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6. 예수, 우리의 이웃 - 7. “나오미라 부르라!” | 이응도 목사 | 2013-01-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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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룻기 1장 19-22절 말씀 * 제 목 : 예수, 우리의 이웃 - 7. “나오미라 부르라!” 제가 미국 서부를 가면 꼭 빠지지 않고 만나는 한 가정이 있습니다. 박문옥 집사님이라는 분의 가정인데요, 지금 Las Vegas에 살고 있습니다. 1989년 3월에 인천 시민교회라는 곳에서 전도사와 집사로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좋은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박집사님 가정은 교회 건너편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린 전도사가 토요일 늦게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인천까지 허겁지겁오는 것이 불쌍하게 보였던지 올라갈 때마다 방을 한 칸 내어주셨습니다. 부인되시는 최집사님은 요리를 참 잘하셔서 토요일과 주일에는 정말 맛있는 식탁을 그 가정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때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시고, 사역이 힘들거나 문제가 생기면 따뜻한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역지를 옮긴 후에도 제게 베풀어주셨던 은혜와 사랑이 고마워서 계속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박집사님의 가정이 1994년 쯤 미국으로 갑자기 이민을 결정해서 서로 인사를 못하고 헤어졌는데, 저 역시 1998년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미국 온 지 5년이 지나서야 Las Vegas에 가서 그 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 반가웠습니다. 두 분 집사님은 이제 환갑이 되었고, 처음 만날 당시에 5살이었던 영인이는 의사가 되었고, 10살이던 상인이는 변호사가 되었고, 13살이던 정인이는 라스베가스에 있는 한 호텔의 매니저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 분들을 귀하게, 그리고 감사히 여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도사로 사역하던 초기에 그 가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여러분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섬겨보니, ‘아... 이 일은 내게 잘 맞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나는 성격도 급하고, 참을성도 없고, 성품도 별로 좋지 못한데... 과연 내가 교회 현장에서 버틸 수 있을까....?’ 신학 공부도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고, 사역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많아서 어찌할까 참 많이 고민했었습니다. 그 때 박집사님과 최집사님 두 분이 늘 힘을 주시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뭐 딱히 대단한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따뜻하게 밥 해주시고, 친절하게 대해주시고,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이제 갓 배운 신학에 저의 어리고 얕은 생각을 더해서 떠들어대면 그것을 귀담아 들어주시고, 맞장구를 쳐주시고, 때로는 토론도 해주셨습니다. 어린 저를 그래도 교역자로 대해주셨고, 또한 함께 놀아주신 것이지요. 저는 저의 20대 초반, 전도사 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준비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큰 도움이 되고 의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 함께 신앙의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저희가 교회당을 지을 무렵 한국에서 한 가정이 저희 집을 방문했었습니다. 제 아내와 오계강목사님이 자랐던 삼천포교회 청년부 출신의 가정이구요, 아내와 오목사에게는 선배가 되는 형제의 가정입니다. 십수년 만에 만나서 반가운 교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이 제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저를 만난 것이 자신의 삶에는 참으로 큰 도움이 되고, 전환점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이미 잊고 있는, 제가 자신에게 해주었다는 이야기, 제가 했다는 설교, 저와 나누었다는 성경 공부들을 줄줄줄 말해줬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 바로 이런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준비해주셔서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그 일을 하게 하시고, 그를 통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렇게 도움을 얻고 힘을 받은 나는 또 어떤 시간에 어떤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의 삶에 같은 영향을 미칩니다. 계획하고 원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바로 그 시간에, 바로 그 역할을 서로에 대해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 바울이 만난 사람들 가장 좋은 예를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삶과 사역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회개했지만 그 다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때 너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와서 안수하고 기도합니다. 사울의 신앙의 첫걸음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가 사울보다 더 훌륭한 신앙인이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그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십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스데반을 죽인 일과 성도들을 핍박한 일을 사죄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바나바를 준비하십니다. 사울은 그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사과를 하고 함께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악행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또 바나바가 그를 찾아갑니다. 당시 안디옥에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 일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그곳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생각해보니 이 일에 가장 적격인 사람은 사울인 것입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바로 그 일에 사울을 초청하여 함께 안디옥 교회로 갑니다. 