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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 송구영신예배 / 예수, 우리의 이웃 - 6. 내편 예수 이응도 목사 201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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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

 

* 본 문 : 룻기 25-16절 말씀

* 제 목 : 예수, 우리의 이웃 - 6. 내 편 예수

 

집에서 6살 아들 성일이와 3살 딸 승하를 함께 볼 때가 있습니다. 잘 놀기도 하지만 또 항상 다툼이 있습니다. 알아 맞혀보시겠습니까? 성일이와 승하가 다투면 누가 이길까요? 물론 둘 다 보통은 넘기 때문에 쉽게 판결이 나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강한 쪽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힘이야 성일이가 당연이 세겠지만, 어떤 것을 가지거나 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쪽이 대부분 이깁니다.

 

싸움이 일차적으로 끝나면 대부분 승하가, 때로는 성일이가 제게 옵니다. “아빠, 성일이 오빠가....”로 시작하는 승하의 하소연, “아빠, 승하가....”라고 시작되는 성일이의 하소연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한 상황을 많이 만나실텐데요, 어떻게 하십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로서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까요?

 

제게는 분명한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약한 쪽 편을 드는 것입니다. 성일이가 힘으로 동생과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그 힘을 조절해줘야 하고, 승히가 땡깡으로 오빠를 이기려고 했다면 역시 그 땡깡을 조절해줘야 합니다. 어느 한편을 들어서 그쪽을 이기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약한 쪽을 편들어서 균형을 맞춰주고 약한 쪽의 억울함을 해소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옳고 지혜로운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것이 많은 부분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1. 약한 쪽 편들기

 

우리 교단에서 가장 유명한 장로이면서 사회적으로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송봉호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쓴 책 가운데, ‘약한 쪽 편들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손교수는 약육강식을 피하기 위해서 질서가 필요한 것인 만큼 결국 윤리적 질서도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 보면 약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떤 윤리학자는 구약성경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약자에 대한 끈질긴 편애를 가지고 계셨다라고도 말합니다.” 즉 사회적인 질서와 법이 없다면 이 사회는 강자가 독식하고 약자가 희생당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회는 법과 질서를 만들어서 강자가 스스로 악해질 수 있는 가능성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고, 약자는 강자의 횡포에 의해 무너질 가능성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경 또한 이것을 가장 기본적인 질서라고 말합니다. 손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약자에 대한 끈질기고 근본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랑에 의해서 죄에 대하여 약자인 우리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 사랑에 의해서 세상보다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대상이 됩니다. 연약하고 못난 우리를 편애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배우고 우리 또한 더 연약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로마서 15:1) 여기서 말하는 강한 자는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관점으로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성경입니다.

 

2. 룻의 편을 들다.

 

오늘 본문에서 보아스를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룻에 대하 불공평한 관심과 사랑을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에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경작할 농경지가 없거나 노동력이 없어서 농사를 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에서 건너온 나그네일 수 있고, 부모나 남편을 잃은 어린 아이들이나 여성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면서 새로운 법과 질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법과 질서에 가장 근본이 되는 정신은 약자를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사회적인 가난과 억압은 늘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법과 질서를 정하셔서 사람의 욕심과 폭력성이 그 사회의 질서를 결정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법 중에 하나가 바로 추수할 때 곡식을 다 거두지 않고 농경지나 노동력이 없어서 추수할 것이 없는 사람들, 심지어 들판에 떠도는 동물들이 곡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법은 사사의 시대에 많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우리가 아는 대로, 300년 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여전히 잘 지키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추수를 할 때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의 밭으로 와서 이삭을 줍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바로 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룻을 대하는 보아스의 태도는 좀 이상합니다. 룻을 여성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3장으로 가면 룻이 나오미가 시키는대로 보아스의 침소를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쩌면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 가정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달았는지도 모릅니다. 나오미는 젊은 룻에게 보아스의 침상을 먼저 찾아 들어가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을 여인으로 취하지 않습니다. 룻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룻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먼저 생각합니다. 따라서 2장에서 보아스가 룻을 특별히 선하게 대하는 이유에 대하여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8절에 보시면 룻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밭으로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계속 이삭을 주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룻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오히려 종들을 위해 준비된 물을 함께 마시라고 합니다. 나아가서 보아스는 14절을 보시면 식사를 할 때 종보다 천한 이방 여인을 주인의 상으로 부릅니다. 배불리 먹게 합니다. 그리고 15-16절을 보면 종들에게 말하기를 룻으로 하여금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하고 또 룻을 위해서 일부러 이삭을 뽑아서 흘려주라고 말합니다. 곡식단 사이에서 이삭을 주우라는 말은 마치 양식장에서 낚시를 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왜 보아스는 룻을 이렇게 선하게, 편벽되게, 불공평하게 대할까요?

