 성공 시대를 달리고 있던 살리에리는 모짜르트의 등장에 많이 당황합니다. 일반적으로 살리에리 증후군으로 일컫는 살리에리의 모짜르트에 대해 억누를 수 없는 질투하는 마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살르에리 증후군이란, ‘노력으로 승부하는 평범한 수재가 천재적인 재능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열등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2인자 콤플렉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살리에리는 결국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모짜르트를 독살하고 맙니다.  살리에리는 하나님께 절규합니다.

 

왜 하늘은 이 살리에르를 낳고 모차르트를 낳으셨나이까!”

 

1.     나는 그림자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비교하고 괴로워하고 좋지 못한 판단을 하고 삶이 무너지는 일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그리 드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몇 주 전에 생각했던 다윗과 사울왕 또한 같은 문제 속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세례 요한을 발견합니다.  요즘 포도나무에서 세례 요한을 공부하고 있는데요, 그의 삶은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비참합니다.  철저하게 그림자로만 살아야 했던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를 원합니다.  남녀노소와 관계 없이 사람은 늘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어떤 가치가 있었는지를 고민하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가진 특성입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은 참으로 소중하고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너의 삶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아마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며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오래 전 구약에서부터 다른 사람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인생으로 예언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의 길을 예비하는 자,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자의 사명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1:1-4)

 

저는 요즘 세례 요한의 삶을 묵상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히 그가 보여준 두 가지 아름다운 결단에 대해 깊은 감동이 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내린 두 가지 결단,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되지 않기로 결정하다.

 

먼저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내린 결단이 있습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좀 다르게 이름 붙여봤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스스로 하나님이 되지 않기로 결정하다입니다.

 

저는 가끔 상담을 하면서 당황스러운 경우를 만납니다.  예를 들어 자녀 교육 문제로 어머니되는 분이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합니다.  어머니와 자녀를 상담해보니 아버지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상담을 이번에는 제 편에서 요청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상담을 중단시킵니다.  자녀와 아내가 이렇게 아파하고 힘들어합니다.  상담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권면하면 대부분이 아버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가정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죽든 살든 내가 책임집니다.”  그리고 문제로 고통 당하는 자녀와 아내를 데리고 나갑니다.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사실 제게 다시 오고 오지 않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제껏 자기 중심적인 결정을 해오던 방식에서 벗어나서 좀더 행복하고 좀더 지혜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청소년들을 상담하면 같은 말을 합니다.  제 인생이예요.  잘되든 못되든 제가 알아서 할거예요.”  과연 알아서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자신을 얼마나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자신의 삶에 제대로 주인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 대한 판단과 결단을 신뢰하십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삶에 대해 철저하게 자신이 주인이 되지 않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광야에 머물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요단강에 와서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메시야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메시야의 길을 밝히는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삶을 순교로 마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주인이 되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자신의 삶의 하나님이 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내 삶이니까 내 뜻과 욕심대로 살아가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세상은 나보다 강하고 지혜롭고 악합니다.  내 뜻과 생각과 욕심이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 자신이 결코 제대로 주인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오직 하나님이 뜻으로 살았고, 그 뜻이 자신을 메시야의 그림자로 부를 때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11:11)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 요한, 그는 사람이 인생으로 살 수 있는 가장 지혜롭고 아름다운 일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다.

 

또 하나 그에게는 중요한 결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에 의해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한 때 참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헤롯왕이 눈에 가시 같은 요한을 죽이고 싶어도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 그는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쉽게 빠지는 유혹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그 사람의 관계가 그 사람을 설명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사람에 대한 반응과 평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함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 자신에 대한 평가와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 ?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미 자신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역할과 사명에 관한 분명한 입장 - 그것은 바로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존경하고 메시아라고 추종하고, 심지어 왕으로 삼으려고 해도 요한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무엇이라 말하는가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믿고 한걸음씩 든든하게 걸어갔던 사람이 바로 요한인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의 삶의 고비마다 예수님이 걸어가실 길을 예비하며 밝히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선지자 중에 가장 큰 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 ? 요한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겸손과 헌신의 삶이었습니다.

 

4.     요한의 예배를 준비하며

 

하루는 제자들이 요한을 찾아와서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합니다. 

 

선생님, 전에 선생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던 예수라는 청년 기억나십니까?  그 사람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 몇 사람도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이 때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박탈감, 배신감, 질투심이런 마음이겠습니까?  아니면 자포자기하는 마음일까요?  그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그의 신발끈조차 맬 수 없는 존재란다.  그는 빛이면 나는 그림자에 불과하단다.  그는 빛나야 하겠고, 나는 이제 물러갈 때가 되었구나.” 

 

성경이 그를 인생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인생으로 묘사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자신의 뜻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으로 채웠습니다.  그림자여도 좋고, 길을 예비하는 자도 좋습니다.  신발끈조차 맬 수 없는 미약한 존재여도 좋고, 날도 쇠하여져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도 좋습니다.  요한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바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한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서 합당한 영광을 우리의 삶을 통해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배에 성공한 사람일까요?  실패한 사람일까요?  , 요한은 그의 평생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예배의 사람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 그를 교만하게 만들어서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으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의 질문을 저 자신에게 계속 던졌습니다.  나도 요한처럼 예배할 수 있을까?  나도 하나님만을 높이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말씀 앞에 엎드려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때로 그 말씀이 내 판단과는 다르고, 내 성품과도 다르고, 내 가치와도 달라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  내가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평가가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과 뜻이 나를 결정하도록 하나님 앞에 더욱 낮고 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낮을수록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고이고, 내가 깊을수록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강물이 되어 세상으로 흘러가게 될 것인데, 나도우리 가정도…. 초대교회도 요한처럼 살고 요한처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까?  내가 낮아져서 그리스도가 높아지고, 내가 나를 내려놓아서 오직 하나님의 뜻이 나를 인도하고, 그리하여 나는 망하고 그리스도가 흥하고, 나는 보이지 않아도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이 이 세상에 증거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예배란,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인데, 내가 요한처럼 오직 주님의 영광의 길을 예비하는 좋은 성도와 교회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요한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예배였던 것처럼 나도 더 아름다운 예배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저는 제가 자신에게 던졌던 이 질문이 우리가 우리 초대교회와 자신들에게 전지는 질문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요한의 삶을 통해 주시는 아름다운 도전, 예배자의 삶에 대한 도전을 통해 우리도 요한처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의 예배를 드리겠다는 아름다운 결단이 우리들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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