두 사람이 그 지역에서 협력하여 사역하였고,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생겼습니다. 이후 사울은 사도가 되어 사도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활약을 계속합니다. 그의 선교 활동에 위기가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할 때 동지였던 바나바와 갈등이 생깁니다. 타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가 자신의 조카였던 마태를 데리고 다른 길로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에게 실라라는 좋은 동지를 허락하십니다. 바울은 무사히 전도 여행을 마칩니다. 바울은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녀가 없었습니다. 사랑이 많은 바울은 사랑의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라는 한 청년이 바울에게 나타납니다. 그의 영적인 아들이 됩니다. 바울이 사랑을 마음껏 쏟을 수 있는 대상이 되어줍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의 마지막에 디모데는 그 존재 자체로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그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인생길에서 그들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은 바울을 만났고, 변화의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훌륭하게 충분하게 그 일을 잘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바울 역시 자신의 인생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바로 그 사람이 바울과 함께 함으로 바울이 바른 길 갈 수 있었고, 견딜 수 있었고, 사도 바울로서의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나오미에서 마라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나오미는 삶에 중요한 지점에 서 있습니다. 그녀는 이전에도 중요한 선택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고향땅 베들레헴을 떠나는 결정을 했었고, 연달아 다가온 불행 앞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결정을 했습니다. 와서 보니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상황을 1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룻 1:19) 당시에 온 성읍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았겠습니까? 아마도 베들레헴 성내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지금 한마디씩 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나오미의 이름을 가지고 말했을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뜻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오미의 이전의 선택, 이방 땅으로 살겠다고 간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오미의 자부, 이방 여인 룻에 대해서 말했을 것입니다. 예상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직접 묻기 시작합니다. 엘레멜렉은 어찌 되었고, 말론과 기룐은 어찌되었고 이 이방여인은 누구며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는지 모든 궁금증을 해결하려 합니다. 베들레헴이 들썩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는 이민 교회의 문화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나오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혹은 나오미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나오미를 위하는 마음이 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마치 걱정하는 것처럼, 염려하고 위해서 말하는 것처럼 열심히 묻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전달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때로 기억하고 말하는 것이 고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잊고 싶은데,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데 사람들은 묻고 또 묻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합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현실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면서 지금 너희들의 질문과 대화가 내게 고통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나오미를 걱정하는 것처럼 나누고 있는 그들의 대화가 나오미를 더 아프게 하고, 마치 나오미를 위해서 무엇인가 할 것처럼 묻는 여러 질문들이 나오미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나누는 대화를 보십시오. 어떤 한 성도가 어려움에 빠지거나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함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쉽게, 그리고 자주 저지르는 실수는 염려를 가장한 호기심, 혹은 걱정을 가장한 비난입니다. “흉년이 왔을 때 자기들만 잘 살겠다고 이방 땅으로 가더니, 어떻게.... 지금 저런 모양으로 돌아왔네.” “저것 좀 봐... 이방 여자를 며느리로 데려왔네.... 쯧쯧... 나오미도 말련에 참 불쌍하지... 하필이면 남은 가족이 모압 여자래... 불쌍해서 어쩌나....” 나오미는 마라로 변한 자신의 삶을 자꾸만 확인해주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 지금 너무 큰 고통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 나는 더 이상 나오미가 아니야... 그래, 나는 마라라고! 내 인생은 마라의 인생으로 추락했다고...” 나오미는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더 깊은 마라의 인생이 되고 있습니다. 3. 그때 그 사람 성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늘 위기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성도들에게 피할 길을 내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 여러분, 생각하십시오. 위기가 극대화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오미는 지금 하나님이 준비하신 참 좋은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가까이 있었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사람, 먼 이방 땅에서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동행해준 사람, 룻이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나오미가 미리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알았을까요? 