 

3. 죄인들과 밥상을 나누시다.

 

바로 이 질문이 예수님에 대해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끊임없이 했던 질문입니다. 왜 당신은 메시야이면서 죄인들을 더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내가 더 필요하고, 복음이 더 필요하며, 그들을 내가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대답에 대해 어떻게 느끼십니까? 공평합니까? 불공평합니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시에 모든 죄인들, 모든 연약한 사람들을 무조건 사랑하시고 무조건 함께 식탁을 나누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을 보십시오. 그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자신의 집으로 주님을 모시고,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을 앉혀놓고 복음을 듣게 합니다. 그가 죄인이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주님을 자신의 삶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그 삶을 개방하고 복음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기뻐하셔서 그에게 큰 사랑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아스는 왜 룻이 불공평하게 보일 수도 있고, 오해를 살 수도 있는 특별한 대우를 받는지를 설명합니다. 심지어 룻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신실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건 이웃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룻이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룻이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죽은 남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었고, 남편의 민족을 자신의 민족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모압 광야를 지나 유대 광야를 거쳐서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시어머니를 집에 두고 들판으로 나와서 남편을 잃은 이방 여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이것을 듣고 보았고, 자신이 룻을 불평등하게 대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말합니다.

 

지난 주일 말씀을 나누면서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나중에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상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보아스가 하는 말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2:12) 여기서 보응과 상이라는 말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보아스와 룻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게 되었을 때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그때 당신이 보응과 상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게 바로 당신이 되었네요.” “허허허... 그러게요.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말했는데 그러게 되고 말았네요.”

 

4. 복된 사람으로 살기로 결단하는 2013!

 

성도 여러분! 2013년에는 우리 주님이 늘 여러분의 편에 서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룻에게 보아스를 보응과 상으로 허락하셨던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에도 보응과 상으로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가장 아름답고 좋은 보응과 상이 되셔서 2013년 뿐만 아니라 평생에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님의 아름다운 언약이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교회에 충만하게 성취되는 영광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바로 룻의 삶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룻에게 보아스를 보응과 상으로 주셨는지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룻이 약한 사람이기 때문이고, 스스로 더 약한 사람의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강자가 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약한 사람이면서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 대해서 강자가 되려합니다. 룻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정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그 삶은 약자보다 더 약한 자의 삶이었고, 약자를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룻의 이러한 선택에 대하여 하나님은 보응과 복을 주시되 보아스의 입술을 통하여 그 복을 말씀으로 선포하게 하시고, 보아스 자신의 삶을 통해서 말씀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연약한 자의 편에 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1편에서 시인은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선언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1:1-2) 이 말씀을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스스로 연약한 사람이 되어, 약한 사람들을 섬기며, 높아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날마다 더 낮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가장 낮은 삶을 사는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늘의 복이 그의 삶에 고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편에 서는 은혜를 원하십니까? 약한 사람이 되기로 결단하십시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내가 선택하지 않기로 결단하십시오. 내가 공격하고 내가 승리하고 내가 이익을 얻지 않기로 결단하십시오.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를 내려놓아보십시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편이 되어서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육신이 되는 이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2013,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역사하시는 놀라운 이적의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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