룻이 자신의 역할을 미리 알았을까요? 두 사람은 룻기의 결과를 미리 계획했을까요? 아닙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상식과 판단을 따라 살았더니 마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룻은 결혼해서 거듭 불행을 당했지만 남편의 집을 통해 만났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어떤 뚜렷한 결과를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길이 옳다고 여겨서 따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인생에 허락하신 큰 위로, 아니 새로운 인생의 반전이 바로 룻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렇습니다. 내가 성도라라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나의 판단과 결정의 결과가 내 삶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불행 속에 괴로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고난에 대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늘 피할 길을 예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그 길이 다가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면서 그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면 하나님은 분명 성도를 향한 도움의 손길을 허락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도움을 기다리는 나오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로 사용되는 룻의 역할입니다. 4. “나오미라 부르라!” 룻기 4장에는 이 모든 일의 결론을 보여줍니다. 룻은 보아스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고, 그들 사이에는 오벳이라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이 성경을 읽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아는 것은 이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입니다. 이스라엘에, 아니 인류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가문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라의 삶으로 변했던 나오미가 다시 등장합니다. 룻기 1장에서 나오미는 마라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스스로도 절망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4장, 그 인생에는 대박반전이 펼쳐집니다. 이제 아무도 나오미를 마라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아마도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누가 마라라 그래!!!! 나 나오미야! 나오미!!!! 나를 나오미라 부르라고!!!!” 그녀의 인생에 다시 기쁨이 임했습니다. 영광이 임했습니다. 수치와 고통의 눈물에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있는 삶으로 변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성경이 잊지 않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4장에서 그 사람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룻이 그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을 알았던 고향 사람들은 룻을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룻 4:15)라고 했습니다. 누가 나오미를 마라가 아닌 나오미라는 기쁨과 영광의 이름으로 회복하게 했습니까? 아름다운 믿음의 여인 룻입니다. 룻인들 어찌 절망스럽지 않았겠습니까? 그녀 입장에서 보면 모압 땅에서 유대인과 결혼한 것입니다. 비난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습니다. 남편 가정에 모든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어찌할까요? 동서 오르바는 고향으로 가버렸습니다. 나도 선택해야 합니다. 룻은 자신이 남편의 가정을 통해서 만난 하나님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정은 이후 나오미와 룻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꾸는 놀라운 선택이 되었습니다. 절망이 자신을 결정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슬픔이 자신을 결정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불행이 자신을 결정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고 도움을 받고 관심을 받는 사람으로 자신을 두지 않고, 힘들고 어렵지만 시모를 섬기고 돌보는 사람으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불행하고 연약했지만 더 연약한 사람을 위해 좋은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 땅에 가장 연약한 한 사람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데 성공하신 우리의 참된 이웃, 영원한 이웃 예수님이 선택하신 역할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렵지 않은 인생이 없습니다.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다면 어찌 인생이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내게 도움의 손길, 사랑해줄 사람들을 보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013년에 하나님 안에서 더욱 성숙한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은 남다른 결심을 하나 하시면 좋겠습니다. 나를 나오미의 자리가 아닌 룻의 자리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 이웃의 삶을 마라에서 나오미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함께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이 삶의 고난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때 그 사람’이 되어서 기쁨을 회복하고 감사를 회복하는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룻에게 임한 평강과 은혜가 바로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저의 삶을 나오미의 삶으로 만드시기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서로에게 룻이 되어 나오미의 삶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여인, 이름 없이 사라져갈 한 여인에서 인류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가문의 조상이 된 룻의 아름다운 선택 - 2013년에 서로를 룻으로 만날 수 있는 교회와 가정과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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